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 현대영문헌

서로박: 에코토피아 출현 (5)

필자 (匹子) 2020. 11. 5. 11:24

21. 중앙 정부와의 내전 가능성: 미국 정부는 에코토피아가 미합중국의 체제를 파괴한다고 믿고, 볼리나스의 독립을 심각한 우려로 수용하게 된다. 그리하여 정부는 볼리나스 지역에 연방 방위대를 파견한다. 연방 방위대는 지금까지 홍수 및 재난 지역의 구조대로 활동하는 사람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그렇기에 그 군대는 효율적인 전문 군사조직은 아니었다. 대원들은 돈을 더 벌기 위해서 자원한 지원군이었다. 두 국가의 군인들의 대치 상태가 이어지고 있었을 때, 볼리나스 민병대는 삐라를 살포하여, 사태를 분명하게 해명한다. “볼리나스는 생태 친화적으로 살아가려는 사람들의 모임이며, 결코 무력 투쟁을 원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연방방위대가 마린 카운티의 보안관의 명령을 받고, 국경을 넘어선다면, 폭력으로 대응하리라는 것을 분명히 선언한다. 이때 루를 포함한 여성들이 연방 방위대를 찾아가서 그들에게 땔감이나 음식을 제공한다. 말하자면 적국의 여성이 아군을 찾아와서 도움을 제공한 것이었다. 또한 베라 올웬은 TV에 출현하여 볼리나스와 생존자 정당의 목표와 정책 추진의 과정을 설명한다. 이러한 여러 가지 방법을 동원하여 무력 대치 상태는 종결된다. 새로 부임한 주지사는 볼리나스에 파견된 주둔군을 철수시켰던 것이다.

 

22. 마리화나와 동성연애: 모든 이야기는 18세의 처녀 루 스위프트가 어른이 되는 과정 속에서 서술되고 있다. 태양 전지가 발명되어 그미의 성년식을 빛내준 뒤에 나중에 생태 국가, 에코토피아에서 상용화된다는 것은 그 자체 의미심장하다. 왜냐하면 이는 새로운 국가의 탄생에 즈음하여 새로운 삶을 위한 도덕의 출발로 이해되기 때문이다. 나아가 『에코토피아의 출현』은 생태 국가 유토피아의 과정에 관한 사항 외에도 마리화나 그리고 동성연애 등의 문제를 부수적으로 다루고 있다. 작가는 대마초를 마약이 아니라, 하나의 약초의 개념으로 이해하고, 동성연애를 수많은 사랑의 방식 가운데 하나로서 관대하게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는 것을 지적한다.

 

많은 종류의 마약은 사회적 통제를 필요로 한다. 그러나 대마초는 엄밀하게 말하면, 담배보다도 중독성이 훨씬 약하고, 미국의 여러 주가 이를 합법화한 바 있다. 사실 다년생 식물인 대마초는 종이의 원자재인 펄프의 대용으로 활용될 수 있으며, 그 씨는 한약 재료로 사용되고 있다. 대마초의 씨, 마인 麻仁은 장의 소통과 혈액 순환을 돕는다고 한다. 그밖에 동성연애는 평범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사랑의 삶을 누리려는 개인의 생활 방식,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기실 사랑의 삶이 남들과 다르다고 해서 그게 세인의 지탄을 받을 수는 없는 일이다. 동성연애는 타인에게 해를 끼치는 행위가 아니라는 점에서 제 3자가 왈가왈부할 일은 아니다. 문제는 대마초와 동성연애에 대한 일반 사람들의 편견에 있다. 이러한 편견을 조장하는 것은 무엇보다도 소수의 특정적 문화를 억압하고 대중을 정치적으로 그리고 경제적으로 지배하려는 국가의 정치 이데올로기 내지 소비문화 이데올로기의 횡포가 아닐 수 없다.

 

23. 인간본위주의의 사고에 대한 비판: 칼렌바크는 처음부터 오래 전부터 내려온 인간본위주의의 사고를 거부하였다. 이를테면 「창세기」 제 1장 28절의 “생육하고 번성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는 말은 오랫동안 사양 사람들의 기독교, 유대교 그리고 이슬람 종교의 제반 삶의 토대가 되어왔는데, 이는 어니스트 칼렌바크에 의하면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고 한다. 사실 칼렌바크는 인간 본위주의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20세기 말부터 대두된 생태계 파괴의 문제를 제시하면서 새로운 자연관을 내세우고 있다. 이와 관련하여 칼렌바크가 두 작품에서 생태주의를 유독 강조하고, 인디언의 세계관에 크게 동조하는 것은 당연한 귀결이다.

 

칼렌바크의 이러한 입장은 유토피아의 역사에서 출현하는, 두 번째의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으로 이해될 수 있다. 유토피아의 역사에 나타난 첫 번째 코페르니쿠스의 전환은 주지하다시피 역사학자 라인하르트 코젤렉 Reinhart Koselleck이 지적한 바 있는 “장소 유토피아에서 시간 유토피아에로의 패러다임의 전환”을 가리킨다. 17세기에 이르러 사람들은 이상의 공간이 지상에서는 더 이상 발견될 수 없다는 것을 확인하였다. 바람직한 삶의 공간은 이래의 바로 이곳에서 출현할 수 있다는 사고는 계몽주의의 사상과 맞물려서 태동하였던 것이다. 이에 비하면 인간중심주의에서 생태중심주의의 패러다임의 변화는 유토피아의 역사에서 두 번째 코페르니쿠스의 전환과 같다. 왜냐하면 우리는 인간 생명의 중요성 외에도 모든 생명의 중요성을 인식해야 하기 때문이다.

 

24. 마지막 사족의 말씀, 생태주의: 그렇다면 칼렌바크의 작품은 우리에게 어떠한 전언을 전해주는가? 우리는 핵에너지를 예찬하는 사람들의 오류를 지적해야 하며, 합리적 방법으로 그들을 설득시킬 수 없을 경우 칼렌바크의 작품에 등장하는 암환자 특공대처럼 무력투쟁을 감행해야 할 것이다. 자연과학자, 앨빈 와인버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인류는 신묘한 천성을 내주고, 핵에너지를 얻으려고 했다고 말이다. 마치 파우스트가 청춘을 위해서 자신의 영혼을 악마에게 팔았던 것처럼, 사람들은 눈앞의 이득을 위해서 핵에너지를 얻으려고 혈안이 되어 있다. 파우스트는 영혼을 팔아넘김으로써 사랑하는 사람들을 죽음으로 몰아가야 했다. 이러한 행동은 눈앞의 이득 때문에 더 큰 것을 놓치는 소시민들의 소탐대실과 같다.

 

또 다른 예를 들자. 흔히 프로메테우스는 인간에게 불을 건네준 반신으로 추앙받고 있다. 인류는 불을 건네받음으로써 후세에 찬란한 자연과학을 발전시킬 수 있었다. 그러나 프로메테우스는 우리가 생각할 만큼 자비로운 자는 아니었다. 프로메테우스는 불을 건네주기 전에 인간이 이전에 지니고 있던 미래를 예견하는 능력을 빼앗아갔던 것이다. 만약 인간이 미래에 대한 예견력을 계속 견지한다면, 인간은 먼 훗날에 발생할 체르노빌 내지 후쿠시마의 사태를 내다볼 테고, 섣불리 불을 건네받지 않을 테니까 말이다. 이제 인간은 이제 한 치의 미래도 예견하지 못하게 되었다. 그러나 불을 다스리는 일 – 그것은 인간의 손에 달려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