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 유토피아

서로박: (3) 토마스 뮌처의 천년왕국설

필자 (匹子) 2023. 4. 2. 11:40

(앞에서 계속됩니다.)

 

10. 심령주의 신앙과 세례: 뮌처는 글과 문헌을 중요한 무엇으로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뮌처는 다음과 같이 주장합니다. 식자들의 지식이 아니라, 진정한 믿음을 투시한 사람이야 말로 구약과 신약의 정신을 올바르게 수용한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신을 두려워하는 예언자들이야 말로 현재 현실에 관여하는 신의 의지를 인지하고 인식할 뿐이라고 합니다. 바꾸어 말하면 신의 뜻을 투시한 예언자만이 신의 말씀을 전할 수 있을 뿐이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필자는 영지주의라는 단어를 의도적으로 사용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영지주의와 심령주의는 영혼을 인지하려고 노력한다는 점에서 동일하지만, 영지주의는 기원 후 그리스도의 영혼을 재발견하려는 그노시스 학파로서, 하나의 종파의 차원에서 이해될 있습니다. 이에 비하면 심령주의Spiritualism”는 기독교 외에도 불교 등 다른 종교에서도 발견되는 사상으로서 다소 포괄적인 의미를 지닙니다.) 실제로 뮌처의 책에는 중세 신비주의의 영향이 자주 나타납니다. 그의 문헌을 연구하면, 우리는 뮌처가 14세기에 독일어로 간행된 신비주의 서적 독일 신학Theologia deutsch그리고 요한네스 타울러Johannes Tauler의 서적을 탐독했다는 것을 간파할 수 있습니다.

 

11. 세례의 본질적 의미: 심령주의자로서 뮌처는 유아 세례를 거부하였습니다. 진정한 세례는 뮌처에 의하면 정신의 세례를 가리킵니다. 세례란 신앙을 수용하는 내면의 과정에 대한 외적 표시라고 합니다. 따라서 그것은 일단 신앙심을 지녀야 가능하다고 뮌처는 못 박고 있습니다. 정신의 세례를 수용하는 자는 신의 목소리를 듣고 신의 모습을 보아야 합니다. 그리스도는 세례의 예식이 개최되는 동안 세례 받는 자의 영혼의 깊은 심연의 물 위에서 무언가를 들려주고 자신의 움직임의 모습을 보여준다고 합니다. 그렇기에 세례는 뮌처에게는 인간 영혼 속에서 작용하는 신의 움직임과 신의 말씀에 대한 상징,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심령주의에 바탕을 둔 기독교 신앙은 영혼의 깨달음을 중시한다는 점에서 불교에서 말하는 보살 신앙과 일맥상통하고 있습니다. (길희성: 45). 정신적 영성적 측면을 고려할 때 영혼의 깨달음에 관한 뮌처의 언급은 불교의 구도적 수련을 연상시킵니다.

 

12. 계시록에 대한 뮌처의 입장: 성서의 계시록 가운데 뮌처는 다니엘그리고 요한 계시록을 높이 평가하였습니다. 이를테면 요한 계시록의 제 174절 그리고 루카의 복음서1816절에는 자주색의 화려한 옷을 걸친 바빌로니아의 창녀가 등장합니다. 뮌처는 그미를 로마 가톨릭 교회의 사제로 비유하였습니다. 보석으로 치장한 창녀가 바로 부패한 로마 가톨릭 교회의 고위수사들과 같다는 것입니다. 뮌처는 자신의 글,제후의 설교에서 구약성서의 다니엘2장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여기서는 네 개의 거대한 제국이 등장하는데, 그것은 바빌로니아, 페르시아, 그리스 그리고 로마를 가리킵니다. 이와 관련하여 다섯 번째 제국은 뮌처 자신이 처한 국가라는 것입니다. 다섯 번째 제국은 여전히 철의 시대에 불과하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가난한 자들과 힘없는 자들이 지금 이 순간에도 억압당하면서 억울하게 살아가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따라서 오늘날 절실하게 요청되는 것은 다니엘과 같은 예언자라고 합니다. 우리가 기대할 분은 이를테면 세례자 요한이라든가 엘리야와 같은 예언자라고 합니다. 만약 엘리야가 다시 세상에 출현하면, 그분은 신의 뜻에 합당하게 세계의 질서를 재정비하리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사악한 신을 모시는 거짓 수사들은 처벌되고, 교황 중심의 종교 권력자는 죽음을 면치 못하리라고 합니다.

 

13. 혁명의 신학: 뮌처는 계시록의 내용을 고찰하면서, 자신의 시대를 신의 법정이 개최되기 시작하는 시간으로 규정하였습니다. 인간에게 빵을 선사하는 밀은 잡초로부터 구분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나는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려고 이곳에 왔다(마태오의 복음서 1034)는 그리스도의 말씀은 뮌처에 의하면 오늘날에도 유효하다고 합니다. 뮌처는 귀족과 제후들이 모여 있는 곳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마구간에서 태어났으며, 가난하고 억압당하는 사람들의 편에 서 있다고 합니다. 화려한 외투를 걸치고 비단의 의자에 앉아 있는 자들은 그리스도에게는 끔찍한 악한들이라는 것입니다. 기실 뮌처는 자신의 시대의 문제점을 분명하게 통찰하였습니다. 상기한 내용을 고려할 때 그의 사회 윤리학적인 관심사는 신비주의 신앙과의 밀접한 관련성 속에서 태동한 것입니다. 뮌처는 신에 대한 외경의 마음을 고취시켰을 뿐 아니라, 신을 공경하는 자들에게 그들을 위한 사회적 정의를 부르짖었습니다. 왜냐하면 성령이 주어진 현재에 자리하고 있는 모든 죄악을 용서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14. 피의 보복자 내지 소송인으로서의 성령: 성령은 피의 보복자παράκλητος로서 마지막의 날에 출현하는 분입니다. 그분은 조로아스터교에서 말하는 보후마노로서 죄악을 척결하고, 세상을 선으로 가득 차에 만드는 성스러운 영혼입니다. 마르틴 루터는 -앞장에서 언급했듯이- “성령위안자Tröster”로 번역함으로써, 원래 성령이 지니고 있는 복수 내지 보복의 의미를 완전히 희석시키고 말았습니다. 루터는 라틴어를 마치 모국어처럼 능수능란하게 구사했지만, 그리스어를 잘 알지 못했습니다. 그는 성서를 번역할 때, “72인의 그리스 성서Septuaginta를 직접 원전으로 대한 게 아니라, 에라스뮈스의 그리스 성서의 주해서 그리고 당시에 전해 내려오던 라틴어 번역서Vulgata을 참고하였습니다. 1529년 루터는 학자들을 위하여 라틴어 성서의 수정판을 간행하기도 하였습니다. 성령은 인간의 영혼을 위로해주고 달래주는 존재가 아니라, 정의로움을 위하여 억울하게 고통당하고 핍박당하는 자들을 대신하여 복수를 감행하는 소송인입니다. 상기한 이유로 인하여 성령을 기다리는 마음은 가난한 사람들이 갈구하는 혁명의 기대감과 일맥상통하고 있습니다.

 

15. 프라하 선언: 상기한 내용이 맨 처음 담겨 있는 문헌은 뮌처의 프라하선언입니다. 이 글은 문헌학의 측면에서 고찰하면 네 개의 버전으로 나누어집니다. 첫 번째 문헌은 1512년에 집필된 것으로 가장 짧습니다. 두 번째 문헌은 1129일이라는 날짜가 기록되어 있으며, 사제 계급 외에도 제후 계급에 대한 비판이 담겨 있습니다. 두 번째 문헌에는 보헤미아의 과업과 결부된 저항이라는 부제가 실려 있습니다. 세 번째 문헌은 문체상으로 가장 매끄럽게 기술된 것인데, 뮌처가 라틴어로 작성한 게 분명합니다. 그가 별도로 라틴어 문헌을 남긴 것은 무엇보다도 지식인 계층에게 자신의 뜻을 전하고 싶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네 번째 문헌은 체코어로 번역된 프라하 선언입니다. 프라하 선언은 다음과 같은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하느님에 관한 진정한 인식은 살아계시는 올바른 주님을 말씀을 듣고, 온갖 박해를 견뎌내는 자들에 의해서만 가능합니다. 오로지 이들만이 주님에 우리 속에 계신다는 것을 고백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성령이 우리의 내면에 계신다는 말은 신비주의의 직관을 강조하는 자세와 관련되는데, 이는 신앙의 토대로 자리하는 주장입니다. (길희성: 47쪽 이하). 이른바 식자들은 이를 정확히 이해하지 못하고, “오로지 성서에서 훔친 단순한 문자를 퍼뜨릴 뿐입니다.

 

16. 프라하 선언 (2): 주님은 성령을 통해서 인간에게 이성을 열게 하였습니다. 성령이야 말로 우리가 진정한 의미에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보장해준다고 합니다. 주님의 살아계시는 말씀을 들으려는 자는 자신이 애타게 간구하는 바를 하나님 앞에서 내밀하게 고백해야 합니다. 그렇게 하면 그분은 주님이 우리 안에 계신다는 것을 겸허한 마음으로 전해주실 것입니다. 이에 반해 사제와 성직자들은 주님과의 직접적인 조우를 가로막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신학을 통해서 우리가 성서의 속뜻을 들을 수 없도록 방해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다음과 같이 주장합니다. 신은 절대로 개개인과 직접 대화를 나누지 않는다고 말입니다. (Franz: 7). 나아가 제후와 영주들은 이러한 사제들의 영향력은 은근히 방조하고 있습니다. 사제들은 하나님의 진솔한 말씀을 그대로 전하지 않기 때문에 그들의 설교에는 경박한 허사만 자리하고 있을 뿐이라고 합니다. 중요한 것은 진정한 믿음을 통해서 성령이 우리의 내면에 자리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닫는 일이라고 합니다. (Franz: 12ff.)

 

(계속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