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나의 글

라스카사스, 인종 그리고 국적 (3)

필자 (匹子) 2022. 2. 1. 05:56

7.

독일의 작가, 게르하르트 하웁트만 Gerhart Hauptmann은「소아나의 이단자」라는 단편을 발표하였습니다. 주인공, 25세의 젊은 프란체스코는 신앙심이 투철하고, 자신의 복음을 이웃에게 전하려는 열정을 지닌 목사입니다. 어느 날 그는 스위스의 탄광 지역에 머물다가, 이국적 면모를 지닌 천진난만한 처녀와 마주칩니다. 그의 마음을 순간적으로 끓어오르게 한 것은 한 번도 체험하지 못한, 놀라운 사랑의 열정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신앙을 저버리고 그미와 함께 자연의 품속에서 살면서, 자신의 첫 번째 사명을 망각합니다.

 

이와 유사한 예는 수없이 발견됩니다. 혹자는 외국의 어느 곳에 정착하고, 그곳의 여성 혹은 남성과 결혼하면서 정주하기도 합니다. 인간은 때로는 자신의 일방적 세계관을 저버리고, 다른 나라, 다른 인종, 다른 문화를 수용할 필요가 있습니다. 과연 유럽, 유럽의 문화, 유럽의 인종만이 우월하다고 말할 수 있는가요? 라스카사스는 이에 대해 정반대의 견해를 내세웁니다. 유럽 문화는 인디언의 문화보다 우월하지 않다고, 두 개의 문화는 서로 우월을 가릴 수 없을 정도로 제각기 이질적 요소를 지니고 있다고 말입니다.

 

카를 마르크스의「포이어바흐 테제」는 교사도 교육받아야 마땅하다고 우리에게 전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누군가를 가르치려고 고래고래 고함지르며 악을 쓰지 말아야 합니다. 말할 때도 자신의 말과 남의 반응을 들으십시오. 남을 교화시키기 전에 자신을 다시 교화시키십시오.

 

8.

16세기 신대륙에 살던 인디언들은 정복자에 의해 수없이 살해당했습니다. 그 숫자는 천오백 만에서 이천 만에 달합니다. 약 수십 년의 세월 동안 인디언들은 총과 칼에 의해서 고통스럽게 서서히 죽어가야 했습니다. 이에 비하면 히틀러 시대에 살해당한 유대인들의 수는 육백만 명이었습니다.

 

사람 죽이는 짓거리에 식상한 나치들은 이른바 “츠이크론 B”라는 화학 약품을 만들어 유대인들을 가스실에서 대대적으로 몰살시켰습니다. 유대인들의 유해는 가루가 되어, 공중에 잿더미 연기로 퍼져나갔습니다. 몇몇 시인들이 묘사한 바 있듯이, 어쩌면 유대인들의 무덤은 공중의 구름 속에 자리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현대 사회에서도 인종, 종교 그리고 정치 등의 차이로 인하여 살인이 자행되고 있습니다. 어째서 가해자는 피해자의 고통의 절반도 감지하지 못하는 것일까요? 어떠한 이유에서 피해자가 당한 치욕은 그토록 고통스러우며 망각되지 않는 반면에, 가해자들은 자신의 죄에 대해서 그렇게 둔감할까요?

 

9.

반복해서 말하건대 역사는 다음의 사항을 분명히 말해줍니다. 정치와 경제의 문제는 종교와 문화의 문제와 밀접한 관계를 지닌다고 말입니다. 때로는 종교와 문화는 주어진 정치와 경제에 봉사하기도 합니다. 이 경우 모든 정치적 경제적 이데올로기는 종교적 문화적 이데올로기에 의해 정당화되고, 일견 합법성을 드러내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상부구조와 토대 사이의 함수관계입니다. 가령 지나간 역사에서 드러난 신권 정치를 생각해 보세요.

 

그렇지만 우리는 다음과 같이 주장해야 할 것입니다. 즉 진정한 사상은 주위에서 직접적으로 그리고 간접적으로 관여하는 정치와 경제라는 이데올로기의 끈을 잘라버릴 때 독립성과 혁명성을 지닌다고 말입니다. 자고로 참된 사상이란 기득권에 봉사하는 순간, 더 이상 참다움과 신선함을 견지할 수 없게 됩니다. 이는 지식인이 권력의 핵심부에서 일할 경우 지식인의 비판의식을 상실하는 경우에서 종종 관찰되는 현상입니다.

 

자신의 눈앞의 이익을 위해서 권력, 인습 그리고 여러 유형의 권위에 결탁하는 학자, 종교인 그리고 예술가들을 생각해 보세요. 그들은 편안하게 살아갈 수 있지만, 결국 있으나 마나한 존재들입니다. 그들은 앞에서 언급한 안두희, 유다, 김경천 등과 같은 밀고자들보다도 더욱 치사하고 교활한 자들입니다.

 

10.

굶지 않으려고 살해당하지 않으려고 발버둥치는 자들은 굶거나 목숨을 잃습니다. 이에 비하면 죽음을 개의치 않고 의연하게 사는 자는 오히려 목숨을 잃지 않는 경우가 자주 역사에서 나타납니다. 바르톨로메 드 라스카사스가 이에 관한 좋은 범례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라스카사스는 목숨 걸고 아메리카 인디언들의 권익을 위해서 투쟁해 나갔습니다. 그는 에스파냐 사람으로서 에스파냐 인들이 타국에서 저지른 만행을 속속들이 고발하였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그를 모함하였고, 심지어 살해하려고 시도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주위에서는 적들만 도사리고 있지는 않았습니다. 수많은 이름 없는 인민들은 바로 정의로운 인간을 도와주고 있었던 것입니다.

 

명성 때문일까요, 우연에 의해서일까요? 만약 명성 때문에 라스카사스가 피해입지 않았다면, 우리도 올바르게 명성을 쌓아야 합니다. 그런데 어떻게 공명정대하게 명성을 쌓을 수 있는가요? 역설적으로 들릴지 모르지만, 죽음을 무릅쓰고 양심적으로 살아갈 때, 이는 가능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