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에서 계속됩니다.)
거울 단계가 완성되는 바로 이 순간은 유사한 상의 이마고와 동일하게 되려는 노력을 거쳐서 그리고 아이들이 겪는 근원적 질투의 드라마의 과정을 지나친 다음에 나타납니다. (이를테면 랴를로테 뷜러Charlotte Bühler 유아 심리 연구 팀은 유아들의 근원적 질투를 어떤 “심리적 전이 현상Transitivismus”으로 정확하게 표현한 바 있습니다.) 거울 단계가 완성되는 즉시 아이의 마음속에는 하나의 변증법이 실행됩니다. 이것은 다름 아니라 자아가 자기 자신을 사회적으로 만들어낸 상황과 접목시키는 작업을 가리킵니다.
* (1930년대 샤를로테 뷜러는 오스트리아의 빈에서 유아 심리 학교를 운영하였다. 이 학교는 오늘날 샤를로테 뷜러 연구소로 운영되고 있다. 샤를로테 뷜러의 이론에 의하면 환자는 타인도 자신과 동일한 질병을 겪으리라는 망상에 사로잡힌다고 한다. 이러한 망상은 환자는 내가 아니라, 타인이라고 단정에 이르기까지 지속된다. 이러한 방상이 바로 심리적 전이 현상이다.)
거울 단계가 완성되는 순간은 참으로 놀랍습니다. 이 순간이야 말로 모든 인간적 지식을 타자의 열망이라는 “중개 과정 médiatisation”을 통해서 엄청난 범위로 뒤집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이 순간에 아이는 자신의 대상을 타자와의 경쟁을 통해서 자신의 대상을 추상적으로 균형 잡게 됩니다. 이때 자아로부터 만들어지는 것은 어떤 심리적 기제입니다. 심리적 기제는 바로 이 순간 모든 본능적 열망을 하나의 위험이라고 아이에게 전합니다. 여기서 본능적 열망이 어른이 되기 위한 자연스러운 심리적 감정이라는 사실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어른으로 성숙한다는 사실은 인간의 경우 주어진 사회 내의 문화적 중개에 의존하기 때문입니다. 예컨대 성적 대상을 마음대로 차지할 수 없는 것은 한 인간에게 오이디푸스 콤플렉스가 작동되는 데에서 기인하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흔히 사람들은 유아기의 사랑과 관련하여 “일차적 나르시시즘”이라는 용어를 사용합니다. 물론 우리는 이러한 표현을 통해서 거울 단계에 처해 있는 아이의 고유한 성적 욕망을 담을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용어는 우리의 입장과 관련하여 어떤 개방의 의미를 전해줍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아이에게서 이러한 욕망을 발견한 사람에게 여러 가지 의미론적 잠재성을 담은 깊은 감정을 간파하게 해주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일차적 나르시시즘이라는 표현은 때로는 정반대의 의미를 드러낼 수 있습니다. 만일 유아의 리비도로부터 오로지 성적 리비도의 특징만을 규정하거나 확정하려 하면, 우리는 체제 파괴의 충동 내지 죽음 충동을 유효한 것으로 판단할 우를 범할 수 있습니다. 물론 아이들의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태도는 자아의 포기하는 기능으로 그리고 다른 사람들과의 모든 관계에서 자유롭게 생성되는 공격 성향으로 곡해될 수도 있습니다. 설령 이 관계가 (「루카의 복음서」 제 10장 24절 이하에 묘사된 바 있는) 위대한 사마리아인의 극진한 도움에 근거한다고 하더라도 그러합니다.
왜냐하면 “일차적 나르시시즘”이라는 표현 속에 도사린 다양한 잠재적 의미는 철학적 존재론에 있어서의 부정의 의미를 건드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우리는 존재 그리고 무에 관한 동시대의 철학을 예로 들 수 있으며, 심리학이 아닌, 철학의 영역에서 바로 이러한 존재론의 부정적 현실을 너무나 생생하게 천착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철학은 불행하게도 실존적 부정성을 다음과 같이 이해하고 있습니다. 즉 아이는 의식적으로 자기 스스로의 존재에 대해 한계를 느끼기 때문에 자기 자신의 존재 가능성을 거부할 수밖에 없다고 말입니다. 자신의 존재를 규정하는 제반 조건은 미리 정해져 있습니다. 이때 아이의 자아는 의식적으로 구성적 오류를 범하는데, 이것은 스스로 확신하는 해부학적 환상과 교묘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정신의 유희라고 말할 수 있는데, 지금까지의 정신 분석의 경험에 고유한 방식으로 가까이 다가온 무엇입니다. 정신의 유희는 이로써 하나의 존재론적 정신분석학을 보장해달라는 요구를 첨예화시키고 있습니다.
한 사회가 역사적으로 여러 정치적 시도를 행하다가 종국에는 몰락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 사회는 실용주의 이외에는 어떠한 다른 특성도 용인하지 않았습니다. 개인은 마치 강제 수용소와 같은 전체주의의 사회 체제로 인하여 심리적으로 엄청난 두려움을 느꼈습니다. 조직의 사람들이 사회적으로 인정받기 위해서는 고통스럽고 힘든 노력을 감내해야 했습니다. 실존주의는 바로 이러한 맥락 속에서 제대로 평가될 수 있습니다. 전체주의 사회 속에서 주체의 존재는 기껏해야 막다른 골목길에서 어떠한 출구도 찾지 못하고 그저 이리저리 서성거릴 뿐입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사람들은 실제 현실에서 단 한 번도 고유한 자유를 예찬하지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언제나 감옥의 담벼락에서 버티고 서성거려야 했으니까요,
정치적 현실 참여를 요구하는 실존주의자들의 발언 속에는 주어진 암울한 폐쇄 사회를 극복하려는 순수한 의식이 도사리고 있지만, 이는 궁극적으로 개인의 무기력함을 드러낼 뿐입니다. 우리는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습니다. 즉 실존주의자들은 비참한 상황 속에서 타인의 성을 가학적으로 관음하면서 그것을 그저 이상화시키고 있다고 말입니다. 비유적으로 말하자면 개개인은 거의 자살 직전의 참담한 삶을 벗어날 수 없는데도, 타자에 관한 의식만큼은 아이러니하게도 헤겔 식의 살인을 저지름으로써 비로소 만족을 느낀다고 할까요?
(계속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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