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 Brecht

서로박: (1) 브레히트의 이단자의 외투

필자 (匹子) 2023. 3. 11. 14:18

1. 브레히트의 단편, 이단자의 외투: 친애하는 K, 당신은 나에게 「이단자의 외투」의 주제를 문의하였습니다. 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하나의 정답을 알고 있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해답은 텍스트 속에 내재하기 때문입니다. 나아가 텍스트의 주제는 미리 정해진 게 아닙니다. 만약 미리 정해져 있는 것이라면, 우리가 문학 텍스트들을 애써 읽을 필요가 어디 있을까요? 그냥 편하게 논문 혹은 해설서만 읽으면 족하지 않을까요? 그러나 논문과 해설서를 100% 신뢰하는 것은 당신의 문학 해석의 힘을 키우는 데 커다란 악재로 작용할 것입니다. 우리는 문학 텍스트를 직접 읽고 생각의 힘을 스스로 단련해야 합니다.

 

단편의 서두에도 서술되어 있듯이 지오르다노 브루노 (Giordano Bruno)는 일반적으로 “위대한 인간”이라고 이해됩니다. 우리는 그 이유를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사항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첫째로 브루노는 당대에 탁월한 학문적 업적을 남겼습니다. 철학 그리고 자연과학과 관련되는 그의 학문적 업적은 후세 사람들에게 계승되었습니다. 둘째로 브루노는 종교 재판소에서 자신의 당당한 용기를 보여주었습니다. 브레히트는 전해 내려오는 이러한 이야기를 사실과 어긋나게 뒤집지는 않습니다. 대신에 그는 브루노에 관한 잘 알려지지 않는 이야기에 소설의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2. 브루노의 삶 (1) 일단 브루노의 삶과 사상에 관해서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지오르다노 브루노는 1548년 나폴리 근처의 “놀라”라는 곳에서 태어났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군인이었습니다. 나폴리에서 공부한 다음에 브루노는 1505년 도미니크 수도원에 들어가서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렇지만 수도원 생활은 그의 마음속에 갈등을 낳았습니다. 왜냐면 그는 수도원의 규칙에 해당하는 마리아 숭배를 거부했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모든 성스러운 유물들에 대해 거리감을 취했습니다. 그럼에도 그는 1572년에 신부의 서품을 받게 됩니다.

 

1576년에 사람들이 그에게 이단 혐의를 부여했을 때, 브루노는 나폴리를 떠나야 했습니다. 그런데 그는 로마의 어느 사원에서 교부 히에로니무스의 문헌을 등불로 향해 집어던졌습니다. 이로 인하여 로마에서 편안히 정착하지 못하고 다시 도주해야 했습니다. 도미니크 수도원을 탈퇴한 다음에 이탈리아의 놀라, 사본나 그리고 투린 등지로 방랑해야 했습니다. 이후 브루노의 삶은 방랑 그 자체였습니다. 갑자기 고대의 자연 철학이 그의 눈에 들어왔습니다. 당시는 코페르니쿠스가 지동설을 관철하려고 하던 무렵이었습니다. 지동설의 사상에 심취한 그는 자신의 고유한 철학적 체계를 축조하는 데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치겠다고 마음먹습니다.

 

3. 브루노의 삶 (2): 1578년 가을에 브루노는 제네바에 당도했습니다. 그곳에서는 테오도르 바차Théodore de Bèze가 칼뱅이 죽은 뒤부터 칼뱅 수도원을 이끌고 있었습니다. 브루노는 프로테스탄트 교회에 가담하였습니다. 이는 로마의 종교 재판소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함이었습니다. 1579년 8월에 브루노는 신학적 입장 차이로 인하여 잠시 당국에 투옥됩니다. 자유의 몸이 되기 위해서 브루노는 자신의 주장을 철회하고 감옥에서 나오게 됩니다. 감옥에서 나온 브루노는 프랑스의 리용으로 향합니다.

 

1579년 톨루즈에서 잠시 강의를 맡은 브루노는 위그노 전쟁의 와중에서 방황하다가 다시 파리로 돌아옵니다. 파리에서 앙리 8세의 지지를 받고 약 4년간 프랑스에 머물게 됩니다. 1583년 브루노는 영국의 옥스퍼드로 가서 강좌를 맡으려고 합니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에 대한 비판적 발언 그리고 표절 시비에 연루되어서 어떠한 강의도 맡지 못합니다. 1585년 중엽까지 그는 친구들의 도움으로 힘든 삶을 영위합니다. 영국에서 브루노는 『이탈리아의 대화록』을 집필합니다.

 

4. 브루노의 삶 (3): 브루노는 다시 독일로 향하여 마르부르크에서 강의하려고 노력합니다. 1586년 여름 베텐베르크에 도착한 그는 법학자 알베리코 젠틸리 (Alberico Gentili, 1552 - 1608)의 도움으로 베텐베르크의 기술 단과대학에서 강의하게 됩니다. 주로 그가 맡은 과목은 철학 과목이었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 수학, 논리학, 물리학 그리고 형이상학 등에 관한 과목을 가르쳤습니다. 당시에는 라틴어가 학문 언어로 사용되었기 때문에 유럽 전역에서 활동하는 데 아무런 지장이 없었습니다.

 

1587년에 논리학과 기억술에 관한 두 권의 책이 간행되었습니다. 여기서 나중에 라이프니츠는 이 책에서 자신의 철학적 영감을 얻었다고 합니다. 그 후에 그는 체코로 건너가시 집필 활동에 몰두합니다. 그는 특정 대학에서 교수직을 얻으려고 노력했으나, 항상 실패로 돌아갔습니다. 그는 자신을 지지해주는 후원자를 찾았지만, 자신의 무신론적 세계관으로 인하여 항상 보수적인 신학자들과 제후들과 마찰을 빚었습니다. 1580년 7월에 프랑크푸르트에 머물렀지만, 그곳의 수도원장과 신학적 입장 차이로 대립하였습니다. 결국 그는 프랑크푸르트로부터 추방당했습니다.

 

5. 브루노의 체포: 프랑크푸르트에 체류하는 동안 브루노는 자신의 고향을 그리워했습니다. 그렇지만 이탈리아에는 종교재판소가 막강한 권한을 휘두르고 있었습니다. 가톨릭교회는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프로테스탄트 종교와 투쟁하던 터였습니다. 보수적 교황인 식스투스 5세가 사망한 즈음에 파도바 대학에서는 수학 교수를 구하고 있었습니다. 프랑크푸르트에 체류하는 동안에 베네치아에서 살고 있는 지오반니 모세니고 (1409 - 1485)가 그를 초대했습니다. 그러나 브루노는 이를 거절합니다. 그는 바도바에서 강의를 맡았지만, 교수직은 갈릴레이에게 돌아가고 맙니다. 그래서 브루노는 모세니고의 초대장을 들고 베네치아로 향합니다.

 

모세니고는 브루노에게 기억술뿐 아니라, 기이한 마법의 자연과학을 기대했습니다. (기억술이란 고대 그리스인들이 연설을 연습하기 위한 학문이었는데, 나중에 수사학의 한 과목으로 정착된 바 있습니다.) 우리는 모세니고가 자신의 요구에 응하지 않는 브루노에게 실망했는지, 아니면 학자가 베네치아를 떠나려는 것을 막으려고 했는지 알 수 없습니다. 분명한 것은 모세니고가 당국에 밀고하여, 브루노가 1592년 5월 22일에 종교 재판소에 의해 체포되었다는 사실입니다. 베네치아의 감옥에서 브루노는 일곱 번에 걸친 심문을 당한 뒤에 자신의 지동설을 번복합니다. 당시는 이단의 문제보다도 정치적 사안이 더 중요했습니다. 그래서 베네치아의 종교 재판소는 브루노를 로마로 송치하게 됩니다.

 

6. 7년 동안의 법정 투쟁: 1593년 초에 브루노는 로마로 송치됩니다. 이후 그를 둘러싼 심문은 약 7년 동안 이어집니다. 브루노는 교황 클레멘스 8세와의 알현을 요구했지만,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그는 자신의 이론을 부분적으로 번복할 자세가 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로마의 종교 재판소는 브루노에게 자연과학에 대한 이론 내지는 지동설 모든 것을 인정하지 말 것을 완강하게 요구하였습니다. 말하자면 브루노가 생각한 지동설 뿐 아니라, 자신의 모든 학문적 견해 그리고 우주론 등이 처음부터 잘못되었다고 시인하라는 것이었습니다.

 

브루노는 자신의 학문적 입장을 번복하였습니다만, 다음과 같은 사항을 번복할 수 없다고 항변합니다. 첫째로 브루노는 그리스도가 신의 아들이라는 것을 인정할 수 없었습니다. 왜냐면 예수는 동정녀 마리아에 의해서 태어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둘째로 그는 기독교가 주장하는 최후의 심판을 용인하지 않았습니다. 요한 계시록에 묘사되는 최후의 심판은 하나의 비유 내지는 가설로 이해될 뿐이라는 것입니다. 셋째로 기독교가 주장하는 지상과 천상의 이원적 세계를 부인하였습니다. 왜냐면 우주는 물질로 이루어져 있으며, 무한한 공간이라고 믿었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