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알림 (명저)

(명저) 이도흠 저: 원효와 마르크스의 대화 (2)

필자 (匹子) 2016. 6. 1. 12:43

이도흠 교수의 놀라운 몇 문장을 인용하도록 하겠습니다.

 

"노동자와 시민이 항의하면, 집회는 원천 봉쇄당하고 말들은 검열로 사라진다." (27쪽)

 

-> 참으로 놀라운 구절이 아닐 수 없습니다. 국가가 죄를 지으면, 과연 누가 국가에게 처벌을 내릴 수 있는가요?

 

"국가 기관이 빅브라더가 되어 시민과 노동자를 감시하고, 초국적 자본에 조종되는 미국은 전 세계의 메일과 통화를 도청하고 있고, 구글과 페이스북은 기꺼이 협조자로 나선다." (27쪽)

 

-> 지금 여기의 형국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미국은 자본가의 논리를 대변하면서 우리를 감시하고 있습니다. 어산지라는 사람은 이를 고발하다가, 이 나라, 저 나라를 떠돌면서 쫓기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주객이 전도된 셈이지요.

 

"일본 무사로 육성된 박정희는 쿠데타로 집권하여, 달의 나라를 칼의 나라로 바꾸었다." (33쪽) 

 

-> 박정희는 오까모도 복상으로서 일본군 중위였습니다. 그는 대한 독립군을 토벌하는 데 앞장 선 사람입니다. 장준하 선생의 돌베개, 김준엽 선생의 대장정을 읽으면 이는 사실로 확인됩니다.

 

"불행의 원인이 나의 탐욕과 무지와 성냄 때문이라면, 더욱 깨우치고 수양할 일이다. 내가 아니라, 제도와 시스템, 자본, 국가, 제국에 있다면, 그에 저항하여 새로운 시스템과 세계를 만들어야 하리라." (35쪽)

 

-> 인성과 제도는 서로 아우르면서 변모해야 합니다.

 

 

   

카를 마르크스

 

"주체란 관계 속에서 형성되는 허상이지만, 자기가 공 (空)하다고 함으로써, 타인을 생성시키고 타자의 아픔에 공감하며 자기 안의 부처, 곧 인간 다운 본성을 형성하는 눈부처-주체다." (35쪽)

 

-> 이 말은 주체 유토피아를 이해하는 데 가장 적절한 말이라고 생각됩니다.

 

"깨달음은 안과 밖이 동시에 감응할 때 찾아오며, 줄탁동시 啐啄同時가 아루어질 때 새 하늘은 열린다." (36쪽).

 

-> 신입생을 만나 꼭 이 사자성어를 알려주도록 하겠습니다. 신입생들이 에서 잘 나올 수 있도록, 나는 밖에서 도움을 주려고 합니다.

 

"타자의 고통에 대한 공감 없이 인간이란, 인간에 관한 학문이란 무슨 의미를 갖는가?" (36쪽) 

 

-> 타자의 고통에 대한 공감하려고 하고 그리고 타자의 아픔을 읽어내면서 그분을 배려하려는 자세야 말로 인간 이해의 첩경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도흠 교수는 가난과 고통 속에서 살아가는 쪽방촌의 삶을 모르는 학자를 현실을 도외시하는 학문업자라고 명명하고 있습니다..  

 

"마르크시즘이 현대 사회와 자본주의 체제를 분석하는 과학이라면, 불교는 그 너머를 사유하는 지평을 열 것이다." (39쪽) 

 

-> 지금까지 나는 전자를 정치경제학의 소임이고, 후자를 마르크스주의의 철학과 예술의 소임이라고 생각해 왔습니다. 내 생각이 짧은 것 같습니다. 앞으로 불교와 동양학에 관심을 기을일 생각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