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네스 보브롭스키 (1917 - 1965). 그는 속죄와 자기 반성으로서의 기억을 문학적으로 형상화한 겸허하고 경건한 독일 시인이었다.
요한네스 보브롭스키는 1917년 지금의 폴란드 지역인 라스텐부르크에서 태어났습니다. 부모님은 침례교를 신봉하는, 약간 보수적인 분들이었습니다. 아버지는 프로이센의 관리였는데, 1928년에 쾨니히스베르크로 이주하였습니다. 보브롭스키는 그곳에서 김나지움에 다녔습니다. 보브롭스키는 여름이면 근처에 있는 메멜 강으로 휴가를 떠났는데, 그곳의 체험이 자신의 작품에 빼곡하게 반영됩니다. 리타우 지역에는 여러 곳에서 이주해온 다양한 인종들이 머물고 있었습니다.
예술사는 주로 회화, 조각 등에 관한 예술의 역사를 다루는 학문이다. 이 영역은 반드시 예술만의 역사를 다르지는 않는다. 예술과 예술의 변천과정을 이해하려면 정신사는 물론이요, 역사적 흐름을 이해하지 않으면 안 된다.
1937년 아비투어를 마친 다음에 2년 동안 쾨니히스베르크에서 군에 입대해야 했습니다. 그 사이에 부모님과 여동생들은 베를린으로 이주하였습니다. 1939년에 보브롭스키는 베를린의 대학교에서 예술사를 공부했습니다. 그런데 제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여 하사관으로 참전하였습니다. 맨 처음에 폴란드 침공에 참전하였고, 1941년에는 북부 프랑스의 독일 주둔군에 합류하게 됩니다. 보브롭스키 하사는 다시 소련 지역의 전투에 배속되었습니다. 그의 군복무는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1941년 무렵에 6개월 동안 베를린에서 공부할 수 있었던 것은 보브롭스키가 나치당에 가입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보브롭스키는 1944년에 처음으로 잡지에 시편을 발표하게 됩니다. 전쟁에 끝날 무렵 그는 소련군 포로가 되어 1949년까지 수용소에 갇힌 채 생활했습니다. 돈 강 근처의 수용소에서 그는 석탄 채굴 작업에 투입되었습니다. 이때 그가 느낀 것은 독일이 다른 민족에게 저지른 죄악이었습니다. 보브롭스키는 이에 대한 진정한 참회를 자신의 문학적 관건으로 받아들이게 됩니다.
자유의 몸이 된 그는 죽을 때까지 베를린의 프리드리히스하겐에서 거주하며, 출판사에서 일했습니다. 그의 시편들은 1955년 『의미와 형식』에 처음으로 간행되었습니다. 첫 시집 『사르마티아의 시간 Sarmatische Zeit』은 구동독에서 간행되지 못하고, 1961년에 서독의 슈투트가르트에 있는 독일 출판제작에서 간행되었습니다. 뒤이어 시집은 동독에서 간행되었습니다.
동유럽에서 살아가던 어느 유대인 여성
보브롭스키의 유년: “그때 나는/ 꾀꼬리를 사랑했지 - / 종소리는, 저 위에/ 잎사귀 공간 사이로/ 오르락내리락 하고, // 갈대 위로 붉은 딸기/ 이어진 숲가, 거기 쪼그려/ 앉아 있으면, 잿빛 유대인/ 남자가 작은 마차 몰고/ 우리 곁을 지나쳤지. // 오후 때면 오리나무의/ 검은 그림자 속에서 가축 떼/ 서성거리고, 화난 꼬리로/ 파리들을 쫒았지. // 그후 열린 하늘에서/ 폭넓게 장대비가 마구/ 쏟았고, 온 누리 퍼진 어둠,/ 물방울들은 흙 맛을/ 띄고 있었지. // 혹은 사내들은 말을/ 데리고 강둑길로 나와,/ 찬란한 고동색 말을 타고/ 웃음을 터뜨리며/ 깊은 곳을 뛰어 넘었지. // 울타리 뒤에서/ 벌 떼의 소란이 하늘을 덮고/ 갈대 호숫가 가시덤불 사이로/ 나중에 두려움의 은 딸랑이가/ 지나쳤지./ 성장한 산울타리 사라지고/ 암울함, 창문 그리고 문. // 그때 그 노파는 냄새나는/ 그미의 방에서 노래했지. / 램프는/ 윙윙 소리 내고. 남자들이 안으로/ 들어서며, 어깨 너머로/ 개들을 부르고 있었지. // 탈선된, 쓰라린 시간의/ 밤은 침묵 속에 오래 뻗어나/ 詩句에서 詩句로 머문/ 유년 시절 -/ 그때 나는 꾀꼬리를 사랑했지.”
이 사진은 베를린에 위치한 클라우스 바겐바흐 출판사의 전경이다.
이후로 보브롭스키의 시 그리고 산문은 독일 클라우스 바겐바흐 출판사에서 지속적으로 간행되었습니다. 두 번째 시집 『그림자 나라, 강들Schattenland Ströme』은 1962년에 발간되었습니다. 보브롭스키는 동독 시인도 아니고, 서독 시인도 아닌, 독일 시인이라고 자기 자신을 소개하였습니다. “내 견해에 의하면 나는 독일 작가입니다. 마치 내 동료들이 서독, 서 베를린 그리고 프랑스에 거주하는 독일작가이듯이 말입니다.” 작가는 국가의 일원이지만, 국가에 예속되는 존재는 아닙니다. 그들에게는 "작은 친구의 사회"가 국가보다 더 중요합니다. 필라델피아 Philadelphia - 그것은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하면 가장 바람직한 작은 사회라고 합니다.
유명세의 대가는 끔찍하다. 유명한 사람의 일거수일투족은 세인의 관심을 불러일으킨다. 수많은 연예인이 스포트라이트를 받다가, 목숨을 끊기도 한다. 유명세 내지 인기는 당사자의 사생활을 방해하기 때문에, 그들이 사적 사랑의 삶을 행복하게 영위하지 못하는 경우도 허다하다. "와우 당신은 무척 유명하게 되어 영향력 넘치는 분들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그것도 파리에 있는 호화 레스토랑에서".
위의 글은 작가에게도 해당합니다. 명성을 누리는 것은 처음부터 사적인 삶이 방해당하는 것을 감내해야 하는 것인지 모릅니다. 1962년에 보브롭스키는 47 그룹의 문학상을 받았습니다. 그가 동서독에서 문학적 명성을 쌓아가는 3년 동안, 구동독의 슈타지는 그가 죽을 때까지 요주의 인물로 감시하였습니다. 그는 어쩔 수 없이 1963년에 동독 작가 동맹 Schriftstellerverband der DDR의 회원으로 등록하였습니다. 1965년 10월 2일 보브롭스키는 맹장 파열의 후유증으로 유명을 달리 했습니다.
보브롭스키의 작품들은 동유럽, 발트 해 연안의 자연을 배경으로 삼고 있습니다. 그의 작품 속에 동유럽의 신화 그리고 전설 속의 분위기가 배여 있는 것은 자신의 경험 때문입니다. 그는 메멜 강 근처에서 자랐기 때문에 그곳의 폴란드인, 유대인, 리투아니아인, 러시아인 그리고 독일인들 속에서 생활했습니다. 그렇기에 그의 작품 집필은 다른 인종 사람들에게 저지른 사람들의 폭력을 생생하게 재현하는 일과 같습니다.
사랑 때문에 방랑하는 이방인은 참으로 불쌍하도다. "Weh dem Fremdling, der aus Liebe wandert!" (횔덜린)
동료 시인과 예술가들의 가난하고 고독한 삶 그리고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그들의 예술작품 탁마 행위 등은 보브롭스키의 작품 속에 문학적으로 형상화되었습니다. 『그림자 나라, 강들 Schattenland Ströme』 속에는 토머스 체터턴 Th. Chatterton, 브렌타노, 횔덜린, 콜마르, 엘제 라스커-쉴러 넬리 작스 등에 관한 시작품이 실려 있습니다.
레빈의 방앗간의 한 장면.
60년대부터 보브롭스키는 산문을 쓰기 시작하였습니다. 그 가운데 우리는 두 편의 장편 소설을 망각할 수 없습니다. 그 하나는 『레빈의 방앗간, 나의 할아버지에 관한 34 문장들 Levins Mühle. 34 Sätze über meinen Großvater』(1964)이며, 다른 하나는 『리타누의 피아노들 Litauische Claviere』(1966)입니다. 두 편의 산문 작품은 시로 집필된 산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소설 속의 화자는 모든 이야기를 전지적으로 파악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의 서술 속에는 모든 것이 백일하에 밝혀지는 게 아니라, 역사적 사실 지나간 개개인의 체험 등은 그저 부분적인 기억의 편린으로 직조되어 있습니다. 소설적 관점이 수시로 바뀌고, 사건 속에 회상과 기억이 마치 몽타주처럼 첨가되는가 하면, 등장인물들의 내적 독백이 가미됩니다. 또한 저자 혹은 등장인물 혹은 화자의 내면의 사고가 글로 표현되곤 하지요, 말하자면 작가는 사실을 서술하는 게 아니라, 과거의 기억을 유추하면서 모르는 부분을 부분적으로 추측할 뿐이지요.
주인공, 나의 할아버지는 독일인인데, 동유럽에서 유대인 레빈의 방앗간을 법적으로 그리고 무력을 사용하여 빼앗습니다. 억울하게 재산을 빼앗긴 레빈은 친구들과 합세하여 자신의 억울함을 호소합니다. 그들은 서커스를 개최하면서, 사람들의 동의를 구하지만, 끝내 재판에서 패배합니다. 유대인 레빈은 어디론가 자취를 감춥니다. 자신의 선조의 사악한 짓거리를 고발하는 일은 마치 누워서 침을 뱉는 일처럼 당사자에게 고통을 가져다줍니다. 그런데도 보브롭스키는 자신의 선조들의 잔악한 불법 행위를 거짓 없이 고발했습니다.
베를린 프리드리히스하겐에 위치한 보브롭스키의 서재. 그는 1943년 결혼하였지만, 군인의 신분으로 세계 대전에서 빠져나올 수 없었다. 1947년에 비로소 보브롭스키는 아내에게 돌아갔다. 책장 앞에 위치한 그의 침대가 몹시 이채롭다.
특히 보브롭스키의 단편, 『뵐렌도르프 Boehlendorff』는 놀라운 작품입니다. 여기서는 횔덜린의 친구이자 무명 시인인 울리히 카시미르 뵐렌도르프의 짧은 삶이 서술되고 있습니다. 울리히 카시미르 뵐렌도르프 (1775 - 1825)는 문학사에서 망각된 시인이며, 오늘날 초상화 하나 남아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시인 횔덜린은 뵐렌도르프의 시적 재능을 높이 평가했습니다. 횔덜린은 1801년과 1802년에 친구에게 다음과 같이 편지를 썼습니다. "친구야, 우리는 같은 운명이야. 편지를 보내줘. 너의 순수한 목소리를 필요로 해. 친구 사이의 영혼, 대화든 편지든 생각을 나눈다는 건 예술가들에게는 꼭 필요해. Wir haben ein Schicksal. [...] Schreibe mir doch nur bald. Ich brauche Deine reinen Töne. Die Psyche unter Freunden, das Entstehen des Gedankens im Gespräch und Brief ist Künstlern nötig. "
보브롭스키의 고향 틸시트. 1920년대의 모습
가난한 무명 시인, 뵐렌도르프는 동유럽을 방랑하며 살았습니다. 주머니에 원고가 가득 차면, 이를 남들에게 건네주거나 불 태우기도 했습니다. “어떻게 하면 세계는 도덕적 존재로 창조될 수 있을까? Wie muß die Welt für ein moralisches Wesen beschaffen sein?” 이를 위해서 자신이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을 절감한 그는 권총 자살로 삶을 마감합니다. 시간이 나면 뵐렌도르프에 관한 논문을 한 편 쓰려고 합니다.
가난한 시인 - 그는 빗물이 새는 집에서 거주하며, 생계를 걱정한다. 그럼에도 시인들은 시를 쓴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나도 모르겠다. 한 가지 사실은 분명하다. 예술가로서 자청해서 가난하게 살아가기 - 이는 몹시 어려운 일이다.
참고 문헌:
강태호: 보브로프스키의 시에 나타난 나치 과거에 대한 자기 반성 - 동시대 유대계 독일 여성 시인에 대한 초상 시를 중심으로, in: 독어교육, 90권, 2024, 131 - 1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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