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 동구러문헌

서로박: 프로이트의 '도스토예프스키와 아버지 살해' (2)

필자 (匹子) 2020. 9. 11. 10:43

7. 아버지에 대한 애증: 도스토예프스키의 발작은 죽은 자와 동일하게 되려는 무의식을 반영합니다. 소년은 내심 아버지가 죽기를 애타게 갈구했습니다. 히스테리라는 이름의 발작은 미워하는 아버지가 죽기를 갈망하는 데에서 비롯한 것입니다. 이는 프로이트에 의하면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와 관계됩니다. 아버지를 적대시하는 배후에는 아버지에 대한 애정 역시 담겨 있습니다. 아이는 아버지를 찬미하나, 동시에 아버지를 증오합니다. 아이는 자신이 아버지로부터 거세당할지 모른다는 두려움에 휩싸입니다. 거세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아이는 아버지를 제거하고 어머니를 소유하려는 욕구를 견지합니다. 이는 죄의식을 낳게 됩니다.

 

이로써 무의식 속에 가라앉는 것은 아버지에 대한 사랑과 증오라고 프로이트는 주장합니다. 실제로 도스토예프스키에게는 처음부터 아버지에 대한 애증이 도사리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성향은 동성애의 성향과 관계되는 것입니다. 이는 작가의 일기 그리고 중편 소설 등에서 많이 발견되고 있습니다. 프로이트는 다음과 같이 서술합니다. “무의식의 정신 활동을 지배하는 모든 것들은 의식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다. 아버지가 거칠고 잔인했다면, 아들은 초자아의 측면에서 가학적이 되고, 자아의 측면에서는 수동적이고 여성적으로 성장한다. 자아는 운명의 희생자로 드러나고, 아이는 죄의식이 가하는 가혹한 처벌 속에서 만족을 얻는다.” 아이는 의식적으로는 특이한 죄의식을 견지했고, 자학하는 여성과 같은 편향적 특성을 지니게 됩니다. 그러나 무의식적으로 그는 아버지를 살해하려는 순간적 파괴 충동을 드러냅니다.

 

8. 부친 살해의 욕구와 죄의식: 도스토예프스키에게는 양성의 소질이 주어져 있었다. 가혹했던 아버지에게 종속되지 않기 위해서는 격렬하게 자신을 보호해야 했습니다. 그가 지녔던 죽음의 징후는 자아에게는 자학적 충족이고, 초자아에게는 처벌을 위한 충족, 즉 가학적 충족이다. 다시 말해 전자는 “너는 아버지를 대신하여 죽는 중”이고, 후자는 “아버지가 너를 죽이고 있는 중”이라는 것입니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신경증 역시 아버지의 죽음에 대한 욕망과 관계된다고 합니다. 발작은 응징으로서 아버지의 죽음처럼 끔찍하고 두려운 것입니다.

 

그러나 한 가지 사항은 특이합니다. 발작의 전 단계에서 승리감 내지 쾌감을 느낍니다. 이렇듯 발작은 그에게 응징의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도스토예프스키는 아버지를 대신하는 존재가 자신을 처벌하도록 방임해 버립니다. 그는 아버지를 죽이고 싶다는 무의식적 욕망으로부터 결코 벗어날 수 없었습니다. 국가 그리고 신에 대해 자신의 행동을 결정한 것도 바로 자신의 마음속에 담긴 죄의식 때문이었습니다. 도스토예프스키는 특히 종교의 영역에서 비교적 자유로움을 견지할 수 있었습니다. 그는 그리스도의 이상을 통해서 죄에서 벗어나는 출구를 원했고, 자신의 고통을 내세우며 그리스도의 필요성을 주창하기도 했습니다. 기독교와 무신론 사이에서 끊임없이 방황한 것도 파괴 욕구와 죄의식 사이의 갈등 때문이었습니다.

 

9. 아버지 살해: 세계 문학사의 영원한 세 걸작, 소포클레스의 「오이디푸스 왕」, 셰익스피어의 「햄릿」, 도스토예프스키의 「카라마조프의 형제」가 모두 아버지 살해를 다루고 있음은 우연이 아닙니다. 소포클레스의 작품에서 주인공은 아무런 의도 없이 아버지를 살해합니다. 오이디푸스가 자신의 과오를 알게 되었을 때, 스스로 “운명의 장난” 때문이라고 자신에게 유리하게 변명하지 않습니다. 셰익스피어의 경우 사건은 간접적으로 발생합니다. 주인공 햄릿은 범죄자에게 복수하려고 하나, 그렇게 하지 못합니다. 복수극을 방해하는 것은 자신의 마음속에 자리한 어떤 놀라운 죄의식이었습니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소설은 이와는 약간 다릅니다. 주인공 드미트리는 아버지에게 살의를 품습니다. 그러나 살해자는 그의 배다른 동생, 스메르쟈코프였습니다. 도스토예프스키는 자신이 마치 아버지 살해자라고 고백하려고 하는듯이, 스메르쟈코프에게 자신의 이른바 간질 증세를 부여하고 있습니다. 또한 작가는 재판을 통해서 수사 과정을 조롱하고 있습니다. 어쩌면 누가 아버지를 살해했는가? 하는 문제는 작품에서 중요하지 않습니다. 모든 형제들은 죄인이었던 것입니다. 도스토예프스키는 범죄자에 대해 말할 수 없는 동질감을 느꼈습니다. 이는 동정의 수준을 넘어서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처음에는 정치범 종교 사범 등을 다루었습니다. 근원적 죄악인 아버지 살해를 다룬 것은 그의 말년이었고, 이로써 도스토예프스키는 문학적으로 고해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10. 도박 증세: 도스토예프스키는 생전에 도박을 즐겼습니다. 빚을 갚기 위해 도박을 계속했다는 것은 다만 핑계에 불과했습니다. 오히려 그는 돈을 탕진한 뒤에 병적인 만족감을 느꼈습니다. 거액을 잃게 되었을 때 마음을 짓누르던 말 못할 고통이 자라지는 데 대해 해방감을 느꼈던 것입니다. 도스토예프스키는 자신에게 욕설을 터뜨리고, 아내 앞에서 자신을 비하했으며, 아내로 하여금 자신을 경멸하게 했습니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아내는 다음과 같이 술회하였습니다. 남편의 창작이 가장 활발할 때는 모든 재산을 저당 잡혔을 때라고 말입니다. 왜냐하면 자신의 죄의식이 자신 스스로 가한 응징에 의해 해방되었을 때, 창작을 방해하던 금기가 사라졌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도스토예프스키의 도박에 대한 강박증은 어떻게 설명될 수 있을까요? 이에 대한 해답은 다음의 소설을 읽으면 저절로 풀린다고 합니다. 그것은 슈테판 츠바이크의 중편 소설 「한 여인의 24시간」입니다.

 

11. 도박과 자살 충동: 나이든 품위 있는 여인이 작가, 츠바이크에게 자신의 경험을 털어놓습니다. 그미는 과부로서 두 아들을 출가시키고 고독하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42세 되던 해에 모나코의 어느 카지노 앞에서 그미는 재산을 탕진한 젊은이를 만났다고 합니다. 젊은이는 깊은 절망감으로 금방 자살할 것 같았습니다. 여인은 어떻게 해서든 그의 자살을 막고 싶었습니다. 젊은이는 그미와 사랑을 나눈 뒤, 절대로 도박하지 않겠다고 약속합니다. 그미가 일부러 사랑을 요구했던 것입니다.

 

여인은 청년을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함께 여행을 떠나기로 약속했으나, 여러 가지 작은 일들로 인하여 그미는 기차를 놓치고 맙니다. 사라진 청년을 그리워하며 그미는 다시 카지노를 찾습니다. 놀랍게도 거기에 청년이 도박에 빠져 있었습니다. 청년은 여행 약속을 어기고, 다시 도박장을 찾았던 것입니다. 과부의 출현에 당황한 그는 빌려 받은 돈을 그미의 면전에 던지며, 꺼지라고 고함을 지릅니다. 결국 그미는 자리를 떠났는데, 나중에 청년의 자살 소식을 접하게 됩니다.

 

12. 도박 중독증과 자위행위: 도벽은 인간의 “자위행위 (Onanie)”와 무관하지 않습니다. 노름이란 어린이들이 방에 숨어서 성기를 만지작거리는 것과 동일합니다. 견딜 수 없는 유혹, 멍멍한 쾌감 이후에 자리하는 죄책감과 자괴감, 이 모든 것은 판이 바뀌어도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여인은 작품 속에서 어머니와 같은 존재입니다. 젊은이는 다음과 같이 생각합니다. “자위의 위험을 안다면, 어머니는 몸을 허락함으로써 나를 보호할 것이다.” 작품 속에서 청년은 여인을 창녀로 간주합니다.

 

독자는 작품에 등장하는 과부 여인의 돌발적인 행동에 대해 의구심을 품습니다. 어째서 정절을 지키며 살던 여인이 순간적 충동에 사로잡힐 수 있는가? 하는 게 그것입니다. 그러나 이는 다음과 같이 설명될 수 있습니다. 여인은 고인이 된 남편을 생각하며 계속 정절을 지켜왔습니다. 그러나 그미는 감시 받지 않는 어느 낯선 공간에서 아들로 향하는 사랑의 전이 현상을 떨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자고로 노름을 통해서 돈을 따는 경우는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자위를 통해서 완전한 성적 만족을 얻지 못합니다. 어쩌면 도스토예프스키는 자위에 대한 강박관념에 시달려 왔는지 모릅니다. 이러한 강박 관념이 그를 도박에 빠지게 했는지 모릅니다. 심각한 노이로제 증세 속에는 으레 사춘기 시절의 자위행위를 통한 경험이 담겨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