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 Brecht

서로박: 브레히트의 전나무

필자 (匹子) 2019. 4. 10. 18:07

친애하는 J, 당신은 시인 지망생입니다. 당신을 위해서 오늘은 브레히트의 단시를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브레히트는 50년대에 짧은 시를 즐겨 썼습니다. 이것들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것이 바로 『부코 비가』 연작시입니다. 오늘은 연작시 가운데, 전나무들이라는 시를 감상하려고 합니다.

 

 브레히트는 일본의 전통적 2행시인 하이쿠에 대해서 무척 커다란 관심을 기울였습니다. 브레히트를 매혹시킨 것은 다음과 같은 사항이었습니다. 즉 단시 속에는 기발한 관찰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가령 다음과 같은 구절을 생각해 보십시오. “떨어지는 꽃잎 하나가/ 자신의 가지로 되돌아 날아가지: 어느 나비. (Die abgefallne Blüte fliegt/ zurück an ihren Ästen/ Ein Schmetterling)” 짤막한 시구 속에 우리는 참으로 많은 것을 담을 수 있습니다. 운동장에 떨어진 유리 조각을 바라보고, “지구가 구멍 뚫려, 거기로부터 빛이 솟는다.”고 표현하는 경우를 생각해 보십시오. 이렇듯 기발한 착상 속에는 의인화된 표현이 많습니다. 남한의 시인 정대구의 시편들 가운데 「낙엽」이라는 시가 있는데, 한 행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센티한 게 먼저 떨어진다.” 이렇듯 기발한 시적 착상을 표현하는 방법으로서 당신은 무엇보다도 인간의 시각, 청각 그리고 후각 촉각 등을 최대한 활용해야 하며, 관점의 변화를 과감하게 시도해야 할 것입니다.

 

 

 

 

 

전나무들

 

 

 

이른 시기에

 

전나무들은 구리 빛이다.

 

그렇게 나는 그것을 보았다,

 

반세기 전에

 

두 세계 대전 이전에

 

젊은 눈으로써.

 

 

 

Tannen: In der Frühe/ Sind die Tannen kupfern./ So sah ich sie/ Vor einem halben Jahrhundert/ Vor zwei Weltkriegen/ Mit jungen Augen.

 

시가 말하는 내용은 무엇일까요? 아침의 빛을 받으면 전나무들은 모조리 구리 빛으로 환하게 비친다는 말인가요? 아니면 아침 여명 속에서 특정한 나무들이 구리 빛으로 비친다는 말일까요? 첫 번째의 경우는 어떤 정의를 위한 문장이라면, 두 번째의 경우는 시인이 아침에 발견하게 된 순간적 착상을 가리킵니다. 우리는 여기서 후자를 중시해야 할 것입니다. 시적 자아는 반세기 전에, 다시 말해서 50년 전에 몇몇 전나무들은 구리 빛으로 비쳤다는 것을 그는 의식합니다. 그것도 두 차례의 세계 대전 이전에 시적 자아는 전나무를 바라보았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시인이 두 차례의 세계 대전을 직접적으로 겪었든지, 간접적으로 체험했다는 점을 알 수 있습니다.

 

또 한 가지 사항을 우리는 간과할 수 없습니다. 시적 자아는 과거에 전혀 부담감을 지니지 않은 채, 희망에 가득 찬 채 전나무를 바라보았을 것입니다. 붉은 “구리” 빛을 띠는 전나무는 참으로 아름다웠을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나이든 지금 “이미 본 것”을 다시 바라보게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과거의 시점과 현재의 시점 사이에는 50년이라는 세월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젊은 시절에 바라본 전나무는 현재 바라본 전나무의 상과 분명히 다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적 자아는 “그렇게” 바라보았다고 서술합니다. 이는 분명히 모순이 아닐 수 없습니다.

 

시는 분명히 순간적 인상을 담고 있습니다. 현재 시인이 바라보는 전나무의 모습은 과거에 그것들을 바라보았던 그것들의 모습을 기억하게 합니다. 시적인 역설을 다시 한 번 기술해 보겠습니다. “현재 바라보는 전나무는 과거에 시인이 바라보았던 전나무의 모습과 동일하다.” “현재 보이는 전나무는 과거에 고찰했던 전나무와 다르다.” 이러한 역설은 근본적으로 “본다 (sehen)”는 데 대한 어떤 차이 때문에 비롯되고 있습니다. 시적 자아는 시각적으로 구리 빛으로 비치는 전나무를 인지합니다. 그 다음에 50년 전에 바라보았던 구리 빛 전나무를 환기해 냅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다음의 사항입니다. 즉 순수하게 시각적으로 인지한 상 자체가 결코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점 말입니다. 다시 말해서 인간의 인지 행위는 인간 자신의 개별적 경험의 맥락과 결코 무관하게 행해지는 것은 아닙니다. 솥뚜껑을 바라보고 순간적으로 이를 자라라고 생각하는 자는 다른 사람에 비해서 자라에 대한 특별한 경험을 지니고 있습니다. 자라에게 물렸거나 그렇지 않으면, 과거에 자라에 관해 어떤 무엇을 경험했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서 자라에 관한 상이 자주 떠오르지는 않습니다.

 

 

친애하는 J, 바로 그것입니다. 단순한 시각적 인상을 전혀 다른 의미로 인지하게 하는 것은 바로 인간의 개별적 경험입니다. 자신이 어떻게 살았는가에 따라서 인지되는 사물들 역시 조금씩 달리 수용됩니다. 두 번의 끔찍한 세계대전 이전에 순수한 눈으로 바라본 전나무는 과거와 동일하게 구리 빛으로 인지되지만, 전나무에 대한 시인의 두 가지 상은 근본적으로 서로 다릅니다. 어쩌면 벌겋게 달아오른 전나무의 모습은 시인의 마음속에 불에 타죽은 동료를 떠오르게 했는지 모릅니다. 그게 아니라면, 화염 속에서 불타오르는 숲의 모습을 떠올렸는지도 모릅니다.

 

지금까지 언급한 바를 요약해보기로 합시다. 시인은 다시 한 번 전나무를 바라봅니다. 전나무에 대한 순간적 인상은 어쩌면 마지막으로 떠오른 것일지도 모릅니다. 아니면 시인은 오래 시간이 경과한 다음에 전나무를 다시 바라보고 있습니다. 시적 자아는 구리 빛의 전나무를 새롭게, 새로운 의식으로 바라봅니다. 그렇지만 그의 시각은 복합적입니다. 다시 말해서 그것은 과거 약 50년 전에 바라본 그것일 수 있으며, 나아가 새로운 의식이 가미된 것일 수 있습니다. 복합적 시각 속에 담긴 전나무에 대한 두 가지 상들은 동일할 수 있으며, 어떤 차이를 함축하고 있습니다. 시인은 다만 “그렇게” 전나무를 바라봅니다.

 

전나무는 독일에서 서식하는 나무입니다. 성탄절이 다가오면, 사람들은 전나무를 크리스마스트리로 장식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습니다. 전나무는 독일을 상징하는 나무로서, 브레히트는 과거의 독일과 변화된 독일 사이의 위화감을 표현하고 있다고 말입니다. 친애하는 J, 위의 시는 어떤 또 다른 주제를 함축하고 있을까요? 철학자 헤겔 (Hegel)의 방식으로 말해봅시다. 자고로 시는 그 자체 암호입니다. 시어가 대자 존재를 거쳐서 즉자 존재로 이행되려면, 우리는 오랜 숙고의 과정을 거쳐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