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에서 계속됩니다.)
우리가 연구를 통해 얻어낸 모든 경험들은 상기한 견해들과 전적으로 대립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연구는 다음의 사항을 강하게 밝히고 있습니다. 즉 자아는 결코 실존주의자들이 주장한 대로 인지 행위 – 의식 이라는 시스템으로 향하는 것이 아닙니다. 자아는 결코 현실 원칙에 의해서 조직적으로 파악되는 무엇일 수 없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자연과학의 편견을 읽을 수 있는데, 이는 인식의 변증법과 철저히 대립하는 것입니다. 인간 심리의 구조에 관해서 우리는 언젠가 안나 프로이트가 그렇게 막강한 어조로 언급한 바 있는 잘못된 인식의 기능, 즉 “오인의 기능Verkennungsfunktion”에서 출발해야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자아는 거부 내지 오인이 자신의 공개적이고 실천적인 형태로서 거부 내지 오인을 드러내는 동안에, 잠재적으로는 거대한 부분에 있어서 별도로 달리 기능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자신을 거부하는 태도는 스스로 이드를 드러내고 있기 때문에, 근본적으로 어떤 운명에 합당한 영역을 통해서가 아니라, 새롭게 비추어지는 빛에 의해서 밝혀질 수 있습니다.
우리는 자아의 형성 과정에서 나타나는 느슨함을 그런 식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느슨함으로 표현되었지만, 이러한 특성은 실제로는 노이로제의 가장 광범한 개념으로 정의 내려질 수 있는 것입니다. 이는 주체가 주어진 상황에 철저하게 이용당한 다음에 광기라는 가장 보편적인 공식을 드러내는 것과 같은 논리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광기란 정신 질환자가 수용소의 담장 안에서 자행하는 행동을 가리킬 뿐 아니라, 지구상에서 나타나는 엄청난 고함 소리 그리고 미친 행동 등에 의해서 마비되어 있는 행동 양상들을 가리킵니다.
노이로제 그리고 정신 질환 등으로 인해 나타나는 여러 가지 괴로움은 우리 ㅈ어신분석 학자들에게는 한마디로 영혼의 열정을 배울 수 있는 학교이며, 정신분석학이라는 천칭의 대들보와 다를 바 없습니다. 만약 우리가 공동체 전체에 위험을 가할 수 있는 성향의 가장 자리를 정확하게 간파하거나, 공동체가 안고 있는 여러 위험한 열정들을 어느 정도 약화시키기 위한 목록을 열거하게 된다면, 이는 얼마나 바람직한 일일까요?
오늘날 현대 인간학은 자연과 문화를 연결시킬 수 있는 자리를 탐색하려고 열심히 연구에 몰두하고 있습니다. 인간은 예나 지금이나 간에 사랑이라는 미명 하에 그칠 줄 모르게 그리고 새롭게 자신의 욕망을 타자에게 예속시키거나 자기 자신으로부터 일탈시키고 있습니다. 바로 이러한 상상적 예속이라는 매듭을 인식할 수 있는 영역은 오로지 정신분석학일 뿐입니다.
바로 이러한 작업을 위해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어떠한 찬란한 미래를 기약하지 않은 채 품어야 할 이타주의의 감정일 것입니다. 지금까지 박애주의자들, 이상주의자들, 교육자들 그리고 심지어 개혁을 추구하는 자들은 거의 공통적으로 내적으로 어떤 공격 성향을 품고 있었는데, 우리는 이를 예리하게 간파해야 할 것입니다.
정신 분석학은 주체가 주체 자신에 대해 어떻게 다시 관여하는가? 하는 문제를 제대로 파악해야 할 것입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이게 바로 너다.”라는 도취적 한계에 이르기까지 환자와 동행해야 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환자는 바로 그 한계의 영역에서 비로소 자신의 죽어가는 숙명의 부호를 깨닫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이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실천가로서의 우리의 능력만으로는 부족할 것입니다. 자신의 존재를 발견하는 진정한 여행을 시작하려는 순간으로 이끄는 일은 의사들의 노력만으로는 충분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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