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 문학 이론

서로박: 야우스의 "미적 경험과 문학적 해석학"

필자 (匹子) 2022. 5. 16. 11:09

 

 

 

베를린 자유 대학의 아름다운 옆 모습

 

한스 로베르트 야우스 (1921 -1997)의 책은 1977년 프랑크푸르트에서 발간되었으며, 1982년에 확장본으로 속간되었다. 야우스의 이론적 출발점 가운데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본서의 서문에서 제기되고 있는 미적 경험에 관한 연구이다.

 

야우스는 미적 향유의 개념을 흔히 미적 경험이라고 이해하고 있는 내용에 결부시키려고 한다. 그는 우선 아도르노의 부정성의 미학에 대해 날카롭게 비판한다. 왜냐하면 아도르노에 의하면 문학 작품이란 오직 다음의 조건에 한해서만이 어떤 긍정적인 사회적 기능을 지니게 된다고 한다. 가령 자율적 예술 대상으로서 사회적 지배 구조를 부정하고 사회적 근원으로부터 벗어날 경우에 한해서 그러하다. 다시 말해 예술의 사회적 요소는 아도르노에 의하면 사회의 부정에서 비롯한다고 한다.

 

이러한 이론에 대해 야우스는 미적 향유의 순간들을 (이에 대한 패러다임으로서의 동일성을 들 수 있는데) 미적 경험의 가장 중요한 요소로서 복원시키고 있다. 아도르노의 부정의 미학에 의하면 미적 향유의 순간들은 기껏해야 센티멘탈한 무엇 혹은 단순한 유토피아적인 것에 불과하다. 왜냐하면 그것은 문화 산업으로부터 필요성의 조작을 위한 수단으로 도입될 수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미적 경험이란 아도르노에 의하면 대리 만족의 수단일 뿐이다.

 

 

 

한스 로베르트 야우스 교수의 생전의 모습 

 

 

야우스는 아도르노가 미적 성찰의 퓨리즘이라고 경시한 것 (미적 경험은 퓨리즘에 반사된 아름다움의 빛깔과 같이 허황하다)을 새롭게 옹호한다. 야우스는 이때 미적 경험의 사변적 측면과 실천과 관련된 측면을 구분하여, 역사적으로 그리고 분석적으로 세가지 분석 수단을 도입하고 있다. 그것은 이를테면 시적인 것 (Ροιησις), 인지적인 것 (Λισθησις), 순화적인 것 (Κάθαρσις)으로 나뉘어진다.

 

“시적인 것”은 (아리스토텔레스적 의미에서의) 고유한 창조적 능력을 실행할 때 그리고 스스로 작품을 창조할 때 느끼는 향유를 기술한다. 미적 경험의 이러한 생산적 형태는 예술에 대한 헤겔의 규정과 일치하는 것이다. 헤겔에 의하면 인간은 이 세상을 고향처럼 느끼려는 자신의 보편적 필요성을 획득하기 위하여 예술 작품을 창조한다는 것이다. 야우스에 의하면 예술가가 외부 세계에서 낯설음을 받아들임으로써 그것을 고유의 생산물로 만들어낸다. 그리하여 예술가는 이러한 행위속에서 한편으로는 개념과 구분되는 지식을, 다른 한편으로는 합목적적 실천과 구분되는 지식을 얻게 된다고 한다.

 

두 번째 카테고리인 “인지적인 것”은 야우스에 의하면 다음과 같이 규정된다. 그것은 인식하는 바라봄 그리고 바라보는 재인식 등으로 인한 미적 향유이다. 그러니까 인지적인 것은 미적 기본 경험 가운데에서도 수용적 부분과 관련된다.  예술 대상에 대한 향유적 수용은 어떤 “상승하는, 탈개념화된 혹은 (슈클로프스키의 표현에 의하면) 소외를 통한” 바라봄으로서 파악되고 있다. 이때 감각적 인식은 개념적 인식보다도 더 높은 단계로 취급된다. 인지적인 것의 카테고리는 사회적 소외의 증가를 감안할 때 무엇보다도 비판적 의미를 지니고 있다. 왜냐면 그것은 비참한 소외 체험을 하나의 미적 인지의 언어비판적 창조적 기능으로 대치시키는 임무를 안고 있기 때문이다.

 

세 번째 카테고리인 카타르시스 즉 “순화적인 것”은 다음과 같다. 즉 그것은 말 혹은 문학 작품을 통해 고무된 자신의 정서의 향유를 지칭한다. 이때의 향유는 수용자에게서 불일치 혹은 자신의 정서의 해방으로 이어질 수 있다. 순화적인 것은 이로써 첫째로 미적 경험의 의사소통적 기본 기능을 형성한다. 그것은 제반 규범들에 관한 사회적 전달이라는 예술의 수단과 일치한다. 동시에 순화적인 것은 예술이 지니고 있는 자율성의 조건과 일치한다. 그것은 수용자들이 “낯선 향유속의 자기 향유”를 통하여 미적 판단력을 자유롭게 실천할 수 있도록 작용한다. 다시 말해 순화적인 것은 수용자들을 삶의 실천적 관심사로부터 해방시킨다.

 

아도르노는 부정의 미학을 통해서 수용자와 예술 작품 사이의 관계에서 동일성의 행위를 기껏해야 긍정적인 문화적 기능으로 축소화시키고 있다. 이에 비하면 야우스는 아주 분화된, 그러면서도 비판적 동일성의 틀의 범례를 체계적으로 기술한다. 야우스의 견해에 의하면 미적 향유의 경험은 “무엇에 대한 무엇을 위한 동시적 자유화”로 규정된다고 한다. 시적인 것은 (하나의 세계를 고유한 작품으로 형성시키는) 생산하는 의식을 서술한다. 인지적인 것은 (외부 그리고 내부의 현실을 인지를 새롭게 하는) 수용하는 의식과 일치한다. 순화적인 것은 어떤 상호주관적인 영역에 대한 주관적 경험을 개방시킨다. 이때 수용자가 고려된다. 작품속에 미리 표기된 행위적 규범과 관련하여 수용자는 동일성의 행위를 완성시키든가, 아니면 하나의 특정한 입장을 취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