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 Brecht

서로박: 브레히트의 코리올란

필자 (匹子) 2019. 8. 10. 11:09

브레히트는 1948년 비교적 늦게 동독에 정착했습니다. 구동독은 그에게 극장과 일자리를 제공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집필과 극작품 공연에 몰두할 수 있었습니다. 브레히트는 사회주의 재건과 관계되는 소재에 매달리지 않았습니다. 진정한 의미의 사회주의 작가라면, 과거의 문화적 유산을 시민주의라는 이유로 모조리 배척할 게 아니라, 유산 가운데에서 옥석을 가려야 한다고 믿었습니다. 나아가 사회주의 재건보다도 당면한 작업은 파시즘이라는 독소의 청산이라고 판단했습니다. 바로 이러한 까닭에 브레히트는 현대에 살아가는 노동자의 문제를 문학적으로 형상화시키는 대신에, 역사적 소재를 다루기로 작심하였습니다. 이러한 작업을 통해서 이전의 역사 속의 문제점을 냉철하게 투시할 수 있다는 게 극작가의 지론이었습니다. 브레히트는 1925년, 그의 나이 27세 때 베를린에서 에리히 엥겔 (Erich Engel)이 연출한 셰익스피어의 비극작품을 감상하고, 깊은 영향을 받은 바 있었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코리올라누스”에 관한 소재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었습니다.

 

「코리올란」은 1952년과 1953년의 시기에 「가정교사」의 개작과 함께 집필되었습니다. 이전에 셰익스피어는 리비우스와 플루타르코스의 문헌에 근거하여 극작품을 완성시켰는데, 이는 어떤 개작을 필요로 한다고 브레히트는 믿었습니다. 그러나 이 작품은 원고로 남겨졌을 뿐, 브레히트의 생전에 공연되지 못했습니다. 작품은 1962년 9월 22일에 프랑크푸르트의 극장에서 초연되었습니다. 브레히트는 “이미 역사 서적에서 밝혀진 바 있는 어떤 역사적 내용을 극작품으로 다루어봄으로써, 여기서 투영되는 어떤 변증법적인 요소를 체험”하려고 의도했습니다. 보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브레히트는 주인공의 유아독존적 영웅주의 내지 세계의 변화를 간파하지 못하는 주인공의 자만심을 비판하려 했습니다. 이제 당신을 위해서 작품의 내용을 살펴보기로 합니다.

 

기원전 488년 로마의 천민들은 스스로 자신의 권력을 행사할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리하여 그들은 그들의 고유한 자기 결정을 위한 권한을 관철시키기 위하여, 로마의 원로원에 대표자를 보내려고 획책하였습니다. 말하자면 국가는 인민과 어떤 문제에서 대립하고 있습니다. 브레히트는 바로 이 문제를 작품 속에 부각시키고 싶었습니다. 그리하여 셰익스피어의 작품 속의 무기력한 호민관 시키니우스 그리고 브루투스 등에 어떤 보다 강력한 이미지를 부과하고 싶었습니다. 그렇게 해야만 계급 갈등의 문제가 더욱 생생한 문제로 다가오리라는 것이었습니다.

 

실제로 브레히트의 작품은 극적 과정을 고려할 때 셰익스피어의 그것과 현저한 차이점을 보여줍니다. 천민들은 국가에 대항하여 폭동을 일으키려 합니다. 로마 제국은 호민관들을 선정하여, 이들의 요구사항을 부분적으로 달래주고, 갈등을 무마시키려고 합니다. 그렇지만 로마의 도시 귀족, 카이우스 마르키우스는 국가를 위협하고 있는 천민들을 진압할 만반의 준비를 끝냈습니다. 그가 다름 아니라 주인공, 코리올란입니다. 그렇지만 로마가 폴스커 지역 인들과 마찰을 빚었을 때 코리올란은 천민들에 대한 무력 진압의 계획을 일단 연기합니다. 왜냐하면 외부 세력과의 갈등이 우선적으로 해결되어야 했기 때문입니다. 언제나 그러하듯이 외부와의 전쟁은 서로 다른 이해관계에 얽혀 있는 내부 사람들을 결속시키도록 작용합니다. 로마의 천민들 역시 위대한 전사 코리올란을 로마의 구원자라고 믿게 되었습니다.

 

다른 한편 코리올란 역시 천민들의 도움이 없이는 도저히 전쟁을 치를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대부분의 군인들은 일반 사람들에 의해서 차출되어야 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누구보다도 천민들의 태도에 있었습니다. 그들은 전쟁에서 승리하든 패배하든 간에 그들의 권리를 잃어버릴 게 불을 보듯 뻔했습니다. 그런데도 천민들은 승리 이데올로기에 도취하여 다음의 사항을 전혀 깨닫지 못합니다. 즉 장군, 코리올란에게 더욱더 거대한 권력이 주어지면, 그의 서슬 푸른 칼은 나중에 천민들에게 향하게 되리라는 사항 말입니다. 어리석은 대중들은 그를 집정관으로 선출합니다.

 

전쟁이 끝난 뒤에 코리올란은 나중에 자신의 본색을 드러냅니다. 그는 로마의 천민들에게 조소를 터뜨리고, 억압을 가하겠다고 위협합니다. 이때 호민관들은 코리올란의 원래의 계급적 관심 그리고 그의 저의 등을 로마 사람들에게 알려줍니다. 다시 말해서 코리올란은 폴스커 사람들과의 전리품을 독차지하려고 곡물 창고를 장악하려 하며, 나아가 모든 로마 사람들에게 폭력을 휘두르리라는 것이었습니다. 호민관들은 드디어 천민들의 지지를 받게 됩니다. 그들은 천민들과 함께 코리올란을 탄핵하여, 그를 폴스커 사람들이 사는 곳으로 추방시키려고 합니다.

 

사태를 간파한 코리올란은 폴스커 사람들과 자신의 추종자들과 함께 로마로 향해 진격해 옵니다. 그는 자신으로부터 등을 돌린 로마 그리고 천민들에 대해 끔찍한 살육으로 보복하려고 결심합니다. 말하자면 코리올란의 적(敵)은 폴스커 지역의 외부 사람들도 아니고, 로마의 귀족들도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적은 그를 지지하며, 폴스커 사람들과의 전쟁을 지지했던 천민들로 판명됩니다. 셰익스피어의 극에는 코리올란의 어머니 볼룸니아 (Volumnia)가 주인공을 설득하여, 도주하는 것으로 묘사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브레히트는 이와는 달리 다음과 같이 묘사합니다. 즉 볼룸니아는 아들의 행위를 논평하면서, 아들의 행위를 과감하게 질책합니다. “너는 지금 출병할 때와는 전혀 다른, 어떤 로마로 향해 진격하고 있어. 이를 알아야 해. 너는 이제 얼마든지 다른 사람과 교체될 수 있어. 만인에게 끔찍한 위협을 가하는 존재가 바로 너란 말이야.

 

마지막에 코리올란은 로마 국가의 이름으로 결국 처형당합니다. 호민관들은 원로원에 신청서를 제출하여, 이른바 위대하다고 하는 코리올란의 명예를 실추시켜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모든 것이 끝나고, 인민의 호민관은 자신의 의도를 완전히 관철시키게 됩니다. 브레히트는 코리올란이라는 작품을 통해서 어쩌면 다음과 같은 사항을 지적하려고 했는지 모릅니다. 그 하나는 천민들의 갈팡질팡하는 태도입니다. 천민들은 눈앞의 이득에 눈이 멀어 있으므로, 때로는 권력자를 옹호하며, 때로는 권력자로부터 등을 돌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작품 속에서 천민들의 태도를 변화하도록 조종한 사람은 호민관들이었습니다. 브레히트가 작품을 통해서 지적하고 싶었던 다른 하나는 다음과 같습니다. 즉 주인공을 망친 것은 자만심, 꽉 막힌 경직된 사고였습니다. “내가 아니면, 어떠한 문제도 해결되지 못한다.”는 과신이 결국 코리올란을 비극으로 몰아넣었던 것입니다. 이로써 브레히트는 궁극적으로 사회주의 국가 내의 개인숭배에 대해 은밀하게 비판하려 했습니다.

 

 브레히트가 죽은 뒤에 베를린 앙상블의 후임자 만프레트 벡베르트 (M. Wekwerth), 요아힘 텐셰르트 (J. Tenschert) 등은 브레히트의 미완성 원고를 1623년의 셰익스피어 원고와 비교하면서, 새롭게 개작하였습니다. 이때 그들은 막의 구분을 과감하게 생략하고, 발라드의 서술 방식을 도입하여, 극중 상황 및 과정을 신속하게 진행되도록 조처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들의 개작에는 문제점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가장 결정적인 문제점은 브레히트의 미완성 작품보다, 셰익스피어 원작이 더 많이 고려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예컨대 비련의 극작가 JMR. 렌츠가 시도한 1774년과 1775년 사이에 셰익스피어의 극의 독일어 미완성 번역 작품을 인용하였으며, 심지어는 셰익스피어의 「맥베스」그리고「안토니오와 클레오파트라」에서 많은 문장을 채택하였습니다.

 

실제로 브레히트의 「코리올란」에 나타나는 천민들의 우왕좌왕하는 모습은 1950년대 초의 동베를린 노동자들의 근시안적 태도 내지 이들의 불만 등을 연상시킵니다. 50년대 초 구동독이 노동의 생산성을 높이기 위해서 그들에게 하루 10시간 이상의 “잔업”을 요구하였습니다. 이때의 시간 외 수당은 지급되지 않았습니다. 결국 이러한 불만은 1953년 6월 17일 동베를린 노동자 데모로 표출되었던 것입니다. 노동자들은 그들의 대변인으로서 브레히트를 지목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브레히트는 이에 대해 소극적 태도를 취했습니다. 이에 관해서 나는 책과 논문에서 언급했기 때문에 자세한 설명을 생략하기로 합니다. 어쨌든 귄터 그라스는 「천민들 반란을 시험하다 (Die Plebejer proben den Aufstand)」(1966)라는 극작품을 발표하면서, 브레히트의 이른바 교활한 태도를 비아냥거린 바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