1. 크리스타 볼프의 산문, 가상과 실재성의 혼합으로서의 이야기: 크리스타 볼프의 소설 『유년의 본보기Kindheitsmuster』는 1976년에 간행되었습니다. 크리스타 볼프는 『크리스타 T를 생각하며』를 발표한 지 8년 만에 장편 소설을 간행하였습니다. 물론 그 사이에 게어하르트 볼프와 함께 집필한 시나리오, 『틸 오일렌슈피겔』 (1972) 그리고 단편 소설집 『운터 덴 린덴』(1974) 등이 발표되었습니다. 소설 『유년의 본보기Kindheitsmuster』는 내용상으로 그리고 형식적으로 『크리스타 T를 생각하며』와 많은 유사성을 보여줍니다. 가령 작품 속에는 자전적인 내용과 가상적인 내용이 혼재되어 있습니다. 작가는 무엇이 자전적인 내용인지, 무엇이 가장적인 내용인지를 분명하게 구별하지 않습니다. 아니, 이러한 구별 자체가 무의미합니다. 가상과 실재성 사이의 차이를 희석시키는 서술 방식은 주인공이 자신의 과거의 기억을 더듬는 과정 속에서 분명히 나타납니다. 이러한 소설의 기법은 언젠가 요한네스 보브롭스키Johannes Bobrowski가 사용한 것입니다. 보브롭스키는 그의 산문작품에서 추측과 여백을 유추의 방식으로써 진솔하게 서술하였습니다. 볼프는 구동독의 건설기라든가, 전후의 동쪽 독일 지역에서 나타난 사회주의적 갈망 등을 넘어서서, 이전의 시대, 다시 말해 파시즘이 횡행하던 히틀러의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갑니다.
2. 일상적 파시즘의 독소: 파시즘, 즉 국가 사회주의는 구동독의 젊은 세대들의 의식 내지 과거의 기억 속에 각인되어 있습니다. 작가는 자신과 동일한 세대의 젊은이들이 어떠한 방식으로 유년시절부터 국가사회주의의 사악한 영향을 받았는지를 세밀하게 서술합니다. 문제는 이러한 나쁜 영향이 전쟁이 끝난 뒤에도 어른들의 의식 내지 행동 양상에 은밀히 배여 있다는 사실입니다. 구동독 작가, 슈테판 헤름린Stephan Hermlin은 볼프의 작품 『유년의 본보기』를 거론하면서, 구동독에서 뿌리를 내린 일상적 파시즘이라는 독소가 얼마나 강한지를 극명하게 보여준다고 말했습니다. 크리스타 볼프는 작품에서 다음과 같이 질문을 던집니다. “우리는 어떠한 과정을 거쳐서 오늘날의 우리로 살아가고 있는가?” 사실 한 인간의 인성 그리고 세계관은 부모와 가족의 영향 과거의 경험으로 굳어지는 무엇입니다. 그렇기에 개개인의 인성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 일상적 파시즘의 독소를 지적하는 것은 무엇보다도 중요하다고 판단되었습니다. 이로써 볼프는 구동독의 제반 문제점으로부터 한 걸음 벗어나서 과거 극복이라는 보다 광범하고, 보다 심층적인 주제를 천착하였습니다.
3. 고향의 도시로 향하는 여행, 과거의 흔적을 더듬기: 소설의 틀은 주인공의 여행이야기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주인공 “나”는 가족들과 함께 지금은 폴란드에 속하고 있는 자신의 고향 도시로 여행을 떠납니다. 여행지는 크리스타 볼프의 고향인 소도시, 란츠베르크입니다. 주인공은 오랜만에 가족 여행을 계획하여 그곳으로 떠난 것이었습니다. 그미는 20년 전의 기억을 떠올리고, 심지어 그 이전의 시절까지 거슬러 올라가, 유년의 삶까지 거슬러 올라갑니다. 그렇지만 유년은 화자에 의해서가 아니라, 넬리 조단이라는 소녀의 눈에 비친 형상들로 인지되고 있습니다. 넬리 조단은 3세의 소녀입니다. 1933년 초에 히틀러는 권력을 장악했습니다. 친숙하지만, 낯선 소녀는 당시의 현실을 흐릿한 여운으로 떠올립니다. 1970년대의 시점에서 넬리 조단은 40대의 여성입니다. 그미에게는 딸, 렌카가 있습니다. 넬리는 1930년대와 40년대 란츠후트를 중심으로 전개되는 과거의 일상을 기억 속에서 떠올립니다.
4. 소시민, 현존하면서도 현존하지 않은 존재: 그렇다고 해서 볼프가 무조건 소시민들의 근시안을 비난하지는 않습니다. 일반 사람들의 사적인 구체적인 삶 속에는 그들만의 고유한 정서, 이를 테면 고뇌, 갈망. 해원 등이 숨어 있습니다. 대부분 소시민들은 눈앞의 삶을 중시하고 생업에 몰두하기 때문에, 정치적 사안을 그다지 중요하게 여기지 않습니다. 그들은 자신의 주머니의 돈에 대해서는 민감하지만, 정치가들이 횡령하고 착복하는 거금에 대해서는 둔감합니다. 이는 동쪽 독일 지역에서 살던 일반 사람들에게도 적용되는 말입니다. 일반 사람들은 국가가 관습 도덕 그리고 법 등을 통하여 얼마나 많은 것을 자신에게 요구하는지 제대로 의식하지 못합니다. 어쨌든 파시즘의 이데올로기는 란츠베르크 소도시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의식을 지배하고 있었습니다. 자고로 소시민들은 정치적 사건에 직접적으로 연루되지 않은 자들입니다. 아니, 그들은 급변하는 역사 속에서 마치 그림자로 살아갑니다. 그들은 자신의 삶이 정치적 변화와 직결되어 있지 않다고 여기고, 그냥 당국이 요구하는 것을 받아들이면서 살아갑니다. 히틀러 정권 하에서 그들은 마치 현존하면서도 현존하지 않는 존재처럼 주위 사람들에게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못합니다. 이 시대의 끔찍한 비밀은 소시민들의 그림자처럼 살아가는 일상 속에 은밀히 감추어져 있습니다.
5. 넬리 조단의 유년시절: 제 18장은 넬리 조단의 유년 시절이 서술되고 있습니다. 그미는 식료품 가게주인의 딸이었습니다. 가족들은 정치적 문제로 자주 다투곤 합니다. 넬리의 부모님들은 주위의 친척들과 만나곤 합니다. 당시 넬리가 다니던 학교 생활 그리고 “독일 처녀 연맹BDM”에서 개최하는 자유 시간 프로그램 등이 흐릿하게 서술되고 있습니다. 넬리는 자신의 의사와는 무관하게 학교 당국이 요구하는 전체주의의 강령을 막연히 추종하면서 살아갑니다. 간간이 내적인 저항감을 느끼지만, 스스로 문제들을 설정하여, 이를 스스로 해결해나가는 과정을 서술합니다. 이로써 작가는 다음의 사항을 우리에게 전합니다. 즉 삶에 있어서 어떤 정치적 사건이 무조건 한 인간의 삶을 규정하는 게 아니라는 사실 말입니다. 정치적 사건보다도 더 중요한 것은 개인의 고유한 생각과 미래에 대한 열망입니다. 그렇지만 세상은 전쟁 이전에 그리고 전쟁의 과정 속에서 무조건 힘 있는 자들의 말을 들어야 한다고 우리에게 요구합니다. 그렇기에 세상의 요구 사항이 언제나 상명하달의 방식으로 전해 내려옴으로써, 삶에서의 개인들의 자유로운 선택과 결단 등을 처음부터 차단시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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