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나의 글

라스카사스, 인종 그리고 국적 (1)

필자 (匹子) 2022. 1. 28. 10:07

“라스카사스는 스페인 출신의 신부인데, 16세기 신대륙에서 자행되던 1500만의 인디언 학살극 소식을 서양에 전했다.”

“2003년 11월 스리랑카 출신의 노동자 한 사람이 불법 체류 단속에 피해 다니다, 달리는 전동차에 뛰어들어 투신자살하였다.”

 

1.

바르톨로메 드 라스카사스는 16세기 초에 서인도제도에서 자행된 학살극에 관해 생생하게 보고하였습니다. 이러한 보고는 단순히 과거의 일회적인 역사의 사건으로 치부되어서는 곤란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인종 사이의 치욕적인 학대 내지 수탈에 관한 상징적 범례를 말해주기 때문입니다. 스페인 사람들이 저지른 만행은 신대륙 발견 당시에 발생한 과거의 범행으로 단정될 수 없습니다. 그것은 유럽의 역사 내지 동양의 역사에서 그칠 줄 모를 정도로 연이어 발생한 끔찍한 인종 학살극에 대한 본보기나 다름이 없습니다.

 

문제는 대부분의 인간이 16세기에 발생한 끔찍한 사건을 외면하였으며, 설령 이를 접했다 하더라도, 여기서 아무 것도 배우지 못했다는 사실입니다. 인류가 16세기 이후에도 같은 유형의 생명체를 수없이 살해한 경우들은 이를 반증하고 있습니다.

 

2.

역사적 사실은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전해줄까요? 지금까지 수많은 역사학자들은 역사적 사실들을 수없이 정의했습니다. 나는 여기서 그것들을 일일이 거론하는 대신에, 그것을 두 개의 특성으로 구분하려 합니다. 그 하나는 과거에 발생한 수많은 일회적 사실에 해당하는 것들입니다. 이러한 사실들은 일견 아무런 관련성을 지니고 있지 않은 죽은 지식입니다. 다른 하나는 어느 특정한 역사적 사실에 해당하는 것들입니다.

 

이것들은 현재의 현실과 관계를 맺고 있다는 점에서 살아있는 지식으로 명명될 수 있습니다. 이 가운데 중요한 것은 후자, 즉 현재성과 결부되어 있는, 생동하는 사실들입니다. 후자와 관련하여 나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싶습니다. 라스카사스가 체험하고 기술한 내용들은 약소 인종 탄압에 관한 일회적 사건으로 치부될 수 없습니다. 그것은 오히려 뒤이어 나타나는 인종 학살극 내지 살육 행위에 대한 상징적 전례와 같습니다.

 

혹자는 역사적 사실과 관련하여 다음과 같이 비판하곤 합니다. 만약 과거의 역사적 사실이 현재의 현실과 주제 상으로 상호 접목될 수 있다면, 역사에서 특정한 사실만을 선별하는 방법은 그 자체 작위적이며, 학문의 신비주의를 유발하지 않는가? 하고 말입니다. 물론 역사적 사실이 이현령비현령으로 적용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사장되어 있는 무수한 역사적 사실의 함의를 현재와의 관련성 속에서 찾아내어야 할 것입니다.

 

3.

우리가 무엇보다도 주목해야 할 것은 재화 그리고 정의입니다. 정치와 역사의 발전 과정은 재화 그리고 정의 사이의 대립으로 요약될 수 있습니다. 이는 이로움을 추구하는 행위 그리고 의로움을 추구하는 행위 사이의 갈등을 가리킵니다. 우파는 대체로 경제적 실리를 추구합니다. 이에 비하면 좌파는 대체로 도의적 명분을 추구합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다음과 같습니다. 즉 하나를 중시하는 자는 반드시 다른 하나를 잃는다는 사실입니다. “새는 리영희 선생의 말대로 좌우의 날개로 나는데, 무엇이 새의 좌우 날개들로 하여금 싸우게 만드는가?” 과연 무엇이 우리로 하여금 재화와 정의를 함께 지닐 수 없게 만드는가? 이는 시대의 어떠한 모순과 결착되어 있는가? 하는 물음을 생각해 보십시오.

 

투쟁할 때 우리는 오로지 적만을 생각하지는 말아야 합니다. 가끔 뒤를 돌아보아야 하며, 쉬는 시간을 할애하여 좌우를 살펴야 합니다. 우리에게 칼을 겨누는 자는 우리의 앞에 서성거리지는 않습니다. 칼을 겨누는 그림자는 등 뒤에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안두희, 유다, 김경천 등과 같은 밀고자들이 어디에 숨어있는지 면밀하게 바라보아야 합니다. 주위에는 나와 너를 서로 피 흘리게 싸우게 해놓고 간교하게 미소를 짓는 자가 숨어 있습니다. 우리는 투쟁의 과정 속에서도 이들을 반드시 예리하게 포착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