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에서 계속됩니다.)
우리는 일단 거울 단계를 하나의 동일화로 이해하면 충분할 것 같습니다. 여기서 하나의 동일화는 우리의 정신분석 연구가 추구하는 표현 그 자체와 같습니다. 만약 인간이 거울 속에서 하나의 상을 대할 때, 주체의 마음속에는 거울 속의 자신의 상은 자신과 다르다는, 일종의 어떤 변모의 의미가 형성될 수 있습니다. 이것은 한마디로 지금 여기에서 출현하는 상의 효과와 동일합니다. 고대인들은 하나의 상을 대하면서 이를 이마고Imago라고 명명하며 실제 현실에서 이 단어를 사용했는데, 그들의 의식 배후에는 신들의 예정 조화설이 내재해 있었습니다.
이미 언급했듯이 아이가 거울의 모습을 보고 골똘히 생각하고 기이하게 행동하는 양태는 주위 사람들, 이를테면 부모 그리고 양육자의 환호성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합니다. 이러한 특징은 어린아이가 인간으로서의 능력을 채 숙지하지 못하기 때문에 단조로운 행동을 반복한다는 사실 그리고 어린아이가 여전히 어른의 돌봄을 필요로 하는 유아의 단계에 처해 있다는 사실을 반증해줍니다. 나아가 이러한 범례의 상황은 우리에게 어떤 다음과 같은 상징적 매트릭스를 보여주게 됩니다. 즉 자아가 아직 주체로서의 존재를 드러내지 못하고 어떤 근원적 형체 속에 침잠해 있는 경우를 생각해 보세요, 거울 앞에서의 어린아이의 행동은 바로 이 시기에, 다시 말해서 다른 사람과의 동일화되려는 과정의 변증법으로 스스로 객관화되기 전에, 언어가 일반적으로 주체로서의 자신의 기능을 완전히 발휘하기 전에 나타날 수 있습니다.
그밖에 거울 속에 드러나는 상은 어쩌면 “이상적 자아 je-idéal”라고 표기하는 게 더 타당할지 모르겠습니다. 만약 이러한 의미에서 다시금 지금까지 잘 알려진 문헌에 실린 입장들을 참고하여 제시한다면 우리는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즉 많은 학자들은 거울 단계의 상을 이른바 리비도라는 심리학적 진단의 기능으로 인정하고 있는데, 이러한 상은 기능적 차원에서 어떤 두 번째의 동일화의 근원일 수 있다고 말입니다. 그렇지만 여기서 중요한 사항은 다음과 같습니다. 즉 거울의 상의 자아는 어떤 실제와는 다른 가상적 방향성 속에서 규정된 사회적 조건 앞에서 어떤 “자아moi”의 체제로서 자리잡고 있다고 말입니다. 그렇기에 그것은 언제나 개별적 개인으로 얼마든지 축소가 가능하지만, 오히려 “끝없이 곡선으로 근접해나가면서asymptotisch” 주체의 변모에 가까이 다가가고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물론 이 경우 어떤 변증법적인 종합이 얼마든지 가능할 수도 있지만 말입니다. 가령 변증법적 종합을 통하여 변모된 주체가 자신의 고유한 현실 속에서 전혀 일치되지 않는 데 대해 “자아je”로서 하나의 해결책을 찾아야만 할 경우를 상정해 보십시오,
그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주체는 자신의 에너지로써 차제에는 반드시 성숙되리라는 망상을 품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그것은 육체의 완전한 형태 앞서서, 다시 말해 시기적으로 이전에 존재합니다. 그렇기에 육체의 완전한 형태는 주체에게 다만 하나의 형체로서 처음부터 주어져 있습니다. 이를테면 하나의 외부적이고 표면적인 특성으로 말입니다. 부언하건대 주체의 형체는 처음부터 무조건 정태적으로 구성되어 있는 게 아니라, 능동적으로 무언가를 구성하지만, 자신을 경직하게 할 정도의 놀라운 육체적 외부성의 숭고한 정태적 면모를 보여주곤 합니다. 달리 말하자면 그것은 자신의 측면을 완전히 뒤집어 놓은 듯이 동일한 어떤 대칭적 정태성의 구도를 보여주지만, 이와는 정반대로 마치 죽은 물체에 생명을 불어넣는 느낌을 생생하게 체험하게 하는 혼란스러운 운동성을 감지하도록 부분적으로 작용하기도 합니다.
자아의 구체적 형체는 이런 식으로 어떤 상징을 보여줍니다. 다시 말해서 그것은 자신의 정밀성이 어떤 유형 내지는 어떤 양식과 처음부터 결부되어 있음을 분명히 보여줍니다. 형체의 단조로운 양식은 아직 분명히 인지되지는 않지만, 최소한 형체가 출현할 때 두 가지의 측면에 의해서 자아의 심리적 영속성을 보여줍니다. 바로 이러한 영속성을 통해서 형체는 “스스로 포기하는 자신의 운명적 특성destination aliénante”을 부분적으로 노출시킵니다. 이 경우 형체는 인간이 자아를 외부적으로 표출하는 외부적 면모 그리고 자신의 지배하는 망령의 상 등과 그야말로 완전히 일치시킬 수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주체는 세계가 어떤 어긋나는 관련성 속에서 스스로 완전하게 되려고 노력하는 외부적 자동 기계를 단호하게 거부할 수 있습니다.
이미지의 은폐된 면모는 우리의 일상적 경험 그리고 (레비스트로스가 언급한 바 있는) “상징적 현실의 절반의 그림자” 속에서 뚜렷하게 의식되곤 합니다. 특히 이미지의 이러한 특징만을 바라보는 것은 우리의 불완전한 무감각성을 반증하지만, 때로는 특권으로 작용하기도 합니다. 그렇기에 거울 속의 상은 실제에 있어서 어쩌면 가시적 세계의 문턱 내지 문지방처럼 보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우리는 거울 속의 질서가 어쩌면 정신 이상자의 환각이라든가 일반인들이 꾸는 꿈속에서 자기 자신의 육체에 대한 이마고를 표현하고 있다고 확신할 수 있습니다. 이때 중요한 것은 거울 속의 상의 개인적 면모이며, 나아가 상의 취약점 내지 객체에 합당한 투사가 하나의 관건일 수도 있습니다. 그게 아니라면 우리는 거울이라는 도구를 이중인격 인간의 외부적 모습을 비추어주는 역할로 확정시킬 수도 있습니다. 이 경우 이중인격 인간 면모 속에서 드러나는 것은 통상적인 현실과는 다른, 인간 심리 속에 투영되는 이질적인 제반 현실일 수도 있습니다.
가령 다음의 사항은 생물학적 실험을 통해서 사실로 확인한 바 있습니다. 즉 하나의 형체는 조직체계에 “형체로 변하게 할 수 있는formatifs” 작용을 행할 수 있는 충분한 능력을 지닌다는 사실 말입니다. 이 경우 생물학적 실험은 심리적인 인과성의 이념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기 때문에 형체 그 자체로 표현할 수 있는지 없는지 스스로 결정을 내리지 못할 정도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다음의 사실을 인식할 수 있습니다. 이를테면 비둘기 암컷이 같은 종의 비둘기를 바라보는 일이 궁극적으로 생식 기관의 선(腺)이 자극을 받고 성숙하게 되는 필수 불가결한 전제조건이 된다는 사실 말입니다. 이때 암컷이 바라보는 비둘기가 수컷이냐, 암컷이냐? 하는 물음은 여기서 전혀 중요하지 않습니다. 자신과 동일하게 생긴 비둘기를 바라보는 일 자체가 그야말로 충분한 전제조건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렇기에 어떤 거울의 반응 영역을 실험 삼아 개인의 심리적 영역으로 이전시킨다면, 우리는 당연히 어떤 동일한 효과를 거두게 될 것입니다.
그밖에 우리는 방랑하는 메뚜기 떼를 예로 들 수 있습니다. 메뚜기의 계보 (系譜)를 살펴보면, 우리는 고립 생활을 영위하는 개체로부터 서로 아우르며 함께 생활하는 개체로의 이전되는 놀라운 양상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생명체의 경우 어떤 단계에 이르기까지 자신과 동일한 어떤 상을 시각적으로 바라보는 일이 궁극적으로 개별적 특성을 사라지게 만든다는 사실을 간파할 수 있습니다. 적어도 대부분의 동물들은 자신과 근친한 유형에 대해 매우 근친함 내지 친밀감을 느끼고 자신과 동일한 종의 움직이는 모습과 방식에 대해 무척 커다란 생동감을 느낍니다. 여기서 우리는 유사한 형질의 동일성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가령 아름다움의 의미를 물을 때 우리는 형체에서 느끼는 유사성을 통해서 어떤 성적 자극을 받는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3, 4, 5, 6에서 계속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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