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세계 문화

아이아스와 트로이의 목마

필자 (匹子) 2021. 9. 27. 11:05

오늘은 아이아스와 트로이의 목마에 관해서 강의할까 합니다. 그리스 신화에는 아이아스라는 인물이 두 명 존재합니다. 우리가 언급하는 아이아스는 첫 번째 아이아스입니다. 두 번째 아이아스는 키가 작은 사람으로서 나중에 클리템네스트라의 정부가 되어, 그리스의 왕 아가멤논을 살해하는 인물입니다. 두 번째 아이아스 그리고 클리템네스트라는 아가멤논의 아들 오레스테스에 의해서 살해됩니다. 이는 나중에 다시 언급될 것입니다.

 

 

 

 

 

 

 

아이아스의 조각상입니다. 아이아스는 신장이 2미터 이상되는 거구였다고 합니다. 트로이 전쟁에서 트로이의 영웅 헥토르와 하루 종일 결투했는데, 결판이 나지 않았습니다. 아이아스와 헥토르는 상대방의 무공에 존경을 표하면서 그곳을 떠납니다. 아이아스는 자신의 방패를 헥토르에게 선물하고, 헥토르는 자신의 칼을 아이아스에게 선물합니다.

 

 

 

 

 

 

 

 

 

10년 이상 지속되던 트로이 전쟁이 어디서 발발했는가는 자명합니다. 도표가 이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정확히 언제 발발했는지는 의견이 분분합니다. 에포루스는 기원전 1135년에, 티마이오스는 기원전 1193년에, 에라토스테네스는 기원전 1184년에, 헤로도토스는 기원전 1230년에 발발했다고 기술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도시 국가 트로이는 기원전 12세기 중엽에 그리스 군대에 의해서 함락되었습니다. 확실한 것은 전쟁이 10년 동안 이어졌다는 사실입니다.

 

 

 

 

 

 

 

사진은 페트로클로스를 안고 비통해 하는 메넬라오스의 조각상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메넬라오스는 아이아스의 도움을 받고 페트로클로스의 시신을 구출할 수 있었습니다. 페트로클로스는 아킬레우스의 가장 친한 친구였는데, 트로이의 장수, 헥토르가 던진 창에 의해 목숨을 잃었습니다. 이 동상은 이탈리아의 피렌체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헬레나는 바람기 많은 여성이었습니다. 호메로스는 그미를 "(남성을) 유혹하는 암캐"라고 묘사한 바 있습니다. 아트레우스 왕가는 어떻게 해서든 그미를 누구와 결혼시켜 그미의 바람기를 잠재우고 싶었습니다. 왕족들은 제비뽑기를 통해서, 헬레나를 아내로 맞이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놀라운 것은 아무도 그미와 결혼하고 싶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아가멤논의 남동생인 메넬라오스가 결정됩니다. 그래서 그는 어쩔 수 없이 헬레나를 아내로 선택하게 됩니다.

 

 

 

 

 

 

트로이 전쟁은 헬레나에 의해서 발발했다고 해도 돠언이 아닙니다. 헬레나는 트로이의 왕자 파리스와 눈이 맞았습니다. 그런데 파리스는 신화에 의하면 세 명의 여신 가운데 가장 아름다운 여신을 선택할 권리를 얻게 됩니다. 아테네는 가장 훌륭한 방패와 무기를 제공했고, 헤라올리브의 땅을 제시했으며, 아프로디테는 그리스의 가장 아름다운 미녀를 소개시켜주겠다고 공언하면서, 각자 자신을 점지해주기를 바랍니다. 이때 파리스는 아프로디테를 가장 아름다운 여신이라고 판결을 내립니다. 왜냐하면 아프로디테의 제안이 가장 마음에 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파리스는 신화를 실제 현실로 착각하여 헬레나를 유혹하기 시작합니다. 헬레나 역시 메넬라오스와 결혼한 뒤 조신하게 살리라고 맹세했지만, 늠름한 파리스의 모습을 보자 가슴이 설레어 자신의 맹세를 저버리게 됩니다. 두 선남선녀는 서로를 탐한 다음에 이집트로 도주합니다.

 

 

 

 

 

 

 

 

그리스 왕궁에서 헬레나가 행방불명 되었습니다. 그미는 당시에 파리스와 함께 이집트에 머물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사실은 트로이 전쟁이 발발하게 된 결정적인 이유로 작용합니다. 그리스 권력자들은 "트로이의 왕자가 그리스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성을 납치했다."고 거짓된 소문을 퍼뜨려 그리스 장수들로 하여금 전쟁에 참가하게 부추겼습니다. 사실은 납치한 게 아니라, 헬레나가 자의에 의해서 파리스와 눈이 맞아서 몰래 이집트로 야반도주하였던 것입니다. 그런데도 그리스군은 헬레나를 찾아야 한다는 끔찍하고 강렬망령 내지 허상 때문에 10년 동안 트로이와 피비린내 나게 싸워야 했습니다. 물론 그리스에서 참전을 주장한 정치가들이 헬레나의 도주를 역이용한 것이었습니다.

 

 

 

 

 

 

 

 

 

 

 

사진은 트로이 영화의 한 장면입니다. 트로이 전쟁이 발발한 지 수년이 흐른 다음에 페트로클레스는 트로이의 장수 헥토르와 결투 끝에 죽여버립니다. 아킬레우스는 어떠한 일이 있더라도 친구의 죽음에 대해 복수하고 싶었습니다. 사진은 영화의 한 장면입니다. 트로이는 장수 헥토르를 잃게 됨으로써 수세에 몰리게 됩니다. 그러나 불세출의 영웅, 아킬레우스 역시 트로이 전쟁의 와중에서 안타깝게도 자신의 귀한 목숨을 잃게 됩니다. 그를 수호하는 여신 테티스도 그의 죽음 앞에서는 속수무책이었습니다. 아킬레우스가 사망한 뒤 그리스 군을 이끈 사람은 아이아스 그리고 뒤늦게 전쟁에 참가한 오디세우스였습니다. 오디세우스는 렘노스 섬에서 칩거하던 피록테트를 설득하여 그리스 군인들의 사기를 북돋웁니다. 왜냐하면 피록테트는 헤라클레스의 놀라운 활을 소지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신화에 의하면 아킬레우스의 상처입을 수 있는 부위는 오로지 아킬레스건이리고 합니다. 아킬레우스의 죽음에 관해서는 세 가지 버전이 있습니다. 1. 트로이의 공주 폴릭세나와 사랑을 나누다가, 아킬레우스는 장단지 부분을 다쳐 장렬하게 전사했디고 합니다. 2. 트로이의 왕 프리아모스와 폴릭세나가 헥토르의 시체를 요구하기 위해 아킬레우스를 만나는데, 이때 트로이의 왕자, 파리스가 뒤에서 활을 쏘아 아킬레우스를 죽였다고 합니다. 3. 트로이의 어느 장수가 활을 쏘아서 아킬레우스의 다리를 상처입히는데, 이 후유증으로 아킬레우스는 사망했다고 합니다.

 

 

 

 

아킬레우스의 죽음은 그리스 군영에 치명타를 가합니다. 이로써 그리스와 트로이는 소강 상태의 시간을 보냅니다. 사진은 아이아스는 애통해 하면서 아킬레우스의 시신을 그리스 군영으로 옮기는 그림을 찍은 것입니다. 왼쪽과 오른쪽의 두 사람은 영웅 아킬레스의 죽음에 통곡하는 가족 그리고 그리스 사람들의 애절함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오디세우스는 장수의 죽음을 비통해 하면서도, 아킬레우스의 죽음을 그리스 군의 사기 진작을 위한 계기로 활용하려고 합합니다. 

 

 

 

 

 아킬레우스를 지고 고통스럽게 울부짖는 아이아스. 아이아스와 오디세우스는 아킬레스의 명복을 빈 다음에 그의 투구와 칼을 제각기 자신이 차지하려고 합니다. 결국 투구와 칼은 오디세우스의 소유로 돌아갑니다. 아이아스는 그리스 군영 내에서의 이러한 결정이 부당하다고 생각하고, 마음속의 흥분과 노여움을 주체하지 못합니다.

 

 

 

 

 

아이아스는 바로 그 날 밤 아테네 여신의 농간으로 광증에 사로잡힙니다. 그는 광증으로 눈이 뒤집혀서 소떼를 오디세우스의 부하들이라고 착각하고 가축들을 몰살시킵니다. 그 다음에 그는 수컷 양을 오디세우스라고 착각하고 끝내 수컷 양을 살해합니다. 다음날 아침 자리에서 일어나니 자신이 도륙한 것은 오로지 가축들이라는 것을 비로소 깨닫게 됩니다. 수많은 그리스 군인들은 아이아스의 미치광이와 같은 만행을 접하고, 박장대소를 터뜨리면서 그를 야유하고 조롱합니다. 이때 아이아스의 자존심은 깊이 상처입습니다. 아이아스는 갈갈이 찢겨지는 통한의 고통을 도저히 감내하지 못합니다. 차라리 전쟁에서 전사했으면 전사했지, 전사들의 조롱을 도저히 참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자살하는 자는 자신의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서 목숨을 초개처럼 생각합니다. 자존감에 커다란 상처를 입은 아이아스는 자신의 고결한 명예를 지키기 위하여 스스로 목숨을 끊기로 결심합니다. 그는 헥토르가 선물로 건네준 장검을 해안가에 거꾸로 꽂습니다. 언젠가 그는 헥토르와 하루 종일 싸운 적이 있는데, 두 사람의 무예가 너무나 출중하여, 무승부를 연출하였습니다. 그래서 헥토르는 자신의 칼을, 아이아스는 자신의 방패를 상대방에게 선물했던 것입니다.  

 

 

 

 

강인한 무사는 명예를 죽음보다도 더 귀하게 여깁니다. 아이아스는 해안가에서 오로지 자신의 명예를 지키기 위하여 칼 위에 자신의 몸을 던져 자결합니다. 인간의 자존심은 죽음을 초개처럼 여기는 강인한 결단으로 표출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가 동물들을 도륙한 것은 근본적으로 아테네 여신의 계략이었기 때문입니다. 아테네 여신은 자신이 아끼는 영웅, 오디세우스를 무한정 도우려고 했던 것입니다. 여기서 아이아스가 아테네 여신의 간계를 알았는지 몰랐는지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나중에 소포클레스는 이를 작품 속에 은근히 반영하였습니다.) 몇몇 후세 사람들은 아이아스의 죽음을 어리석은 행위라고 안타까워했습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은 그의 자살을 "신의 계락에 항의하는 인간의 고결하고도 명예로운 마지막 선택"이라고 평가하였습니다.

 

 

 

 

 

뒤이어 트로이의 목마를 설명하려고 합니다. 트로이의 성은 그야말로 난공불락의 요새였습니다. 비록 해안가에 위치하여 그리스와 가깝지만, 작은 산정에 위치하고 있어서, 침략자는 힘들게 높은 곳으로 올라가야 합니다. 게다가 지도가 잘 보여주듯이 퇴로는 두 방향밖에 없었습니다. 트로이군대는 1년 치의 식량을 비축한 다음에 두 개의 길목만 지키면 족했습니다. 만약 수세에 몰릴 경우 성 안으로 피신하여 때를 기다리다가, 나중에 기회를 엿보다가 그리스 군을 격퇴키실 수 있었습니다. 이러한 요새의 성으로 인하여 트로이는 어렵지 않게 그리스 군대의 침공을 차단시킬 수 있었습니다.

 

 

 

 

사진은 트로이의 목마를 재구성한 모형입니다. 오디세우스는 난공불락의 트로이 성을 함락하기가 너무나 어려웠습니다. 왜냐하면 성은 너무나 견고하게 축조된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오디세우는갖춘 인물이었습니다. 강인하고 용맹스러운 장수였으며, 깊은 사고력과 지혜를  그는 지략을 이용합니다. 토로이의 왕, 프리아모스의 생일에 그리스는 생일 선물로서 트로이의 목마를 보냅니다. 목마의 배 안에는 날렵한 그리스 장수들이 몸을 숨기고 있었습니다. 트로이의 성 안에서 군사들이 술에 취해서 잠들고 있을 때 몇몇 그리스 전사들은 목마에서 나와서 성문을 여는 데 성공합니다. 이로써 10년 동안 이어졌던 트로이 전쟁은 막을 내립니다. 흔히 "트로이의 목마"는 컴퓨터의 바이러스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