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a Lacan

(단상. 23) 자크 라캉 읽기

필자 (匹子) 2018. 2. 24. 09:16

자크 라캉의 주저 에크리 Écrits는 오늘날 번역되었다. 불문학 동료들의 이야기를 참조하자면, 참으로 난해하여서, 상당한 심리학적 소양을 지니지 않으면 근접하기 어렵다고 한다.

 

 

 

 

그런데 나는 그러한 주장에 동의할 수 없다. 내가 독일에서 읽었던 독일어판 라캉 책은 그렇게 어렵지 않았다. 물론 시간이 없어서 끝까지 독파하지는 못했지만, 이해하는 데 그렇게 큰 어려움이 없었다. 내 능력이 탁월해서가 아니었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독일어의 구조가 분석적이고, 어떠한 생략도 용납하지 않는 데에서 기인한다.

현재 한국에서 라캉을 공부하고 싶은 사람들은 외국어 전공자들의 업적물만 나오기를 학수고대하고 있다. 그런데 아이러니한 말이지만, 라캉을 파고들려면 불어보다도 독일어를 공부하는 게 더 나을 성 싶다. 이것은 내 말이 아니라, 라캉을 공부했던 고 구승모 교수의 말이다.

 

 

라캉이 파악한 세 가지 공간 구도

 

 

사실 라틴어권 문헌의 독일어 번역본은 (다 그렇지는 않지만) 대체로 정교하다. 나는 이를 움베르토 에코의 “장미의 이름” 독어 판에서 분명히 확인할 수 있었다. 이에 비해 독일어판이 영어 혹은 라틴어권 언어로 번역되는 경우는 어떠한가? 이 경우는 원론적으로 이야기할 수 없지만, 그다지 치밀함을 느낄 수 없다. 에른스트 블로흐의 영어판들은 나에게 엄청난 실망을 안겨주곤 하였다. 각주 처리도 미흡하고, 잘 모르는 독자에 대한 배려가 전혀 없다.

 

 

유럽에서는 독어독문학을 공부하려면, 독어독문학은 물론이요, 철학, 심리학, 사회학 그리고 심지어는 신학의 문헌조차 뒤지지 않으면 안 된다. 독어독문학을 공부하면, 이를 발판으로 고대어를 공부할 수 있고, (천병희, 구기성 교수가 대표적인 예라고 할 수 있다.), 스웨덴 어문학과 덴마크 어문학을 추가로 공부할 수 있다. 또한 독어독문학을 공부하면 동구의 언어문학을 아울러 고찰할 수 있다. 밀란 쿤데라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역시 독문학자인 송동준 교수에 의해서 번역되었다.

 

 

그런데도 한국에서는 모든 인문 내지 어문 분야를 잘잘하게 나누어서 세분화한 다음에 따로국밥처럼 다루고 있다. 게다가 시장 논리 운운하면서 독어독문학 영역을 축소화시키려고 안달하고 있으니, 참으로 답답한 노릇이다. 고등학교 학생들은 일본어 중국어를 제2 외국어로 선택하는 실정이다. 도대체 대학이 공부를 시키려고 하는지, 장사꾼만 배출하려고 하는지, 도저히 알 수가 없다.  루돌프 슈타이너는 "사회 삼층론"에서 돈 잘 버는 사람이 대통령 직을 수행해서는 안 된다고 지적한 바 있다. 경제와 정치는 서로 분리되어야 하고, 상호 견제해야 한다는 말이다. 남한에서는 정치와 경제를 한꺼번에 주물럭거리는 자가 대통령이 되어 나라를 엉망으로 만들어 놓았다. 적어도 그가 학문 세계 만큼은 그렇게 하지 말아야 하는데, 그의 학문 영역에의 영향은 끔찍하기 이를 데 없다...

 

1996년에 알튀세르와 라캉에 관한 연구서가 간행되었다. 이는 프로이트 마르크스주의를 극복하기 위한 전초 단계로서 개진된 것이다. 윤소영, 알튀세르와 라캉, 공감 이론 신서 2, 서울 19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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