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 문학 이론

서로박: 아리스토텔레스의 시예술에 관하여

필자 (匹子) 2022. 3. 12. 17:32

아리스토텔레스 (B.C. 384 - B.C. 322)의 "시 예술에 관하여 (Peri poietikes)" (일명 "시학")는 기원전 335년경에 집필되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문헌은 중세에 사라졌다가, 1481년 베니스에서 발췌 본으로 처음 간행되었다. 누군가 아라비아어의 원전을 발췌하여 부분만 라틴어로 번역했다. 1498년 베니스에서 라틴어로 다시 출간되었으며, 1508년에 그리스 원어로 간행되었다. 독일어판은 1753년 하노버에서 간행되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은 대중을 위해 집필되지 않았다는 점에서 신비로운 철학 서적으로 간주된다. 제 1권은 미완성으로 남아 있고, 희극에 관한 내용을 담고 있는 제 2권은 안타깝게도 유실되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모든 문학 작품을 “미메시스 (모방)”라고 명명한다. 그러니까 미메시스는 비극작품에서는 이상화되고, 희극 작품에서는 희화화되며, 서사시에서는 현실주의적 초상화로 묘사된다고 한다. 시인은 [서사시 혹은 酒神 頌歌 (Dithyrambos)에서] 시적 내용을 수정하는 자로 등장하고, 극작품에서는 무대에서 직접적으로 연기하는 사람으로 등장할 수 있다고 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극작품의 두 개의 주요 형태인 희극 작품과 비극 작품을 역사적 발생론적으로 문학의 이전 형태에서 추출하고 있다. 제 1권에서 그는 (유실되고 없는 제 2권의) 희극에 관한 내용을 미리 약술하면서, 주로 비극에 관해 언급한다.

 

비극의 핵심적 정의는 다음과 같다. “비극은 어느 특정한 위대성에 관한 행위를 매혹적인 언어 표현을 통해, 좋게 그리고 그 자체 폐쇄적으로 모방한 것이다. 이를 형성시키는 수단은 개별적 단락에서 다양하게 원용될 수 있다. 행위에 관한 모방은 어떤 알림이나 보고에 의한 것은 아니라, 어떤 탄식과 전율을 불러일으키며, 이로써 관객은 그와 같은 흥분 상태로부터 하나의 순화를 획득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비극을 위해서 내적 개연성과 일치성을 요구한다. 이러한 요구는 호라티우스의 중개로 근대 시학의 전통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바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극작품 내 행위의 특징으로서 세부적 사항을 기술하고 있다. 가령 엉클림의 복잡화 (Desis), 해결 (Lyris), 극작품속의 전환 (Peripetie), 재인식 (Anagnorisis) 그리고 파국 등을 들 수 있다. 아울러 드라마의 상이한 부분이 다음과 같이 기술되고 있다. 프롤로그, 시작되는 합창 (Parodos), 에피소드, 서서 노래하는 합창 (Stasimon), 그리고 끝나는 합창 (Exodos) 등.

 

제 20장에서 22장까지 아리스토텔레스는 개별적 음절로부터 완성된 문장까지의 기술하면서, 수사학적 특징 및 이에 관한 정확한 사용 등을 논하고 있다. 마지막 23장부터 26장까지 그는 서사시에 관해 기술한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서사시가 비극과 어떠한 유사성을 지니고 있으며, 어떻게 비극과 구분되어야 하는가? 하는 물음이 논의되고 있다.

 

아리스토텔레스 시학의 세 가지 핵심적인 측면은 -플라톤의 ("국가 (Politeia)" 그리고 "향연 (Symposion)"에 나오는) 문학에 관한 구상과 비교해보면- 명확하게 설명될 수 있다. (1.) 플라톤에 의하면 문학 작품은 역시 현실에 대한 모방이긴 하나, 이념의 세계를 모사한 상에 불과하다. 문학 작품은 플라톤에 의하면 진리에 관한 두 단계로부터 멀어져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념의 영역 그리고 인지 가능한 현실의 영역 사이의) 플라톤적 구분을 관여의 이념으로 전복시킨다. 그러니까 모방된 현실은 이념에 관여하고 있으며, 나아가 모방된 현실 속에 (내적 형식 원칙으로서의) 어떤 배아 (Entelechie)로서 내재하고 있다. 이러한 사고는 문학 작품의 가치를 높이 평가하도록 작용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비록 미메시스라는 유일한 원칙을 신봉했지만) 문학 작품이 더 이상 어떤 단순한 모사로서의 모사로 국한될 수 없다고 믿었던 것이다.

 

(2) 플라톤은 문학 작품을 자신의 이상 국가에서 배제시켰다. 왜냐하면 그것은 인간의 저열한 힘을 부추기게 하고, 그의 열정을 선동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플라톤의 이러한 예술 적대주의에 반해, 아리스토텔레스는 카타르시스의 영향 미학적 모델을 발전시킨다. 인간은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하면 흥분과 열정의 배출을 통해서, 또한 비극을 통해서 과도한 정열로부터 스스로를 해방시킬 수 있다.

 

(3) 플라톤은 문학 작품, 특히 신화적 전통을 거짓된 것으로 배척하였다. 이에 반해 아리스토텔레스는 여러 신화들을 인간의 보편적 태도의 표현으로, 상징으로 해석하였다. 그러니까 신화들을 자구적으로 수용하지 않음으로써 그는 플라톤의 비판으로부터 빠져나올 수 있었던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은 호라티우스의 "문학예술에 관하여"에 간접적으로 영향을 끼쳤다. 이탈리아 르네상스시기에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은 다시금 적극적으로 수용되었다. 인문주의자들은 이를 문헌학적으로 연구하고, 주석을 달며, 여러 언어로 번역하기도 하였다. 그럼에도 아리스토텔레스의 전성기는 아무래도 프랑스 의고전주의 시기라고 말해야 할 것 같다. 가령 코르네유의 극작품에 관한 세편의 논문 (Trois Discours sur le Poème Dramatique)을 생각해 보라.

 

독일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마르틴 오피츠 그리고 토마스 고트셰트에게 영향을 끼쳤다. 이들은 비극에 관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서술을 하나의 규범적 철칙으로 고착시켰다. 가령 (이들이 말한) 연극의 삼 일치 이론 (행위, 시간, 장소 등의 일치)에 관한 도식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에서는 전혀 찾아볼 수 없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비극 이론은 레싱에 의해서 놀랍게 변형되었다. 가령 레싱은 "함부르크 연극론"에서 “ελεος (측은지심)”과 “ϕόβος (전율)”을 제각기 “동정심 (Mitleid)” 그리고 “공포 (Furcht)”로 대치시키고 있다. 이런 유형의 숭고한 정서는 레싱의 계몽주의적이고 인간적인 시학과 조우 (遭遇)할 뿐, 고대의 시학 전통에 입각한 것은 아니다. 나중에 독일에서 질풍과 노도 운동이 도래하여, 모든 규칙이나 규범들이 거부되자, 고대의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적 전통 역시 의미를 상실하게 된다. 현대에 이르러 브레히트가 “반 아리스토텔레스 연극론”을 기술함으로써 그의 시학은 다시금 논의의 대상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