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 문학 이론

서로박: 루카치의 소설의 이론

필자 (匹子) 2023. 3. 3. 09:12

"소설의 이론"은 루카치가 “거대 서사 (장편 소설)”의 형식에 관한 역사 철학적 시도이다. 이 작품은 1916년 "미학과 일반 예술학을 위한 잡지"에 간행되었다. 루카치의 이 문헌은 에세이와 비평의 시기 -헝가리어로 집필된 "영혼과 형식" 1910, 장르 미학적 출발점이 되는 (독일어로 집필된) "비극의 형이상학" 1911-의 연장선상에서 이해될 수 있다. 동시에 루카치의 상기한 문헌은 나중의 “거대 미학”을 정립하기 위한 중간 단계인 셈이다.

 

소설의 이론에서 루카치는 해석학적으로 다양하게 축적된 변형 과정을 도출해내고 있다. 이러한 변형 과정은 신낭만주의의 사고 구조 (슐레겔, 노발리스)로부터, 헤겔의 단계적 변증법, 키르케고르의 시기(時期)적 변증법, 솔거 (Solger)의 아이러니 구상 등을 거쳐, 딜타이, 베르그송 그리고 게오르크 짐멜의 생의 철학으로 이른다. 루카치는 한편으로는 “소설 이론이란 시학의 가장 중요한 과제이다”라는 딜타이의 동시대적 요구를 충족시키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프리드리히 슐레겔의 초기 낭만적 미학 이론을 재발견하고 있다. 슐레겔의 미학 이론에 의하면 장편소설의 철학은 점점 우주적으로 확장되는 비평의 순서에 있어서 그리고 미학적 장르 설계를 연구하는 데 있어서 최종점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장편소설이 -역사 철학의 삼 단계 (찬란한 과거 시대, 죄악의 시대, 구원의 시대) 가운데- 특히 중간 단계, 즉 “완성된 죄악의 시대” (피히테)의 제반 조건들을 상세히 표명하고 있는 한, 그것은 -루카치에 의하면 시대의 유형적 형태를 드러내고 있다고 한다. 가령 고대 그리스인들은 세계를 형상화시키는 방식을 세가지, 즉 서사시, 비극 그리고 철학 등으로 나누었는데, 루카치는 이 구분을 어떤 상이한 역사적 “변증법”의 틀속에 종속된 것으로서 고찰한다. 바로 이러한 변증법속에서 부분적인 산문의 장르가 세계의 부정적 특성을 담지해나가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장편 소설은 지붕 없는 (비참한) 상태를 표현하게 된다고 한다.

 

 

루카치는 이러한 방식으로 “장편소설은 역사의 결핍에서 탄생한 것일지 모른다”라는 (낭만주의 시인이었던) 노발리스의 추론을 입증하고 있다. 장편소설은 미메시스 기능과 병행하여 탄생하였다. 오늘날 어떤 완전한 현존재에 대한 의미를 수동적으로 그리고 시각적으로 받아들인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게 되었다. 이는 미메시스 기능의 상실을 뜻한다. 이는 가치 철학적이고 감각 구성의 토대에 까지 지대한 영향을 끼쳐 왔다.

 

사람들은 드라마와 거대 서사 (장편 소설)을 전자가 “밖으로 뻗어나는 삶의 총체성”이요, 후자가 “안으로 파고드는 본질적인 것의 총체성”이라고 지금까지 구분하였다. 루카치는 이러한 주장을 변화시켜서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즉 오로지 장편 소설은 “총체성의 지조”를 아직 고수하고 있을 뿐 아니라, 삶에 있어서의 보이지 않는 틈과 깊은 심연 그리고 방향 없는 인간 삶의 모습 등을 모조리 재현해준다고 한다.

 

따라서 우리는 문학 작품에서 스스로 창조된 환경을 접하게 되는데, 이는 “낯설게 된 복합적 의미”로서 그리고 “두 번째 자연”으로서 시적으로 더 이상 깊이 파고들거나 다시 획득할 수는 없다. 여기서 도출되는 소외의 개념은 헤겔에서 게오르크 지멜까지 이르는 영향사적인 노선에서 파악되고 있다. (여기서 마르크스주의적 입장은 거의 도외시되고 있다.)

 

그렇지만 소설속의 주인공은 슐레겔이 말한 낭만적 반어의 의미에서 세상의 어떤 특정한 문제를 보여준다. 이때 소설적 화자는 아이러니의 변증법을 통해서 기존의 모든 윤리적 판단이나 선입견을 배제하는 기능을 지닌다. 화자의 다양한 시각적 복합성은 소설속에 내재하고 있으므로 배후에서 소설의 평형을 유지하게 해준다. 이로써 루카치는 초기 낭만주의자들이 처음 떠올린 “자기 창조와 자기 파괴의 끊임없는 변환”을 형상화하고 있다. 여기서 루카치는 “체험 시간 (duree)”이라는 베르그송의 구상을 끌어들이고 있다. 즉 현대 장편소설은 모든 공간화된 시간적 상상에 대항하는, “지속성”으로서의 시간적 진행을 표현해야 한다는 것이다.

 

 

결국 루카치는 두 번째 단계로부터 세 번째 단계로 이전되는 위기를 고찰한다. 톨스토이가 이러한 시대적 변환을 어떤 작은 놀라운 순간속에서 예견했던 반면에, 도스토예프스키는 이미 그것을 단순히 고찰한 현실로서 묘사했다고 한다. 여기서 유토피아적인 것을 실존하는 무엇으로 형상화시키려는 시도는 중요하지 않다. 오히려 도래하는 무엇의 표시는 어떤 전체적 상속으로 삽입되어야 한다.

 

예견의 방식은 어떤 가능성의 개념과 결부되어 있다. 이는 오직 모든 변형적 카테고리 (현실, 가능성, 우연성, 필연성)의 맥락속에서 판단될 성질의 것이다. 루카치는 어떤 새로운 세계가 도래하리라는 역사 철학적 예견을 나중에 "역사와 계급 의식" (1923)에서 마르크스주의와 동일한 것으로 간주했다. 루카치가 생각한 인물들은 주어진 현실에서 활약하는 실제 인간의 고뇌와 희망을 반영한 게 아니라, 기껏해야 어떤 가상적인, 더욱 복합적인 과거 현실에서 추론된 것들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