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 동독문학

서로박: 프리스의 문학세계 (2)

필자 (匹子) 2023. 3. 14. 10:07

(앞에서 계속됩니다.)

 

3. 오블라두로 향하는 길(2)

어느 날 아를레크는 에스파냐 출신의 이사벨이라는 처녀를 사귀게 됩니다. “낯선 땅의 낯선 여자는 마치 집시처럼 우울한 표정을 짓지만, 가볍고도 강한 사랑의 의지를 드러내고 있었습니다. (20) 이사벨은 순간적으로 주인공의 마음에 사랑의 불을 지핍니다. 그미의 용모, 말씨 그리고 행동 등 모든 것이 자신의 잃어버린 유년의 흔적을 자극하였습니다. 두 사람은 에스파냐어로 서로 대화를 나누며 친밀하게 지냅니다. 두 사람은 만날 때마다 상대방의 몸을 탐하면서 서로의 사랑을 확인합니다. 아를레크의 눈에는 이사벨이 처음부터 이상적인 처녀로 비칩니다. 에스파냐 그리고 에스파냐의 언어는 주인공에게 고향, 그 이상의 의미를 가져다줍니다. 주인공은 이사벨에게 마리아 돌로레스라는 이름을 붙여줍니다. 그렇지만 여성을 이상화하려는 아를레크의 태도는 이사벨에게 오히려 부담감을 가중시킵니다. 왜냐하면 이사벨은 주인공이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시랑해주기를 바라고 있었습니다. 자신의 존재가 내적으로 떠올린 이상적 상에 적용된다는 것 자체가 그미의 마음을 불편하게 했던 것입니다. 어느 날 이사벨은 임신하게 됩니다. 이사벨은 주인공과의 결혼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되자, 눈물을 흘린 뒤 다른 남자와 마음에도 없는 결혼식을 올립니다. 아를레크는 이사벨이 떠난 다음부터 삶의 의욕을 상실하고, 이리저리 방황합니다.

 

다른 한편 브리기테는 자살하려고 수면제를 복용했으나, 주위 사람들의 도움으로 목숨을 부지합니다. 파아쉬는 자신의 아기를 저버릴 수 없어서 브리기테와 결혼해야 합니다. 원치 않은 결혼은 그를 더욱더 술과 마약에 빠져들게 합니다. 어느 날 아를레크는 동베를린에서 체제에 반대하는 삐라를 살포하다가 경찰에 의해서 체포됩니다. 다행히 초범인지라, 며칠 후에 풀려납니다. 얼마 후에 두 사람은 지긋지긋한 관료주의의 폐쇄적 환경을 벗어나기 위해서 서베를린으로 건너갑니다. 당시는 베를린 장벽이 건설되지 않았던 50년대 말이었으므로 동서 베를린의 왕래가 자유로웠습니다. 서베를린에서 그들이 발견한 현실은 처음에는 마치 꿈속의 정원처럼 휘황찬란하게 보입니다. 아를레크가 발견한 꿈의 현실이 작품 낭독회의 공간이라면, 파아쉬가 발견한 꿈의 현실은 바로 음악적 재기발랄함이 표출되는 재즈 콘서트였습니다. 이곳에서 그들의 꿈은 제각기 실현될 것 같이 보입니다. 그러나 서베를린은 거대한 도시였습니다. 그곳은 망각의 파도 속에서 배회하는, 두 사람의 자아를 더욱더 외롭게 만들었습니다. 두 사람 역시 A. 그리고 P.로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들은 서베를린이 유토피아의 공간이 아니라, 소비를 위한 고객의 공간에 불과하다는 것을 재확인합니다. 두 사람은 실망을 느끼면서 다시 동독으로 건너갑니다.

 

구동독의 공안당국은 국경을 자유자재로 넘나든 두 명의 사내에 촉각을 곤두세웁니다. 아를레크와 파아쉬는 공화국 탈출이라는 혐의를 모면하기 위해서 기지를 발휘합니다. 즉 두 사람은 아무런 이유 없이 서독으로 납치되었다고 주장합니다. 누군가 두 사람의 유명 인사를 추적하였는데, 아를레크와 파아쉬를 두 명의 유명 인사로 착각하여, 서베를린으로 강제로 납치되었다는 것이었습니다. 나중에 신원이 밝혀지자 서독의 비밀요원은 두 사람을 비밀리에 훈방합니다. 결국 두 사람은 술에 취해서 거리를 활보하다가 정신 병원에 수감되었는데, 힘없는 그들로서는 이에 대항할 방도를 찾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마지막에 이르러 아를레크는 스스로를 이 세상에서 버림받은 불쌍한 사내라고 믿습니다. 그런데 깊은 고독의 심연에서 그를 도와준 사람은 또 다른 여성이었습니다. 다행스럽게도 아를레크는 안네라는 여성을 사귀게 되어, 그미와 조용한 행복을 누리려고 합니다. 그렇지만 파아쉬는 여전히 정신 병원에 머물고 있습니다. 그는 혈액 속의 과도한 알코올 농도” (280)로 인하여 알코올 중독으로, 간간이 자살을 떠올리곤 합니다. 아를레크는 친구 파아쉬와 작별한 다음에 아무런 미련 없이 그곳을 떠납니다.

 

4. 오블라두로 향하는 길(3)

친애하는 F, 이미 언급했듯이 오블라두로 향하는 길은 주제 상으로 그리고 소재에 있어서 이른바 도달문학과는 정반대되는 경향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작품은 개인의 행복, 삶의 순응의 문제 등을 다룬다는 점에서 70년대에 나타난 신주관주의의 문학적 경향을 선취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경향은 라이프치히 대학의 학문적 예술적 분위기에서 답습한 것입니다. 이는 루카치의 문학적 경향을 수용한 게 아니라, (블로흐 예술론에서 강조되는) 더 나은 현실에 대한 동경의 실험 문학적 수용에서 발견됩니다. 나아가 프리스는 구동독의 젊은 지식인을 애정 어린 마음으로 다루었습니다. 60년대 구동독의 일부 지식인들에게는 그들이 추구하는 이상을 긍정적으로 자발적으로 드러낼 탈출구가 주어져 있지 않았습니다. 다시 말해서 창의성과 자발성의 새싹은 구동독의 관료주의에 의해서 처음부터 꺾여 있었던 것입니다. 두 명의 주인공, 아를레크와 파아쉬가 진취적인 사회의 선구자로 노력하는 대신에 개인의 향락적 삶을 추구한 까닭은 바로 그 때문입니다.

 

오블라두는 동화 속의 장소입니다. 그곳에서는 무한대의 자유가 자리하며, 평화롭게 사랑을 실현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점에서 동화 속의 장소는 유토피아의 공간일 것입니다. 이를 고려한다면 오블라두는 새로운 삶의 가능성을 위한 하나의 암호와 같습니다. 이러한 가능성은 개개인의 낮꿈내지 백일몽 속에서 설계해낼 수 있는 무엇입니다. 그것은 수동적으로 기대하는 태도가 아니라, 주어진 여건을 수정하고 뛰어넘으려는 능동적 행위와 관계됩니다. 그렇기에 작품의 제목이 오블라두가 아니라, “오블라두로 향하는 길로 설정된 것은 의미심장합니다. 즉 목표가 아니라, 목표로 향하는 길 내지는 과정이지요. 블로흐의 문장으로 설명하면, 그것은 목표를 포괄하는 과정입니다. 목표 역시 존재이자 희망, 다시 말해 무엇에 대한 무엇의 혼동 Quid pro Quo”이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목표 역시 어떤 의향에 의해서 파기될 수 있는 무엇 내지는 실체인 것입니다.

 

친애하는 F, 마지막으로 한 가지 사항만을 덧붙이도록 하겠습니다. 작가는 두 명의 주인공의 인물을 16세기 이탈리아에서 발전된 인민희극 작품인 안젤로 베올코 Angelo Beolco직업 연극에서 도출해내었습니다. 이 작품은 이탈리아의 파우스트처럼 통속적 방언을 사용하는 인민 극작품으로서 주로 유럽의 일 년 시장에서 인형극, 팬터마임 그리고 거리 연극 등의 방식으로 지속적으로 공연되었습니다. 즐거운 해학과 농담, 에로스를 추구하는 에스파냐 인들의 향락적 유희는 인간이 추구하는 본능적인 삶에 대한 하나의 범례입니다. 이는 단식과 기도의 삶을 중요시하는 프로테스탄트 종교를 믿는 많은 프로이센 사람들에게는 낯선 생활방식입니다. 작가는 프로이센의 근엄하고 철저한 현실주의 대신에, 에스파냐의 여유와 아름다움 그리고 작센 사람들의 유희적 삶의 패턴이 이 구동독에서 부활되어야 한다고 믿은 것 같습니다.

 

(계속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