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 철학 이론

마르크스, 뮌처, 혹은 악마의 궁둥이 (4)

필자 (匹子) 2017. 9. 17. 11:05

4.

당신은 언젠가 다음과 같이 나에게 질문한 적이 있습니다. 왜 하필이면 블로흐에 집착하는가? 마르크스주의 문예이론을 공부하면, 테오도르 아도르노 Th Adorno도 있고, 발터 벤야민 W. Benjamin도 있으며, 게오르크 루카치 G. Lukács도 있고, 뤼시앙 골드만 L. Goldmann도 있지 않는가? 하고 말입니다. 친애하는 B, 외람되거나 주관적인 견해일지 모르겠습니다만, 나는 블로흐의 사상을 이들의 학문에 비해 군계일학으로 비유하고 싶습니다. 특히 놀라운 것은 블로흐가 인간의 끝없는 가능성으로서의 과정을 중시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또한 블로흐는 시대의 변화와 미래의 가능성을 추적하는 데 자신의 시각을 집중시키고 있습니다. 게다가 그의 희망의 개념은 결코 동어반복의 허사가 아니라, 몹시 유연한 시각을 견지하고 있습니다. “희망은 확신이 아니다. 희망은 위험에 둘러싸여 있다. 그것은 위험에 대한 의식이다.”라는 발언을 생각해 보십시오. 

 

물론 사회를 진단하고 예술을 이론적으로 규정하는 데 있어서 당신이 언급한 학자들의 문헌들을 결코 무시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루카치를 제외하면- 미래를 위한 특정한 대안을 제시하는 데 너무 인색함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특히 아도르노의 제반 견해들은 비판과 판단에는 강한 어조를 드러내지만, 미래에 대한 전망과 유토피아의 가능성에 대해서는 시종일관 침묵을 지킬 뿐입니다. 아니, 미래를 위한 대안을 처음부터 부정하는 학자가 바로 아도르노입니다. 그는 언젠가 블로흐와의 인터뷰에서 유토피아의 허구성을 증명해주는 단서가 죽음이라고 단호한 자세로 말했습니다. 혹자는 예술작품에서 유토피아의 흔적만 아쉬운 마음으로 찾으려는 아도르노의 예술론 역시 존재 가치를 지닌다고 말합니다. 물론 나 역시 그 점을 부분적으로 인정합니다. 그렇지만 나는 그의 염세주의적이고 미래를 부정하는 차단된 시각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일 수는 없습니다.

 

5.

친애하는 B, 당신은 21세기에 새로 태어날 배달의 철학자입니다. 지금까지 나는 두 권의 블로흐 저서와 여덟 권의 블로흐 역서를 간행하였습니다. 다섯 권의『희망의 원리』(2004),『중세 르네상스 철학 강의』(2008),『저항과 반역의 기독교』(2009),『자연법과 인간의 존엄성』(2011) 그리고 나의 저서,『꿈과 저항을 위하여』(2011)가 그것들입니다. 이것들은 누구보다도 당신을 위한 것입니다. 부디 애정 어린 눈길로 이 책을 비판해주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