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 Brecht

서로박: 브레히트의 '갈릴레이의 삶' (2)

필자 (匹子) 2023. 2. 20. 12:03

(앞에서 계속됩니다.)

 

10. 천체 물리학 연구의 위험성: 그런데 문제는 다음의 사실에 있었습니다. 이성에 대한 신념 내지 대단한 학문적 열정은 역설적으로 주인공의 정치적 감각을 무디게 만든다는 사실 말입니다. 갈릴레이는 보다 많은 수입 때문에 베네치아 공화국을 떠나, 피렌체로 거주지를 옮깁니다. 갈릴레이는 수학자였습니다. 그러나 수학의 원리만으로는 생계를 유지하고 학문에 몰두하는 데 어려움을 겪습니다. 그래서 그는 응용학문에 관심을 기울입니다. 그것은 천체물리학으로의 방향 전환이었습니다. 가끔 물 펌프를 생산하고 망원경을 제조하여, 그게 자신의 발명이라고 공언하는 경우를 생각해 보세요.

 

그런데 갈릴레이는 천체 물리학의 연구가 궁극적으로 체제의 전복을 낳게 되는 뜨거운 감자라는 사실을 사전에 간파하지 못했습니다. 갈릴레이는 자신의 연구 결과물에다 라틴어 대신에 이탈리아어로 “어부의 부인과 양털 상인을 위한 규칙”이라고 기술합니다. 이는 가톨릭 수사들의 노여움을 사게 됩니다. 피렌체의 학자들은 갈릴레이를 종교 재판소에 고발합니다. 갈릴레이는 교회 당국에 대항하여 자신의 학설의 정당성을 용기 있게 그리고 교묘하게 밝혀냅니다. 비록 자신의 학설이 거의 인정받게 되었을 때, 이번에는 그의 새로운 학설인 지동설이 도마 위에 오르게 됩니다.

 

11. 갈릴레이의 지동설과 그의 번복 행위: 8년간 침묵을 지킨 후 갈릴레이는 금지된 학설을 다시금 연구하기 시작하지만 (1623 -1644), 본의 아니게 자신의 딸, 비르기니아의 사적인 행복을 파괴시키고 맙니다. 왜냐면 아버지를 돕기 위하여 그미는 자신의 결혼마저 포기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갈릴레이의 지동설은 민중들에게서 커다란 호응을 얻습니다. 그는 재차 로마에 있는 종교 재판소에 소환 당합니다. 말하자면 교황은 그를 심문하고 고문하자는 협박에 동의했던 것입니다. 갈릴레이는 교황청의 협박 앞에서 생명의 위협을 느끼고 자신의 주장을 번복합니다. 그는 1600년에 지동설을 주장하다가, 화형을 당한 지오르다노 브루노 G. Bruno를 분명히 기억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브레히트의 드라마는 주인공이 자신의 견해를 번복하는 순간을 생생히 다루지 않고, 주인공의 이른바 “용기 없는” 행위에 대해 실망하는 제자들의 눈물겨운 모습을 보여줍니다. 오히려 주인공과 제자 사이의 대립이 첨예하게 드러나고 있습니다. 가령 제자 사르티가 “영웅이 없는 나라는 불행하도다. Unglücklich das Land, das keine Helden hat.”라고 말할 때, 갈릴레이는 “영웅을 필요로 하는 나라는 불행하도다. Unglücklich das Land, das Helden nötig hat.” 라고 대답합니다. 갈릴레이는 목숨을 부지하나 감시당하며 살아가고, 그의 제자들은 뿔뿔이 흩어집니다.

 

12. 제 14장, 선생과 제자의 만남: 제 14장은 (문헌학적으로 고찰할 때) 가장 많이 가필된 것이며, 주제 상으로도 (제 15장과 함께) 아직도 논란이 되고 있는 대목입니다. 어느새 오랜 세월이 흘렀습니다. 안드레아는 옛 은사를 찾아갑니다. 비록 갈릴레이의 배반으로 스승을 떠났지만, 안드레아 사르티는 어느 새 젊은 과학자로 거듭난 것입니다. 갈릴레이는 칠순 노인이 되어 있었습니다. 비르기니아는 루도비코와의 결혼을 포기하고 아버지를 수발들고 있었습니다. 이때 그는 은사가 비밀리에 (당국의 감시 하에) 「물체의 운동 법칙에 관한 논문」을 집필한 것을 직감적으로 알아차립니다. 이때 안드레아는 갈릴레이에 대한 자신의 오랜 비난을 순간적으로 후회합니다.

 

당신은 진리를 감추었습니다. 적 앞에서. 윤리적인 측면에서도 당신은 백년을 앞섰습니다.” 사르티는 진리의 힘이 일시적으로는 권력의 힘보다 약하나, 오랫동안 생명력을 유지한다는 사실을 추후 깨닫습니다. 그렇다면 안드레아의 판단은 과연 옳은 것일까요? 갈릴레이는 지동설을 번복한 뒤에, 자신의 물리학 연구 논문을 완성했는데, 이러한 행위는 과연 용납될 수 있는 것일까요?

 

 

13. 지동설 그리고 물체의 운동법칙 가운데 무엇이 중요한가?: 물론 사람들마다 다른 견해를 지닐 수 있을 것입니다. 물론 해석상의 문제이기는 하나, 제 14장에서 안드레아 사르티는 갈릴레이의 연구 문헌을 대하고, 옛날에 자신이 은사의 지동설 번복행위를 신랄하게 비판한 행동을 후회합니다. 이러한 후회는 얼마든지 출현할 수 있지만, 우리에게 하나의 난제를 안겨주고 있습니다. 이를테면 다음과 같은 물음을 생각해 보세요. 지동설을 부정함으로써, 수많은 민중의 희망을 꺾어버린 갈릴레이의 행동이 중요한가? 아니면 설령 비굴하다는 욕을 듣더라도 끝까지 살아남아 물리학 논문을 집필하는 게 능사인가? 하는 근본적인 문제 말입니다.

 

이러한 질문에서 우리는 볼프강 이저 Wolfgang Iser가 말하는 텍스트의 “텅빈 공간 Leerstelle” 내지 “맹점”을 파악할 수 있습니다. 사르티는 갈릴레이의 논문을 비밀리에 가지고 나와서 국경을 넘습니다. 이는 스승의 학문을 계승하여 물리학의 발전을 위하려는 행동이지만, 우리는 이에 다음과 같이 문제를 제기할 수밖에 없습니다. 즉 지동설의 번복은 지엽적인 물리학의 법칙을 창조해내는 행위로 인하여 결코 정당화될 수 없다는 문제 말입니다.

 

14. 핵무기 시대에서 살아가는 과학자의 자세: 특히 다음과 같은 대화는 히로시마 나가사키의 원자폭탄 투하로 인한 끔찍한 피해를 연상하게 해줍니다. “학문의 유일한 목표는 인간의 현생활의 수고를 덜어주는 것이라네. 만약 과학자들이 이기적인 권력자 앞에서 위축되어, 오로지 지식을 위한 지식을 쌓는 데 만족한다면, 학문은 절름발이가 되고 말테고, 자네들이 만든 새로운 기계들도 단지 새로운 애물단지에 불과할 걸세. (...) 사정이 이러하니 우리와 같은 과학자들은 기껏해야 무슨 일에도 고용될 수 있는, 발명에 재간을 지닌 난쟁이 족속일지 몰라.”

 

이러한 발언은 오늘날에도 유효합니다. 체르노빌, 아니 후쿠시마의 원전사고를 생각해 보세요. 철학자 뤼디거 자프란스키 Rüdiger Safranski도 주장한 바 있듯이, 인간은 자신의 재주만 믿고 설치는 난쟁이 족속인지 모릅니다. 인간은 무언가를 발명하고 만들어내지만, 그것이 차제에 얼마나 커다란 악영향을 끼치는지를 사전에 인식하지 못하는 동물입니다. 신화에 의하면 프로메테우스는 인간에게 불을 전해주기 전에 인간이 원래 소유했다고 하는, “미래에 대한 예견력”을 빼앗아 가버렸습니다. 우리는 불과 5분 후에 어떠한 일이 벌어질지 예견하지 못하는 존재입니다.

 

15. 작품의 특성: 작품은 형식적인 측면에서 고찰할 때에도 어떤 애매한 점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관객은 작품의 서사적 구조를 명확하게 꿰뚫기 어렵습니다. 전체적으로 산문으로 쓰였는데도, 지금까지 등장하던 노래라든가 독백 등은 거의 생략되어 있습니다. 브레히트의 대부분 극작품에는 노래가 등장하여, 등장인물의 태도를 비판적으로 논평하곤 합니다만, 『갈릴레이의 생애』에서는 이러한 노래가 처음부터 끝까지 생략되어 있습니다. 대신에 모든 장의 서두에 사건의 내용이 요약되어 있다는 점으로 우리는 서사극의 부분적 요소를 감지할 수 있을 뿐입니다.

 

브레히트의 연극에서 언제나 강조되는 특성들 (변증법, 교수법, 명징한 표현) 등은 소재로서의 갈릴레이의 삶 속에 이미 용해되어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었을까요? 이것들은 학자들의 생활에서 나타나는 토론 과정에서도 분명히 드러납니다. 아닌 게 아니라 전체적으로 고찰할 때 작품 속에서는 이른바 “토론” 내지 “논쟁”의 형태가 유독 강조되고 있습니다. 이러한 토론 내지 논쟁은 특히 제 8장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납니다. 코페르니쿠스의 새로운 시각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전통적 세계관 내지 기독교적인 세계관과 전적으로 대립하고 있습니다.

 

16. 작품의 영향: 브레히트의 『갈릴레이의 생애』는 현대 핵무기 시대에서 살아가는 자연과학자의 윤리에 관한 문제를 다시 한 번 고찰하게 해주었습니다. 사실 20세기의 많은 작가들이 자연과학자의 눈 먼 탐구욕 내지 그들의 고뇌를 문학적으로 형상화하였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문제를 다룬 작품으로서 뒤렌마트의 극작품인「물리학자들 Die Physiker」(1961), 하이너 킵하르트 Heiner Kipphardt의 기록극,「오펜하이머 사건」 (1964) 그리고 크리스타 볼프의 소설, 『원전 사고 Störfall』 (1986)등을 들 수 있습니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브레히트는 『갈릴레이의 삶』을 통해서 자연과학의 연구가 그야말로 양날의 칼이며 판도라의 상자일 수 있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먼저 경고해 주었습니다. 왜냐하면 자연과학의 연구는 우리가 살아가는 핵무기 내지 핵에너지의 시대를 염두에 둘 때 인류의 행복을 증진시킬 수 있을 뿐 아니라, 동시에 인류를 순식간에 극악한 파국으로 몰아넣을 수 있는 행위이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