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조르주 아감벤: 이탈리아 출신의 철학자, 조르주 아감벤은 최근에 중요한 서적을 차례로 간행했습니다. 특히 정치 철학서적 『호모 사케르. 주권 권력과 벌거벗은 생명』(1995)는 여러 가지 측면에서 우리의 관심을 끌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 책은 지금까지의 유럽의 정치 사상사에서 끊임없이 쟁점으로 작용하였던 법의 의미와 기능에 관한 놀라운 사항을 전해주기 때문입니다. 미리 말씀드리건대 아감벤은 법 자체가 처음부터 정의와 폭력의 혼합체로 구성되었다는 데에서 출발합니다. 그의 논조는 학문적 이론 및 인간이 추구해야 하는 법적 이상으로 향하지 않고, 대부분의 경우 주어진 역사에 반영된 법철학적 논의 사항에 근거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아감벤의 역사철학 그리고 법철학의 입장이 누구보다도 발터 벤야민의 부정적 염세주의적 사고에 바탕을 두고 있음을 간파할 수 있습니다. 벤야민이 1940년대 초의 유럽의 급변하는 현실적 정황을 바탕으로 자신의 역사철학 테제를 개진한 바 있는데, 아감벤 역시 주어진 작금의 현실에다 자신의 학문적 입장을 추-체험적으로 대입 내지는 적용하고 있다는 인상을 강하게 풍깁니다. 벤야민의 논지는 1940년대 유럽의 현실과의 관계 속에서 이해될 수 있을 뿐, 동서고금의 모든 현실에 아무런 조건 없이 적용될 수는 없습니다.
2. 발터 벤야민과의 논리적 유사성: 전집에 실린 벤야민의 논의는 대체로 낯선 이방인의 면모를 진하게 드러냅니다. 벤야민은 주어진 제반 세계관에 대해 모든 관심을 기울이지만, 한 가지 분명한 정치적 철학적 입장을 선택하지 않았습니다. (Mayer: 34). 마찬가지로 우리는 아감벤이 자신의 문헌에서 어떤 탁월한 식견을 제시하지만, 아무런 구체적 대안을 제시하지 않는, 소극적이고 정태적인 (수수방관적인?) 태도만을 읽을 수 있습니다. 주어진 현실적 정황을 염두에 두면서 여기에 필요한 철학적 논의를 역사적 자료에서 도출해내는 방식은 아감벤의 경우에도 동일합니다. 이와 관련하여 우리는 다음과 같은 세 가지 관점에서 아감벤의 입장을 비판하려고 합니다. 첫 번째 사항은 역사적으로 출현한 철학 사상에 관한 모든 서술이 오늘날의 시각에 의해 결과론적으로 논의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 사항은 법이 존재해야 하는 정당성 여부, 다시 말해 법적 정의 내지 법과 폭력 사이의 상관관계에 관한 법철학적 물음과 관련됩니다. 세 번째 사항은 아감벤이 만인에게 자유와 평화를 보장해줄 수 있는 가능성에 관심을 기울이기보다는, 현재 상황을 진단하고 해명하기 위해서 과거의 법학 이론을 마구잡이로 끌어들인다는 사실입니다.
3. 호모 사케르의 이중성: “호모 사케르 homo sacer”라는 인물은 로마법에 기술된 수인 (囚人)을 지칭합니다. 아감벤은 호모 사케르가 이중적 의미를 지니고 있다는 데에서 출발합니다. 호모 사케르는 로마법에 의해서 처벌당하는 죄수이지만, 자구적으로는 “성스러운 인간”으로 번역됩니다. 호모 사케르는 동시대인에 의해 얼마든지 처형당할 수 있는 죄지은 인간이지만, 그렇다고 함부로 신의 제물이 될 수 없는, 성스러운 존재라는 것입니다. 호모 사케르라는 단어 속에는 부분적으로 성스러우며, 법으로부터 그리고 국가의 영토로부터 추방당한, 자유로운 인간상이라는 의미가 혼재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단어가 부여하는 묘한 아이러니를 고찰하지 않으면, 이를 제대로 이해할 수 없습니다. 말하자면 아감벤은 마치 날짐승처럼 국가와 국경의 구분으로부터 벗어난 국외자로서의 인간 유형 그리고 법 그리고 문화권으로부터 벗어난 공간의 개념을 예리하게 도출해냅니다. 지금까지의 역사는 지금까지 수많은 인간들을 감옥에 투옥시켰을 뿐 아니라, 영토 밖으로 쫓아내고 법적 영역에서 배제해 왔습니다. 이로써 권력자는 자신의 이권과는 위배되거나 아무런 상관이 없는 인간군을 벌거벗은 타자 내지 다른 생명체로 규정하고, 자신이 다스리는 영역으로부터 추방시켜 왔던 것입니다. 이는 서구의 자기 경험의 역사에서 끝없이 반복되어 출현한 사건이라는 것입니다.
4. 생명의 이중적 개념: 아감벤은 법적 차원에서 “생명의 정치적 존재βιος πολιτικός” 그리고 “벌거벗은 생명nuda vita” 사이의 의미론적 차이를 해명함으로써 논의를 개진하기 시작합니다. 자고로 인간은 사회의 구성원으로 편입될 경우에 한해서 사회로부터 법적 제재를 당하거나, 법의 보호를 받습니다. 만약 주어진 사회 속에서 거주하더라도 법적 질서에 편입되지 않는 국외자의 경우 “예외적 타자”로 간주됩니다. 아감벤이 말하는 호모 사케르는 예외적 타자에 속합니다. 이를테면 아리스토텔레스는 『니코마코스 윤리학』에서 생명을 두 단어로 구분하고 있습니다. 그 하나는 “조에ζωή”이며 다른 하나는 “비오βιο”입니다. 전자가 모든 생명체, 구체적으로 말해 신, 인간 그리고 동물 등에 공통적으로 내재한 살아있음으로서의 생명의 의미를 지닌다면, 후자는 어떤 개인이나 집단의 특수한 삶의 형태 내지 방식과 관련되고 있습니다. (Agamben 2002: 11f.). 여기서 신과 관련되는 모든 사항에는 처음부터 하나의 면죄부 내지는 면책특권이 첨부되어 있습니다. 과연 어떠한 인간 부류가 법의 체계 속에 규정될 수 있는가? 하는 문제가 여기서 제기됩니다.
5. 벌거벗은 생명체로서의 개인의 주권: 문제는 벌거벗은 생명체로서의 개인의 주권입니다. “비오”에 속하는 일반 사람들은 얼마든지 자신의 고유한 권한을 권력자에게 빼앗길 수 있습니다. 이러한 물음에서 아감벤이 고려하는 것은 발터 벤야민, 카를 슈미트, 마르틴 하이데거, 한나 아렌트 그리고 미셸 푸코 등의 법철학 내지 정치사상의 이론들입니다. 한나 아렌트를 제외한다면, 이들의 입장은 정치적으로 벤야민과 푸코의 경우 어떤 숙명론적 사고, 슈미트와 하이데거의 경우 어떤 극우 보수주의의 시각에 근거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논의를 거쳐서 아감벤은 글로벌한 세계에서 특수한 환경 속에 내몰린 타자로서의 수인들의 면모를 해명하려고 합니다. 그의 문헌에서 중요하게 간주되는 것은 무엇보다도 개인의 주권을 안으로 포획하는 행위로서의 정치적 구금 그리고 개인의 주권을 바깥으로 배척하는 행위로서의 정치적 망명이라는 두 가지 사항입니다. 이로써 아감벤은 법의 영향권으로부터 벗어난 인간의 죄의 유무를 판별하는 문제에 관심을 집중시킵니다. 문제는 국가와 사회가 법으로부터 벗어난 공간을 영속적으로 강화시킴으로써 인간을 하나의 벌거벗은 생명체로 축소화시켰다는 게 아감벤의 핵심적 테마입니다. 문제는 오늘날 치외법권의 영역이 계속 확장된다는 데 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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