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내 단상

(단상. 477). 치료의 매개체로서의 이야기들

필자 (匹子) 2021. 5. 25. 11:44

사랑의 갈망은 무지개와 같다. 일곱 색깔에게 다가가면, 그만큼 멀어진다. 헝가리의 시인, 산도르 페퇴피Sándor Petöfi에 의하면 희망은 카르멘과 같아서, 돈 호세가 순정을 바칠 때, 그미는 어리석은 군인을 떠난다.

 

그런데 행복 추구에서 사랑이 배제되면, 행복 추구 자체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사랑 없는 참다움은 허사로 다가오고, 사랑 없는 선은 차가운 도덕으로 남으며, 사랑 없는 아름다움은 생명력 없는 인형의 서늘함만 보여줄 뿐이다.

 

그래, 사랑이 황금이라면, 진선미는 수은, 황 그리고 소금이다. 사랑이 행복의 결실이라면, 그것을 자극하는 매체들이 진선미이기 때문일까. 완전한 사랑, 영원한 사랑은 그 자체 허구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알면서도 이러한 허상을 끝없이 추구한다. 그 이유는 고통을 당하는 인간의 심리적 아픔을 치유해주고 우리의 삶을 즐거움으로 치장하게 하는 게 사랑이라고 대부분 사람들이 맹신하기 때문이다.

사랑은 개별적 호모 아만스의 행복을 느끼게 해주는 정서이며, 은 좋든 싫든 간에 사랑하는 두 인간의 영혼을 연결시켜주게 하는 수단이다. 우리는 상대방을 긍휼히 여기기 때문에 우리는 고통당하는 이웃의 고통에 함께 애통해할 수 있으며, 상대방의 입장에서 나를 바라보기 때문에 모든 호모 아만스들은 상호 아우르면서 영혼의 소통 가능성을 지니게 되는 것이다.

 

그렇기에 사랑은 비유적으로 말하자면 마치 인간을 인간답게 살게 하는 꽃과 같다. 그것은 사람과 사람을 잇는 가교로 기능하지 않는가? (황지우) 우리의 눈에는 사랑이 아름답게 비치고, 성이 더럽게 보인다. 그러나 사랑이 칼릴 지브란의 말대로 “사랑이 인간다움의 꽃 (송용구: 185)이라면, 성은 인간다움의 뿌리와 같다.

이야기는 서사적 상상력을 부추기며, 듣는 사람을 치료하게 한다. 사랑에 관한 이야기 속에는 인간 삶의 모든 가능한 세부적 사항이 담겨 있으며, 인간 감정이 복합적으로 뒤엉켜 있다.

 

특히 이야기를 접하는 사람들은 그것을 무의식적으로 자신의 문제점으로 환치시킬 수 있다. 왜냐하면 비슷한 이야기는 당사자의 심리 구조 속에 하나의 감명 내지는 충격을 가하게 되기 때문이다.

 

독자는 이야기를 접하면서 자신의 체험 내지 이와 유사한 체험 현실을 떠올린다. 모든 이야기는 독자 자신으로 방향을 설정하고 있다. 그렇다. 호라티우스가 『대화Sermones』에서 언급한 다음의 문장을 생각해 보라. “이름은 바뀌었지만, 이야기는 너에 관해 들려주고 있다.Mutato nomine, de te fabula narratur.” (Killy: 3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