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칼뱅의 신앙 공동체로서의 국가: 요한 발렌틴 안드레애 (Johann Valentin Andreae, 1586 – 1654)는 1619년에 『기독교 도시국가』를 세상에 공개했습니다. 이 문헌은 마르틴 루터의 프로테스탄티즘의 이상을 반영한 사회 유토피아입니다. 이 작품의 제목은 “기독교도의 도시 국가에 관한 서술 작업 개요Rei publicae Christianopolis descriptio”입니다. 안드레애는 누구보다도 칼뱅이 생각한 프로테스탄티즘의 신앙 공동체로서의 도시국가를 설계하였습니다. 안드레애의 유토피아는 특히 실험 과학과 응용과학을 중요하게 생각한다는 점에서 8년 후에 간행된 베이컨의 『새로운 아틀란티스』의 기술 유토피아와 유사성을 지닙니다. 그렇지만 모든 학문과 기술은 오로지 신앙의 토대 하에 축조되어야 한다는 게 안드레애의 지론이었습니다. 이 점에 있어서 안드레애의 유토피아는 기술이 아니라, 정치 유토피아의 속성을 더욱 강하게 드러내고 있습니다.
2. 캄파넬라의 작품과의 관련성: 안드레애는 모어의 『유토피아』를 익히 알고 있었으며, 나중에 1555년에 스위스 바젤에서 간행된 슈티블린의 『행복 공화국』을 독파한 적이 있습니다. 아마도 캄파넬라의 문헌 역시 잘 알고 있었을 것으로 추론됩니다. 당시 사람들은 캄파넬라를 반-아리스토텔레스의 입장을 제기하는 영웅적 투사로 간주하였고, 그의 문헌들을 높이 평가했기 때문입니다. 안드레애는 출판업자 토비아스 아다미에 의해 이탈리아 판 『태양의 나라』를 입수하였으며, 친구의 권유로 인하여 캄파넬라의 『태양의 나라』의 라틴어 원고를 접한 것 같습니다. 그렇지만 『기독교 도시국가』가 모어와 캄파넬라의 직접적인 영향을 받은 흔적은 드러나지 않으며, 그들의 작품과는 다른, 독자적인 특성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Swoboda: 37). 이를테면 작품은 베이컨의 『새로운 아틀란티스』처럼 1인칭 화자에 의해서 서술되고 있습니다. 이를 고려한다면, 우리는 다음의 사실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즉 안드레애는 구조상으로 그리고 주제 상으로 모어와 캄파넬라의 작품을 모방하려 하지 않았다는 사실 말입니다.
3. 안드레애의 이력 (1): 독일의 신학자, 작가, 수학자, 요한 발렌틴 안드레애는 1586년 8월 17일에 독일의 헤렌부르크에서 태어났습니다. 할아버지, 야콥 안드레애는 튀빙겐 대학교 신학 교수로서, “뷔르템베르크의 루터”라고 불리었습니다. 요한 안드레애의 아버지는 루터 교회의 목사였다가, 나중에는 쾨니히스브론의 신학 수련원의 원장으로 일합니다. 그는 직장과 가정을 소홀히 할 정도로 연금술에 심혈을 기울였습니다. 1601년 안드레애의 아버지가 사망했을 때, 어머니, 마리아 모저는 식솔들을 데리고 튀빙겐으로 돌아갑니다. 그미는 의학과 약초에 능통하여, 여성 신분으로 왕립 약사로 봉직하기도 하였습니다. 처음에 안드레애는 뷔르템베르크 지방의 기독교 경건주의에 침잠해서 살았는데, 기독교의 비밀스러운 교단인 “장미 십자단Rosenkreuzer”에 지대한 관심을 기울였습니다. 그는 연금술과 관련된 서적을 읽고, 직접 연금술에 관한 책을 저술하기도 하였습니다. 16세의 나이에 튀빙겐 대학에 입학한 그는 유약한 신체적 조건에도 불구하고, 문학, 수학, 역사, 철학 등을 열심히 공부하였습니다. 그가 읽은 책은 3000권이 넘고, 6개 국어를 익히기도 하였습니다.
4. 안드레애의 이력 (2): 안드레애는 몸이 연약하였으나, 두뇌가 비상하여, 어린 시절부터 자신의 명민함을 드러내었습니다. 18세의 나이에 그는 친구들을 직접 가르칠 정도였다고 합니다. 친구를 가르치기 위해서는 엄청난 양의 독서를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법학, 의학은 물론이고 여섯 개의 외국어를 통달한 것도 이 무렵이었습니다. 1601년 튀빙겐 대학에 입학했을 때 안드레애는 천문학, 수학, 동력학, 음악 그리고 미술의 영역에도 놀라운 식견을 드러내었다고 합니다. 그는 대학에서 특히 루터의 신학과 자연과학 연구에 몰두했습니다. 대학에서 공부한 지 불과 2년 만에 바칼로레아 학위를 취득한 것은 자신의 노력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놀라운 추문이 대학 내에 퍼지기 시작합니다. 1605년에 안드레애는 21세의 나이에 주위에 살던 처녀와 사랑에 빠져, 결국 살을 섞었던 것입니다. 이로 인해 신학교에서 추문이 퍼지게 되어, 결국 그는 학교를 떠나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
5. 안드레애의 이력 (3): 유럽 여행 후에 그는 대부분의 독일 지식인들처럼 가정교사로서 생계를 이어갔습니다. 안드레애는 베이컨과는 달리 수학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한 진취적인 학자였습니다. 16세기 초에 그는 케플러와 함께 수학자이자 천문학자인 메스틀린에게서 수학을 배웠습니다. 안드레애는 여러 명의 학자들과 교우했는데, 그들 가운데에는 크리스토프 베솔트라는 학자도 있습니다. 크리스토프는 법학을 전공한 사람이었지만, 제반 학문에 통달해 있었습니다. 특히 히브리어, 아라비아어도 능통했으며, 르네상스의 휴머니즘 그리고 독일 신비주의 사상에 관해서 해박한 지식을 습득해 있었습니다. 따라서 크리스토프가 파라켈수스, 라몬 룰, 쿠자누스 그리고 파코렐라 등에 열광했으며, 친구인 안드레애에게 영향을 끼친 것은 당연한 귀결이었습니다. 안드레애는 크리스토프의 도서관을 활용했는데, 이는 나중의 저술 작업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치게 됩니다.
6. 안드레애의 이력 (4): 안드레애는 1611년부터 1612년 사이에 프랑스, 독일, 북부 에스파냐, 이탈리아 스위스 등지를 여행하였습니다. 당시 로마 가톨릭 교회의 내적인 상황은 참으로 참담했습니다. 가톨릭교회는 그에게 더 이상 희망이 없는 수구적인 종파로 비쳤습니다. 여기서 언급되어야 하는 것은 안드레애가 1611년 제네바에서 개혁적 신학자, 칼뱅을 만났다는 사실입니다. 이로써 그는 구태의연한 교회 체제 그리고 독일 전역에 만연해 있던 수구 보수주의를 표방하는 가톨릭 수사들로부터 등을 돌렸습니다. 대신에 안드레애는 엄격한 자세로 성서를 해석하는 일을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안드레애는 1612년 튀빙겐으로 돌아온 뒤에 바이힝겐의 목사가 되었습니다. 그후 그는 아그네스 엘리자베트 그륀닝거라는 여성과 결혼하여 아홉 명의 자식을 거느리게 됩니다. 안드레애는 일신의 안일을 위해서 살아간 학자는 아니었습니다. 그는 30년 전쟁 당시에 목숨을 각오한 설교자로서 기꺼이 전쟁터를 전전하였습니다.
7. 안드레애와 장미십자단원: 안드레애는 장미십자단원으로 알려진 인물입니다. 그런데 그가 장미십자단원의 창설자라는 가설은 사실로 확인된 바 없습니다. 실제로 그는 젊은 시절에 연금술의 전통을 계승한 장미십자단원의 창립에 일조한 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가령 장미십자단원들이 요한 발렌틴 안드레애 가문의 문장 (紋章)을 사용하였다는 사실은 이를 뒷받침하고 있습니다. 장미십자단원들은 14세기에 유럽 대륙에서 활동했다고 하는 크리스티안 로젠크로이츠라는 신비로운 인물을 숭상하였습니다. 이들 모임은 연금술, 점성술, 유대교의 카발라 신비주의 프로테스탄트의 개혁 사상 등을 결합시킨 비밀 결사조직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고대와 중세의 비주류의 학문을 도입하여, 학문, 기독교 그리고 윤리를 함께 통합시키자는 이념을 추구하는 단체로 출범하였습니다. 17세기 초에 이들은 겉으로는 프로테스탄트 정신을 따르는 교단이라고 표방했으나, 내적으로는 프리메이슨이라든가 고딕 건물의 건축에 종사하는 석공들의 비밀스러운 조합과 은밀하게 조우하였습니다. 왜냐하면 봉건 제후들은 동지애를 바탕으로 하는 사해동포주의의 집단 자체를 체제 파괴적이라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26 유토피아' 카테고리의 다른 글
서로박: 안드레애의 기독교 도시국가 (3) (0) | 2018.03.30 |
---|---|
서로박: 안드레애의 기독교 도시국가 (2) (0) | 2018.03.29 |
서로박: 아나키즘의 유토피아 사상 (5) (0) | 2018.01.29 |
서로박: 아나키즘의 유토피아 사상 (4) (0) | 2018.01.29 |
서로박: 아나키즘의 유토피아 사상 (3) (0) | 2018.01.2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