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에서 계속됩니다.)
우리는 한 인간이 태어나 어른으로 성장하는 변화의 과정을 시간의 변증법으로 체험하곤 합니다. 특히 개인의 교육과 교양 쌓는 일은 한마디로 개인의 역사로 설계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를 고려한다면 거울의 단계는 한 편의 드라마와 같습니다. 인간의 내적 열망은 자신의 충족되지 못한 욕구에서 유래하여 무언가를 선취해내는 데 혈안이 되어 있습니다. 주체는 처음부터 공간적 동일성이라는 덫에 차단되고 구속되어 있는데, 이로 인하여 여러 가지 다양한 판타지의 상은 생각해냅니다. 이러한 상들은 육체의 어떤 마구 찢겨진 상으로부터 그야말로 완전한 육체의 상의 형체로 출현하기도 합니다. 우리는 이를 상상의 해부학으로 명명할 수 잇을 정도입니다. 마지막에 이르면 우리는 어떤 포기하는 자기 동일성이라는 갑옷을 찾아내어, 자신의 형체로 이해하게 됩니다. 여기서 말하는 자기 동일성이라는 갑옷은 인간의 심리적 발전의 경직된 구조로 각인되어 있는 무엇입니다. 자아를 검증하기 위한 지칠 줄 모르는 실험은 마치 내부에서 직각으로 꺾이게 되는데, 이로써 내면세계로부터 주위 환경로 향해 빙빙 도는 운동은 차단되는 것입니다.
나는 앞에서 “찢겨진 육체”라는 표현을 사용했는데, 이것은 어떤 이론적 논의와의 연관 선상에서 찾아냉 것입니다. 찢겨진 육체의 상은 이를테면 사람들의 환영 내지는 꿈속에서 거의 규칙적으로 등장하는 것입니다. 개별 인간은 어떤 단계에서 스스로를 고립시키는 주위 정황으로 인하여 약간의 공격 성향을 드러내는데, 우리가 이러한 유동적 특성을 분석하는 작업을 통해서 이러한 찢겨진 육체에 관한 판타지의 상을 접하게 됩니다. 뒤이어 이러한 상은 “뜯겨져 나온 사지membres disjoints” 그리고 미세한 부분까지 관찰된 조직체 등의 형체 속에서 어떤 구상적 모습을 표출시키고 있습니다. 여기서 언급되는 육체의 부분 내지 조직체들은 내적 자극으로 인하여 외부로 향해서 스스로를 차단시키고 스스로를 무장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유형의 경직된 육체에 관한 그림은 15세기의 네덜란드의 화가, 히로니무스 보시 (Hieronymus Bosch, 1450 – 1516)의 환영을 통해서 나타난 바 있습니다. 스스로를 무장시키는 경직된 육체의 상은 궁극적으로 현대인의 심리를 그대로 드러내고 있는 첨단적인 상징의 상이라고 말할 수 있는데, 히로니무스 보시의 화폭에 담겨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형체는 생명 조직의 차원에서 어떤 다음과 같은 단절의 선상에서 구상적으로 포착되는 것입니다. 해부학적으로 표현하건대 바로 이러한 단절 속에서 균열의 증상이라든가 경련의 증상 속에서 노이로제의 어떤 놀라운 병적 징후가 발견될 수 있습니다.
상기한 사항에 대해 우리는 약간의 수정을 가해서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습니다. 자아의 형성은 꿈속에서 하나의 마치 참호 내지 어떤 영역에 의해 상징화되고 있다고 말입니다. 이러한 내면의 영역은 비유적으로 말하자면 어떤 꽁꽁 묶인 것과 같은 폐쇄적인 스포츠 경기장으로부터 쓰레기 더미라든가 늪지대와 같은 공간에 이르기까지 다양하지만, 그 영역은 두 개의 대립되는 전투 공간으로 분할되어 있습니다. 바로 그곳에서 주체는 멀리 위치하는 자랑스럽고도 멋진 성 (城)을 찾으려고 자신을 은폐시키고 있습니다. 여기서 성이라는 형체는 놀랍게도 동일한 시나리오 속에 함께 자리하고 있는 이드를 상징하고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여기 정신적인 영역에서 막강한 성채의 구조가 구상적으로 현실화되어 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막강하고 견고한 성은 그야말로 주체의 자발적인 증상 자체를 말해주는 놀라운 비유가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는 이를 강박 노이로제의 다양한 메커니즘이라고 규정할 수 있는데, 이것들은 때로는 가치 전도되어 있고, 고립된 이중적으로 엮여 있으며, 때로는 대수롭지 않게 치부하며, 도피하고 외면하는 특징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체의 이러한 병적 성향을 신뢰할 수 있는 사람들은 오로지 우리밖에 없습니다. 만약 우리가 이러한 성향들을 마치 우리에게 어떤 언어적 기술 방식과 유사한 것으로 단순하게 치부하면서, 이러한 경험의 조건으로부터 일탈시켜버린다면, 우리가 시도하는 여러 가지 이론적 논의는 세인으로부터 다음과 같이 신랄하게 비난당하게 될 것입니다. 즉 우리의 이론이 어떤 절대적 주체의 도저히 생각할 수 없는 무엇을 파고들고 있다는 비난 말입니다. 바로 이러한 까닭에 우리는 현실에 객관적으로 주어진 것의 어떤 상호 작용에 근거한 가설을 통해서 어떤 상징적 축소의 방법론이라는 주요 테마를 찾으려고 했습니다.
여기서 상징적 축소의 방법론은 자아의 방어 메커니즘을 파고들어서, 하나의 유전적인 질서를 밝혀내려는 것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방법론은 안나 프로이트가 위대한 작품의 제 1장에서 표현한 갈망과 일치하는 것입니다. 나아가 그것은 (지금까지 자주 거론했던 편견과는 반대로) 히스테리의 억압이 반복해서 나타나는 경우를 어떤 고대적 단계에 편입시키려는 하나의 이론적 시도입니다. 히스테리의 억압은 강박 노이로제가 전도되어 나타난 무엇이며, 동시에 스스로 고립된 채 진행되는데, 이러한 일련의 현상은 주체가 편집적 징후를 스스로 “포기aliénation” 하기 이전에 이미 출현하는 무엇입니다. 여기서 주체가 편집적 징후를 스스로 포기하는 시점은 거울 속의 자아로부터 사회적 자아로 전환되는 때를 가리킵니다.
(계속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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