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넬리 조단의 가족들 그리고 그들의 삶: 볼프는 넬리 조단이 떠올린 정치적 사건들 그리고 이를 둘러싼 일반 사람들의 반응 등을 차례로 서술해나갑니다. 이를테면 유대인 박해와 유대인 상점의 유리창을 박살내던 수정의 밤 사건, 에스파냐에서 발생한 내전, 1939년 폴란드 침공 등은 분명히 정치적 사건입니다. 이러한 사건들은 그저 신문에 보도될 뿐, 오더 강의 왼쪽에 위치한 소도시의 사람들에게 그다지 커다란 심적 변화를 가져다주지 못합니다. 1933년 독일 사람들이 언론의 자유를 외치고 광장에 모였을 때, 당국은 이들을 강제로 해산시켰습니다. 문제는 넬리 조단의 가족들이 이에 대해서 아무런 관심을 표명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어떠한 정치적 표현을 외부로 드러내지 않았으며, 대중 집회에 적극적으로 참가한 적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7. 기회주의적으로 처신한 넬리의 아버지: 식료품 가게를 운영하는 넬리의 아버지는 히틀러 돌격대원들에게 식료품을 공짜로 나누어주었습니다. 이전에는 좌파 혁명가들의 정치자금으로 작은 금액을 지출하기도 했습니다. 넬리의 아버지는 입영 통지서를 받고 군인으로 차출됩니다. 다행히 유대인 학살을 위한 발포 명령을 실행에 옮기는 임무에서 배제되었습니다. 그러나 세상은 -어린 아이의 눈에는- 완전히 가치가 전도된 것처럼 보였습니다. 넬리 조단의 가족들은 적군단의 공격으로 서쪽 지역으로 도주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넬리는 우연히 유대인 강제수용소에서 탈출한 죄수와 조우합니다. 마치 시체 한 구가 강시처럼 살아 움직이는 것 같아서 그미는 경악에 사로잡힙니다. 이때 넬리는 세상의 몰락을 다시 한 번 실감할 수 있었습니다. 행여나 피해당할까 두려운 나머지, 자신의 일기장을 불태우기도 하였습니다. 넬리의 아버지는 전쟁이 끝나고 집으로 돌아왔는데, 아버지는 그야말로 낯선 이방인처럼 보였습니다. 넬리는 어느 날 폐결핵을 앓게 됩니다. 그렇지만 미래에 대한 관심 때문인지는 몰라도 그미는 끝내 살아남게 됩니다. 1947년 그미가 건강을 되찾을 때 소설은 끝이 납니다.
8. 과거 삶의 기억과 현재 살아가는 사람들의 행동 양상: 넬리 조단을 둘러싼 이야기는 화자의 기억으로 서술됩니다. 그것은 소설의 복합적인 관점 속에 뒤섞여 있습니다. 가령 소설의 내용은 삼층 구조 속에서 (1, 1971년 자신의 고향의 소도시, 란츠후트로 향하는 여행기, 2. 넬리 조단 가족들 그리고 화자 사이의 대화, 3. 1972년에서 1975년 사이에 집필된 원고에 관한 이야기), 다시 말해서 3차원적 복합적 차원 속에서 직조되어 있습니다. 아니, 이러한 이야기는 현재의 현실과도 관련성을 드러냅니다. 작가는 70년대 초의 동독의 현실적 체험 그리고 인상 등을 서술하면서, 놀라운 질문을 던집니다. 그것은 다름 아니라 파시즘 시대에 살았던 사람들의 행동 양상이 현재의 현실에도 여전히 존속되고 있는가?“ 하는 질문입니다. 주어진 현재에도 세상에서는 많은 사건이 발발하고 있습니다. 베트남 전쟁, 칠레의 쿠데타, 칠레 당국의 계엄령 등에 관한 논평 역시 소설 속에 첨가되어 있습니다. 작가는 이로써 ”정치적 사건 그리고 사람들의 반응은 과거에 나타난 그것들과 어찌 무관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하고 반문합니다.
9. 무감각성, 경직성 그리고 습관화에 대한 비판: 소설의 화자는 사적인 삶의 경험 그리고 역사적으로 나타난 정치적 사건 사이에서 어떤 관련성을 발견해내려고 의도합니다. 그렇게 해야만 우리는 자신의 고유한 정체성을 재확인하여, 개별 인간이 이른바 “무감각성, 경직성 그리고 습관화”에 저항할 수 있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현대인으로 하여금 더 이상 과거를 돌이켜보게 하지 않고, 주어진 현상과 질서에 맹목적으로 순응하게 작용하기 때문입니다. 첫째로 무감각성은 세상의 사건은 나와 무관하다고 느끼는 태도에서 비롯합니다. 둘째로 경직된 인간은 나와 타인 사이에 분명한 줄을 긋는 태도 내지 다른 사람의 불행이나 고통을 외면하려는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셋째로 습관화는 끔찍한 사건에 대해 주눅이 든 경우를 가리킵니다. 폭력이 일상화될 때 우리는 폭력의 끔찍함을 대수롭지 않게 여깁니다. 글쓰기는 무감각성, 경직성 그리고 습관화를 떨치기 위한 노력과 같습니다. 볼프는 1968년에 발표한 에세이 『읽기와 쓰기Lesen und Schreiben』에서 다음과 같이 표명하였습니다. “글쓰기는 현실이 더 이상 당연한 무엇으로 느껴지지 않을 때 시작된다.” 글쓰기의 관련성은 개인적으로 자신의 문제가 생생하게 건드려지는 순간에 느껴질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주어진 현실이 나와 어떤 직접적인 연결고리를 전해줄 때 크리스타 볼프는 글쓰기를 시작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러한 이유에서 볼프는 글쓰기의 관련성을 “주관적 실재성”이라고 규정하였습니다.
10. 주관적 실재성, 복합적 차원의 관점 그리고 역사의 편린을 유추하고 기억해내는 방식: 볼프는 “주관성 실재성”이라는 표현으로써 자신의 소설 작업, 다시 말해서 개인적 체험 그리고 역사적 사실 사이를 연결시키는 과업을 분명히 정의내린 바 있습니다. 이를 위해서는 작가는 종래의 소설적 표현방식을 고수할 수는 없습니다. 개인의 주관적 체험만을 서술하게 되면, 작가는 역사적 체험 속에 도사린 어떤 근본적 문제를 엄정 중립적으로 파악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작가가 마치 르포를 집필하는 기자처럼 역사적 사건 자체에 매달릴 수는 없습니다. 가장 바람직한 것은 역사적 체험의 구조가 서술의 구조와 일치되도록 소설을 집필하는 일입니다. 그러나 이를 위한 소설 기법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현대에 이르러 한 개인이 역사를 좌지우지하지 않으며, 개개인은 역사라는 강물의 흐름 속의 수많은 물방울로 흘러가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소설적 내용은 수많은 사건의 실타래 속에 뒤엉켜 있습니다. 그렇기에 개인의 일직선적인 스토리 전개의 방식으로는 전달될 수가 없습니다. 따라서 작가가 선택하는 것은 복합적 차원의 관점이며, 역사의 편린을 유추하고 기억해내는 방식입니다. 서방 세계는 크리스타 볼프의 소설 구조를 높이 평가하였습니다. 사람들은 소설 『유년의 본보기』를 주제 상으로 그리고 소설 기법적인 측면에서 독일 문학의 수준을 끌어올리는 데 일조한 작품으로 평가하는 데 주저하지 않고 있습니다.
'47 Wolf' 카테고리의 다른 글
서로박: 볼프의 "메데이아" (2) (0) | 2018.08.03 |
---|---|
서로박:볼프의 메데이아 (1) (0) | 2018.08.03 |
서로박: 볼프의 "유년의 본보기" (1) (0) | 2018.08.03 |
볼프: 뷔히너 문학상 수상 연설문 (6) (0) | 2018.07.19 |
볼프: 뷔히너 문학상 수상 연설문 (5) (0) | 2018.07.1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