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나의 글

라스카사스, 인종 그리고 국적 (4)

필자 (匹子) 2022. 2. 3. 10:20

11.

남한의 고등학교 교과서에는 종교 개혁자로서 루터Luther와 칼뱅 Calvin에 관한 사항들만이 적혀 있습니다. 토마스 뮌처와 바르톨로메 라스카사스는 이름조차 거명되지 않습니다. 이승만의 반공주의는 우리로 하여금 오랫동안 계급 문제를 직시하지 못하도록 조작했던 것입니다. 극단적으로 말하면 루터와 칼뱅은 우리가 추종해야 할 바람직한 종교 개혁가는 못 됩니다. 칼뱅은 돈의 이데올로기에 동조하면서, 자본주의의 이익 추구 행위를 종교적으로 용인하였습니다.

 

마르틴 루터는 도덕적으로 방종한 인간이었습니다. 그는 수사의 이중 결혼을 요구했을 뿐 아니라, 개인적으로 유대인에 대해 커다란 적개심을 드러내기도 했습니다. 어디 그뿐일까요? 루터는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농민을 저버리고 권력과 결탁하지 않았던가요? 루터로 인하여 수많은 농민들이 처형당했던 것입니다. 루터의 말 “내일 지구가 몰락하더라도 오늘 사과나무를 심으리라.”는 발언은 (이것은 스피노자의 발언으로 잘못 소개되고 있는데, 루터의 발언이 맞습니다.) 소시민들로 하여금 지구의 몰락과 관계되는 거대한 혁명으로부터 등을 돌리게 하고, 눈앞의 이득에만 신경 쓰도록 자극했습니다.

 

12.

행동하는 인간에게는 두 가지 태도가 엿보입니다. 그 하나는 열광이고, 다른 하나는 냉정입니다. 목표는 열광적으로 그리고 철저한 확신으로 다져져야 합니다. 혁명가가 어떤 거사를 진행하기 위해서 주위 사람들과 허심탄회하고 토론하고, 민주적인 방법으로 모든 내용을 논의해야 할 것입니다. 고리하여 동지들은 이른바 고뇌의 동질성을 인지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행동의 단계에서 사람들은 내정하게 모든 것을 일사불란하게 진척시켜야 할 것입니다. 혁명의 소용돌이 속에서는 생각하고 사도할 겨를이 주어지지 않습니다. 모든 수단은 주도자에 의해서 냉정하게 그리고 유연하게 규정되어야 합니다. 군대식의 명령 하달, 그리고 정확하고도 신속한 임무의 수행을 위해서 우리는 무엇보다도 냉정함을 잃어서는 안 됩니다. 바로 그것이 이른바 목표와 수단 사이에서 인간이 견지해야 할 열광과 냉정이며, 두 가지의 서로 다른 현실적 단계에서 견지되어야 하는 혁명가의 자세일 것입니다.

 

13.

기독교의 가치는 무엇보다도 이단자를 속출하게 한 데 있다고 에른스트 블로흐 (Ernst Bloch)는 말했습니다. 카타르, 보고밀, 알비 등과 같은 수많은 이단 종파들을 생각해 보세요. 이들은 마니 종교의 영향으로 극도의 금욕으로 살아가면서 사회 개혁에 대한 의지를 굽히지 않았습니다. 이로써 우리는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습니다. 종교, 특히 기독교의 가치는 주어진 권력에 대한 저항과 인간적 품위를 되찾기 위한 처절한 도전으로 이해될 수 있다고 말입니다. 수많은 순교자들은 화형대에서 자신의 몸이 타들어가는 고통을 느끼면서도, 자신의 종교적 신념을 굽히지 않으며, 주를 애타게 갈구하면서 죽어갔습니다. 말하자면 기독교 참다운 정신은 순교자의 죽음으로써 증명되었습니다.

 

라스카사스 역시 이단자로 몰릴 뻔 하였습니다. 가령 그가 말년에 참가한 바야돌리드 논쟁을 생각해 보십시오. 가령 세풀베다는 에스파냐의 식민지 정책을 옹호하고, 인디언의 문화를 저열하다고 주장했습니다. 라스카사스는 놀라운 언변으로 세풀베다의 거짓된 논리를 완전히 꺾어놓았습니다. 종교가 근엄한 이데올로기로 이용당하는 시대에 라스카사스가 처형당하기는커녕 논쟁에서 승리한 것은 그야말로 놀랍고도 반가운 일입니다. 이는 그가 오랫동안 에스파냐 출신의 성직자로서 진리에 대한 믿음을 고수하며 끊임없이 노력한 결과였습니다.

 

14.

오늘날에서 인종 갈등은 끊이지 않습니다. 체첸의 분리 독립과 피 터지는 학살극, 헤르츠 체고비나를 둘러싼 유고 사태 등을 생각해 보십시오. 아니, LA에서 살아가는 한국인들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들은 80년대와 90년대에 그곳에서 흑인과 마찰을 겪었습니다. 그 까닭은 한국인들이 여러 인종들과 공존하며 살아가는 방법을 배우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흔히 말하기를 한국은 공식적으로 일본의 식민지였을 뿐, 백인 나라의 식민지로 온존한 적이 없다고 합니다. 주한 미군의 경우는 예외이겠지만, 한국인들이 한반도 내에서 백인과 흑인들과의 마찰 평화롭게 살아가는 방법을 배우지 못한 것은 사실입니다.

 

다른 사람의 낯선 삶의 방식을 이해하고 이를 받아들이는 것 - 이는 다인종 사회에서 고수되어야 할 평화 공존의 필수적인 전제조건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한국인의 눈에는 대체로 흑인들이 놀고먹는 음탕한 무식쟁이들로 보였고, 흑인의 눈에는 대체로 한국인들이 자기네끼리 똘똘 뭉치는, 가족 중심의 일벌레들로 비쳤습니다. 이것이 결국 LA의 폭동으로 비화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