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법은 정의와 폭력을 결합시킨 것인가? (5): 네 번째로 아감벤은 자연법사상에 대항하는 홉스의 입장에 동의합니다. 자연법 사상가, 알투시우스Althus는 폭군에 대한 저항과 폭군의 처형을 정의로움이라고 규정하였습니다. 폭군을 권좌에서 내려앉힘으로써 만인의 자유와 평등이 실천될 수 있다고 확신하였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17세기, 18세기 철학자들이 모두 폭군의 처형에 동의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이를테면 칸트Kant는 왕을 살해하는 일을 결코 있어서는 안 될 폭거라고 규정하였습니다. 어쨌든 폭군의 처형을 통해서 법은 싫든 좋든 간에 자연법의 정신을 어느 정도 실천하게 됩니다. 이에 비하면 홉스는 인간 존재를 처음부터 늑대로 규정하였습니다. 법이 없다면, 인간은 이기적인 태도로 타인에게 해악을 가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인간의 사회적 삶에서 필요한 것은 하나의 법적 계약이라는 것입니다. 토마스 홉스에 의하면 “법을 창조하는 것은 권위일 뿐 진리가 아니다.Auctoritas, non veritas facit legem”라고 합니다. 아감벤은 홉스의 사상에서 언급되는, 권위로부터 태동하는 “법 ius” 그리고 마키아벨리에 의해 개진된 법적 적용으로서의 “통치의 술수”를 혼합하여 다음과 같은 결론에 도달합니다. 권력자는 만인에게 주어져야 마땅한 주권을 자신의 의도대로 활용하기 위해서 정의로움이라는 당근 뿐 아니라, 폭력이라는 채찍을 더욱더 강하게 적극적으로 활용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13. 법은 정의와 폭력을 결합시킨 것인가? (6): 아감벤은 법이 정의로움과 폭력으로 이루어져 있음을 증명하기 위해서 아리스토텔레스를 인용합니다. 가령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치학』에는 다음의 사항이 언급되고 있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정치가를 삶의 재생산과 종족 보존의 역할을 맡은 두 부류로 나누었습니다. 그 하나는 가계의 책임자로서의 “오이코노모스οἰκονόμος”이며, 다른 하나는 가족 구성원에 대한 책임자, 내지 노예에 대비되는 주인으로서의 “데스포테스δεσπότης”라는 것이었습니다. “오이코노모스”가 모든 조직의 운영 그리고 조직의 흥망성쇠를 책임지는 사람이라면, “데스포테스”는 조직의 운영에 있어서 오로지 자신만의 정치적 의도를 관철시키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여기서도 정치가는 정의로움과 폭력이라는 두 가지 속성을 지니고 있다고 아감벤은 지적합니다. 상기한 사항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법은 아감벤에 의하면 정의로움을 실행에 옮기는 수단이 아니라, 필요악으로서의 폭력을 실천하는 수단을 지닌다고 합니다. 아감벤은 어떻게 하면 만인이 자유와 평등을 누릴 수 있는가? 하는 사항을 고려하지 않고, 법이 어떻게 주어진 현실에서 적용되고 있는가? 하는 문제에 골몰하고 있을 뿐입니다. 그러한 한 그의 법 개념은 이른바 “범죄에 대한 처벌과 치료poena et remedium peccati”만을 염두에 두고 있는 토마스 아퀴나스의 상대적 자연법의 범주에서 조금도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아감벤은 개별적 법 규정 그리고 상부의 법적 질서가 과연 유효한 것인가? 하고 묻지 않고, 권위적 법의 적용 그리고 그 효력의 영역과 기간만을 지속적으로 추적하기 때문입니다.
14. 폭력, 추방, 보호구역 (Reservation): 아감벤은 주권이 정의로움 뿐 아니라, 폭력에 의해 행사되(었)기 때문에 나타난 결과를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가령 국가사회주의자들의 유대인 강제수용소가 바로 인간이 벌거벗은 생명체로 축소화되었다는 증거라고 합니다. 벌거벗은 생명체로 축소화된 인간은 수인들 사이의 수인을 가리킵니다. 이를테면 마치 수인들 사이에서도 “왕따” 당하는, 감옥에서도 그림자로 살아가는 망각된 인간을 생각해 보세요. 바꾸어 말하자면 벌거벗은 생명체는 고대 그리스에서 노예들 가운데 최하위의 노예였던 “전쟁 포로εἵλωτες”와 같은 자들입니다. 이들이 스파르타 전사들의 전쟁 연습 시에 끔찍하게 살해당해도, 어느 누구도 이들의 죽음에 대해 시시비비를 가리지 않았습니다. 전쟁 포로들은 고대 그리스에서는 한마디로 고통의 극단에서 살아가는 무법자들이었습니다. 이들에게는 언어가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언어 부재의 상황은 폭력과 고통의 극단에서 나오는 처절한 통치의 결과로 이해될 수밖에 없습니다. (Agamben 2001: 36). 30년 이상을 정신 착란으로 튀빙겐의 탑 속에 갇혀 살았던 횔덜린은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고통의 극단에는 시간과 공간이라는 조건밖에는 아무 것도 남지 않는다.” (Atmani: 68f). 뼈가 끊기도 살이 찢어지는 순간에 형벌 당하는 인간의 마음속에 남아 있는 의식은 오로지 지금 여기로부터의 탈출하려는 욕구, 가장 끔찍한 고통이 다만 순간적으로 지나치리라는 믿음밖에 없습니다. 권력자들은 고대의 시기부터 사회적 존재로서의 개개인을 감시하고 감독해 왔을 뿐 아니라, 인간이 마치 구속 받는 동물처럼 법적으로 종속되도록 법체계를 완성해 왔습니다. 이로 인한 결과는 그야말로 참혹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즉 세상의 대부분 사람들은 국법에 의해서 다스려지고, 자신이 도대체 자유인인가, 아니면 피지배자인가? 하는 갈등 속에서 헤어나지 못하게 된 것입니다.
15. 주어진 현실에서 파생되는 정책과 정의의 실현으로서의 당위적 이념은 어느 정도로 결합 가능한가? 물론 아감벤은 타우베스의 논거를 빌어서 권력자들의 이러한 무지막지한 정책을 벌거벗은 생명들에 대한 전체주의의 정책이라고 비판합니다. (Agamben 2002: 127f). 그렇지만 그의 논의에는 다음의 사고가 은밀하게 반영되어 있습니다. 즉 주어진 현실에서 파생되는 정책은 정의의 실현으로서의 당위적 이념과 언제나 뒤섞인 채 출현한다고 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감벤은 법이 정의와 폭력에 근거한다는 논리를 내세움으로써 법적 효력에서 벗어나는 지역에서 자행되는 불법에 대한 속수무책의 의혹만을 엿보이게 합니다. 아감벤은 발터 벤야민, 종교사회학자 야콥 타우베스와 마찬가지로 카를 슈미트의 “적이냐, 아군이냐?”하는 흑백논리 속에서 자신의 사고를 도출해내었습니다. 정치는 언제나 정의와 폭력으로 진행되며, 주권은 연제나 정의와 폭력의 아말감이라는 것입니다. (Schmitt 1993: 37). 이러한 논리를 정당화하기 위해서 아감벤은 야콥 타우베스의 논리를 끌어냅니다. 골수 유대인이자, 사도바울주의자인 야콥 타우베스는 역사의 묵시론적 종말이 어떤 새로운 정치적 실천에 의해 가능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인간의 구원은 반드시 세계 속에서 연계되어 이루어져야 한다고 확신했던 것입니다. 야콥 타우베스에 의하면 믿음은 지배와 정치와 연결되고, 정의로움이라는 당위성은 주어진 현실의 필연성을 통해서 정당화되어야 한다고 합니다. (Taubes: 75). 그렇지 않을 경우 인간은 결국 노회한 권력자에 의해서 자신의 권리를 빼앗기고 만다는 게 타우베스의 지론이었습니다. 그렇지만 문제는 대부분의 경우 주어진 현실의 필연성이 정의의 실천이라는 당위성보다 더 큰 영향력을 발휘한다는 데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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