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 유토피아

서로박: (2) 토마스 뮌처의 천년왕국설

필자 (匹子) 2023. 4. 2. 11:39

(앞에서 계속됩니다.)

 

6. 뮌처의 강인하고 짧은 삶 (4): 1521년은 루터에게는 끔찍한 시련의 해였습니다. 그는 종교 개혁의 선언으로 보름스 성당에서 심문을 당하면서 쭉을 고비를 넘깁니다. 뮌처는 바로 이 시기에 프라하 선언을 발표하고, 종교 개혁에 전력투구하기로 결심합니다. 16세기 얀 후스를 추종하는 사람들이 결성한 타보르 종파는 겉으로는 로마 가톨릭과 연결고리를 완전히 끊지는 않았지만, 내적으로는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지상의 평등한 천국을 건설하려 하고 있었습니다. 두 번째 잠행의 시기에 뮌처는 알트슈테트에 있는 요한니스 교회의 목사로 부임합니다. 이때 그는 창의력을 발휘하여 제법 많은 글을 집필합니다.

 

1524년에 이르러 주어진 여건은 정반대로 변화됩니다. 독일 남서부 슈틸링겐에서 농민들의 봉기가 시작된 것이었습니다. 뮌처는 1524713일 제후들 앞에서 설교를 행합니다. 이것이 뮌처의 유명한 글, 제후 앞의 설교F̂ürstenpredigt입니다. 그의 음성은 예언자 다니엘을 방불케 할 정도로 막강하고 명징한 것이었습니다. 행여나 제후들을 설득하면 그나마 일반 사람들의 현실적 삶의 질이 향상되리라고 여겼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견해는 나중에 어리석은 것으로 결판나고 맙니다. 원래 제후들은 백성들의 세금을 수령하여 자신의 부를 누리는 계급이라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았던 것입니다. 권력자들은 기존의 종교 단체와 은밀히 야합하여, 인민을 교묘하게 탄압한다는 것을 깨달을 시기가 바로 이때였습니다.

 

7. 뮌처의 강인하고 짧은 삶 (5): 이때부터 6개월간 거사 준비의 시기가 시작됩니다. 뮌처는 152487일에 자신에게 다가오는 위험을 감지하고 튀링겐 지역의 뮐하우젠으로 도주합니다. 제후들 그리고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에게 기대할 것은 아무 것도 없으며, 남은 것은 무장 봉기밖에 없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깨달을 때가 바로 이 순간이었습니다. 뮌처는 11월에 루터의 종교개혁 반박하는 팸플릿을 제작하고 이를 배포한 다음에 남쪽 슈바르츠발트로 향합니다. 15252월에 뮐하우젠으로 되돌아온 뮌처는 튀링겐 지역의 농민 전쟁에 앞장섭니다. 루터는 1525강도짓과 살인을 저지르는 농부 도둑떼들에 반박하며  Wider die mörderlischen und räuberischen Rotten der Bauern라는 글을 발표합니다. 이 글은 지극히 체제 옹호적이자 반동주의로 무장한 글이었습니다. 1525년에 거사의 시기가 도래합니다. 그해에 5월에 프랑켄하우젠에서 대대적인 전투가 발발합니다. 헤센의 제후 필립은 정규군을 풀어서 저항하는 농부들을 남김없이 도륙합니다. 515일 뮌처는 정규군에 의해 체포되어, 헬드룽겐 요새에서 끔찍한 고문을 당합니다. 517일 뮌처는 하인리히 파이퍼와 함께 뮐하우젠 광장에서 처형당합니다. 그의 수급과 몸통은 쇠창살에 꽂힌 채 광장에 오래토록 전시되었습니다.

 

8. 신비주의에 입각한 믿음: 뮌처의 사상은 신비주의의 토대 하에 형성되었는데, 나중에 네 가지 사항과 관련성을 맺게 되었습니다. 첫째는 심령주의 신앙이며, 둘째는 세례 운동이며, 셋째는 계시록에 대한 믿음이고, 넷째는 사회 혁명적 실천을 가리킵니다. 첫째로 믿음은 영혼의 심연 속에 도사린 하나의 사건으로 이해됩니다. 그것은 신과의 내밀한 조우를 전제로 합니다. 그것은 신이 인간의 영혼에게 내밀하게 전해주는 말씀의 작용과 같습니다. 따라서 올바른 신앙이 형성되는가, 아닌가하는 물음은 오로지 신에게 달려 있습니다. 인간의 영혼을 건드리는 신의 첫 번째 작용은 신에 대한 외경심입니다. 거기에는 오로지 성령만이 인간의 내밀한 영혼에 영향을 끼칠 수 있습니다.

 

이에 비하면 인간의 이기심이라든가 특정 인간에 대한 두려움은 신앙과는 거리가 먼 잡념일 뿐입니다. 주님의 정신을 체험하려는 영혼은 일단 자신의 마음속에서 일상사의 근심이라든가, 사적 욕망 등을 제거해야 할 것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뮌처는 머무름Langweyl” 그리고 여유Gelassenheit라는 태도를 도입합니다. 마음속의 잡념이 사라져야만, 우리는 영혼의 텅 빈 상태에 도달할 수 있습니다. 한 곳에 오래 머물면서 여유로움에 침잠하는 인간은 자신의 내면 심층부에서 생동하는 신의 작용을 감지할 수 있습니다. 신의 작용을 느끼는 인간은 더 이상 자신에게 가해지는 고통을 더 이상 두려워하지 않으며, 성령과 함께 살아갈 수 있다는 기쁨을 느끼게 됩니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서 출현하게 되는 것은 인간의 의지와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의 의지 사이의 만남입니다. 이 만남이야 말로 진정한 신앙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9. 성서에 대한 뮌처의 입장: 성서는 대체로 어떤 경험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빛으로 환해진 영혼이 생동하는 신과의 만남 속에서 획득한 경험입니다. 성서는 사람들로 하여금 이와 유사한 경험을 알려주는 초대장과 같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뮌처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즉 성서의 내용을 접함으로써 신앙인은 자신의 고유한 경험을 축적할 수 있다고 합니다. 요약하건대 성서는 그 자체 외부의 말씀verbum externum으로서, 개별적 인간의 마음속에 도사린 내부의 말씀  verbum internum을 전달할 수 있는 수단으로 작용합니다. 그렇지만 내부의 말씀은 반드시 성서에 기록된 외부의 말씀을 필요로 하지는 않습니다. 다시 말해서 인간은 성서 없이도 얼마든지 자신의 고유한 경험을 통해서 기독교인이 될 수 있다고 합니다. 따라서 성서는 뮌처에게는 신앙을 위해서 보조적인 역할을 담당하는 매개체에 불과합니다. 실제로 성서 속에서는 외부의 말씀없이 기독교 신앙을 선택한 자들의 이야기가 상당부분 실려 있습니다. 바로 이러한 입장 때문에 뮌처는 루터와 근본적으로 다른 길을 걷게 됩니다.

 

(계속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