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문학 이야기

서로박: 잉고 슐체의 '심플 스토리스'

필자 (匹子) 2020. 6. 11. 09:58

친애하는 S, 잉고 슐체는 전환기 이후의 시기에 활동한 독일 신진 작가들 가운데에서 가장 촉망 받는 작가로 손꼽힙니다. 적어도 단편에 있어서는 최고의 작가로 꼽아도 손색이 없을 정도이지요. 그의 작품집 『간단한 이야기들』은 전환기 시기의 동쪽 독일지역의 사회적 변환을 주제화하고 있습니다. 출판의 편집자는 “스토리”라는 영어식 표기를 고려하지 않고,『간단한 이야기들』을 하나의 장편이라고 명명하였습니다. 그렇지만 이것은 엄밀히 따지면 서로 연관된 단편 모음집이라고 표현하는 게 타당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러한 짧은 이야기 모음은 -영화 기법으로 설명하자면- 로버트 알트만 Robert Altman 감독의 「쇼트커트 Short Cuts」를 연상시키기 때문입니다. 알트만은 미국의 작가, 레이먼드 카버 Raymond Carver의 이야기를 짤막짤막하게 끊어서 영화로 만든 바 있습니다.

 

 

 

슐체는 레이먼드 카버의 소설을 탐독하면서, 2000년 7월 7일자 남독 신문에 기사를 발표하였습니다. “나의 원고가 끝났을 때 (행복의 33개의 순간들을 가리킴 - 역주), 레이먼드 카버의 작품을 읽은 것은 극히 우연이었다. 갑자기 귓속에서 어떤 소리가 맴돌았다. 그것은 내가 현재 현실과 나눌 수 있는 대화였다. 헤밍웨이 혹은 레이먼드 카버의 쇼트스토리의 방식으로 1998년 이후의 동쪽 독일 지역의 이야기를 전해야 하겠다고 여겨졌다.” 이로써 1998년에 발표된 것은 『간단한 이야기들. 동독 지방에서 유래한 장편 소설 Simple Storys. Ein Roman aus der deutschen Provinz』입니다. 소설의 관점은 처음부터 특이한 면을 부각시킵니다. 카메라의 위치가 자유자재로 바뀌듯이, 서술자의 관점이 종횡무진하게 바뀌는 것입니다.

 

 

 

Raymond Carver

 

작품은 주로 전환기 이후에 튀링겐 지역의 소도시, 알텐부르크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일상을 다루고 있습니다. 작품 속에는 스물아홉 개의 짤막한 이야기들이 제각기 독립적으로 서술되고 있습니다. 『간단한 이야기들』가운데 한 단락만 읽으면, 우리는 한 명 혹은 여러 명의 인물이 등장하여, 이야기의 주변 사항을 전해주는 것을 감지하게 됩니다. 그렇지만 등장인물은 이어지는 다른 이야기에 등장하거나, 그게 아니라면 사건과 결부되어 있지요. 다시 말해서 이야기의 내용은 서로 다르지만, 등장하는 인물들은 소설 전체를 고려할 때 상관관계를 이루면서 서로 얽혀 있습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작품을 전체적인 관점에서 하나씩 읽어내려야 비로소 작가의 소설적 의향 내지 관점 등을 종합적으로 이해할 수 있게 됩니다. 이는 작가가 독자에게 많은 것을 요구하고 있을 암시합니다. “나무를 보지 말고 숲을 바라보라.”는 전언은 세밀한 독서를 요하도록 자극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독자에게 처음부터 무언가를 강권하지는 않습니다. 개별적 이야기들은 독립적이지만, 상호 연관 관계 속에서 해석될 수 있습니다. 이게 바로 슐체 문학의 강점이기도 합니다.

 

 

슐체는 독일인들의 다양한 입장과 그들의 삶의 이야기를 문학적으로 형상화하였습니다. 두 개의 이야기만 제외하면 모두 구동독의 소도시 알텐베르크를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이를테면 어느 연구자가 대학에서 일자리를 잃어서, 여행가이드로 일하면서 생활비를 벌어야 하는 이야기, 구동독 시절의 어용 작가로 살던 지식인이 결국에는 알코올 중독자로 파멸하는 이야기, 저항 정신이 투철하던 동독 학교의 어느 교사가 심장 마비를 일으키는 이야기, 직장을 잃은 뒤 스트레스를 받다가 서서히 정신 이상의 증세를 드러내는 어느 교장의 이야기, 대로에서 네오 나치에 의해서 칼에 찔린 뒤에 병원에서 치료를 받은 후 재취업을 원하지만, 택시 회사 사장으로부터 일자리를 거부당하는 쿠바 출신의 어느 택시 운전사의 이야기 등을 생각해 보세요. 나아가 과거 구동독 시절에 당에 충직한 태도를 보였던 학교 교장과 결혼한 부인이 남편과 함께 이탈리아 여행을 떠났을 때, 어느 교사가 수년 동안 남편에게 당한 수모를 앙갚음하는 이야기, 자동차를 몰고 가다가 오소리를 덮친 여자가 정작 사고의 장소에는 부상당한 짐승을 발견하지 못하는 이야기, 자동차 사고로 목숨을 잃은 사람은 오소리가 아니라, 자전거를 타고 가다가 실수로 변을 당한 이야기 등을 생각해 보십시오.

 

 

 

이러한 이야기들은 단순한 해프닝으로 이해되는 게 아니라, 사회적 변환기 속에서 겪어야 하는 변화된 사회 내에서 제대로 적응하지 못한 사람들의 인간적 실수로 빚어진 사건일 수 있습니다. 소설적 화자는 각 장마다 바뀌고 있습니다. 그들의 음색은 평온하고, 때로는 우스꽝스럽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그 속에 담긴 의미는 독자를 몹시 쓸쓸하게 만듭니다. 왜냐하면 독일 통일은 동쪽 독일 지역의 알텐부르크에 살아가는 대부분의 사회 계층의 사람들로 하여금 어느 정도 경제적으로 풍요로움을 누리게 해주었지만, 그들을 근본적으로 불행하게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비록 스물아홉 개의 짤막한 이야기로 구성되어 있지만, 작품은 전체적으로 통독 이후의 동독 사람들의 변화된 생활에 관한 파노라마를 보여줍니다.

 

 

 

 

누굴 돼지로 아나..

돼지고기를 좋아하는 요크셔, 잉고 슐체 ㅋㅋㅋ 

 

슐체는 모든 이야기에 자신의 입장을 직접적으로 표명하지 않고, 오로지 모든 것을 냉정하게 보고할 뿐입니다. 작가는 작품 내에서 직접적으로 논평하지 않습니다. 작가의 존재는 작품 내에서 마치 카메라의 역할만을 담당할 뿐입니다. 그렇기에 평론가들은 이러한 유형의 서술 형식을 대하면서 “작가의 추방”을 재확인하고 있습니다.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작가의 의도는 작품 해석에 있어서 일차적으로 추방되어야 한다고 합니다. 문학 작품을 논할 때 작가의 의도라든가 작가의 입장은 더 이상 중요하지 않으며, 작품 그리고 독자의 수용 행위가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과연 문학 연구의 작업에서 작가의 집필 의도는 처음부터 배제될 수 있는가? 만약 이것이 가능하다면, 그것은 어느 정도의 범위까지 배제될 수 있는가? 하는 물음을 생각해 보십시오. 슐체는 1996년에 미국 뉴욕에서 약 2년간 생활한 적이 있는데, 이때 미국 작가들의 간결한 문제, 냉담한 서술 방식을 접하고, 이에 매료된 것 같습니다. 작품 『간단한 이야기』는 1995년의 초기작, 『행복의 서른 세 번의 순간들 33 Augenblicke des Glücks』과 함께 작가에게 문학상의 수상이라는 영예를 안겨주었습니다. 그러나 『간단한 이야기. 동독 지방에서 유래한 장편 소설』에 대한 평은 무척 엇갈렸습니다.

 

 

슐체는 이를테면 「새로운 돈」에서 헤밍웨이 스토리 식의 기술 방식을 도입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간단한 이야기』의 두 번째 장에 실려 있습니다. 말하자면 헤밍웨이 단편 소설, 「미시간에서의 상승 Up in Michigan」 (1921) 가운데 이름과 장소만 변화시키고, 줄거리의 틀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코니 슈베르트는 제 1장 「제우스」에 나오는 인물 디터 슈베르트의 딸인데, 과거 자신이 처녀였을 때 겪었던 오래된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한 남자가 도시로 와서 자신의 고유한 사업을 추진하다가 자신과 격렬하게 사랑을 나눈 다음에 아무 말 없이 사라진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미는 어느 고적한 지역에서 살아가는 꿈 많은 처녀입니다. 그는 어느 날 낯선 남자에게 사랑을 느끼게 됩니다. 시골의 순진무구한 처녀는 오랫동안 망설이다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몸을 낯선 사업가에게 맡겨버립니다.

 

 

 

 

 

이렇게 행동하게 된 데에는 자신의 의지가 아니라, 남자에게서 풍기는 매력을 감내하지 못한 탓이 큽니다. 헤밍웨이의 작품이나, 슐체의 작품에서 시골 처녀를 눈멀게 하는 결정적인 사항은 남자에게서 풍기는 낯선 무엇이었습니다. 식당 종업원으로 일하는 코니 슈베르트에게 시골 내지 소도시의 젊은 사내는 연인으로 전혀 적당하지 않다고 여기고 있었습니다. 그미는 아직 가보지 못한 낯선 세계 그리고 외국을 깊이 동경하고 있었으며, 낯선 남자는 이러한 동경을 성취시켜줄 수 있는 사람으로 비쳤던 것입니다. 그렇기에 낯선 남자에게는 하룻밤의 정사를 실현할 수 있는 조건이 이미 충족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헤밍웨이의 작품에서 남자는 처녀를 차가운 보트에 태웁니다. 그는 거나하게 술 취해 있으며, 처녀 역시 그를 따라나섰던 것입니다. 남자가 그미를 끌어당겼는지, 아니면 처녀가 보트 위에 자발적으로 드러누웠는지 불분명합니다. 그미는 황급히 외칩니다. “안돼요, 짐. 그러지 마세요.”하고 그미는 여러 번에 걸쳐 말합니다. 그렇지만 일방적인 성 폭력이 발생하는 것은 아닙니다. 처녀는 “아니”라고 말하지만, 남자가 행하는 대로 자신의 몸을 맡겨버립니다. 성교가 끝난 뒤에 남자는 그미의 몸 위에서 그냥 잠들어버립니다. 헤밍웨이의 마지막 문장은 다음과 같습니다. “차가운 안개가 만으로부터 서서히 퍼지다가, 숲을 지나, 그미의 감정을 그대로 반사하고 있었다.”

 

 

 

슐체는 서술의 관점을 변화시켜서 모든 것을 처녀의 시각에서 고찰하고 처녀의 입으로 서술하게 하였습니다. 슐체의 이야기에서 마지막 문장들은 거의 결정적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소설 속에는 어느 무책임한 사내로부터 버림 받은 처녀의 실망감이 나타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반대이지요. 처녀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어떻게 적응하고 살아야 하는가? 에 대한 경험을 쌓았을 뿐입니다. 여기서 슐체는 이야기를 하나의 상징으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즉 동쪽 독일이 서쪽 독일과 경제적으로 그리고 인간적으로 조우하는 행위에 대한 상징으로 말입니다. 처녀는 그미의 부모들의 논평으로 자신의 이야기를 끝내고 있습니다. “그들은 다음과 같이 말하지요. 내가 순진하고 어수룩하지 않았다고 말입니다. 그렇기에 나는 -다른 사람들이 여러 가지 망상에 사로잡혀 있을 때- 모든 게 어떻게 변할지 알고 있었다고요. 그건 옳으신 말씀이지요.” 우리는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습니다. 처녀에게 중요한 것은 뤼베크에서 그리고 영국 여객선에서 일자리를 얻는 일이었을 뿐, 사내와의 동침이 아니었다고 말입니다. 바로 이러한 까닭에 코니 슈베르트는 그 자체 동쪽 독일 지역을 상징하는, 의인화된 인물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렇기에 이야기는 일견 서독 남자가 동독 여자를 겁탈하는 내용으로 이루어진 것 같지만, 근본적으로는 동독의 경제가 서독의 경제에 집어삼키는 내용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동서독 분단을 소재로 한 그림 

 

친애하는 S, 슐체의 작품의 겉과 속은 분명히 다릅니다. 작품의 제목 역시 그러합니다. 작품의 제목 “간단한 이야기”는 결코 심플한 스토리를 담고 있지 않습니다. 슐체는 어느 인터뷰에서 자신의 등장인물들이 체스 게임보다도 더 복잡하게 서로 얽혀 있다고 토로한 바 있습니다. 모든 에피소드는 슐체의 “간단한 이야기”라는 윤무 속에서 배열되어 있습니다. 만약 우리가 이를 깨닫게 되면 어떤 전율 내지 끔찍함을 감지하게 될 것입니다. 아름답지만, 우리의 심리 속에 서슬을 돋게 하는 강강술래를 생각해 보십시오. 그게 관목 덤불 속에서 즐기는 사랑의 밀회든, 버림받은 사내들의 독백이든, 그게 아니라면 암담한 사업을 묘사하고 있든 간에, 독자는 일견 편안하고 간결한 이야기 속에서 간간이 자신의 모골이 송연하게 되는 것을 감지하게 될 것입니다. 독자가 느끼게 되는 경악 내지 끔찍함의 반응은 서술 전략에서 비롯되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해서 급작스럽게 출현하는 죽음의 사건 때문도 아닙니다. 오히려 독자들은 여러 등장인물들의 소외된 삶 속에서 그렇다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그런 식으로 살아서는 곤란하지 않는가? 하고 여러 번 반문하게 됩니다.

 

 

슐체는 게임을 즐기며 간간이 트릭을 사용하는 작가입니다. 또한 그는 주어진 현실에 대한 예리한 관찰자이기도 합니다. 가령 두 명의 여인이 유리 바닥에서 마치 번개처럼 푸르게 번득이는 아스피린 알약을 응시하는 장면, 한 남자가 깊은 밤에 벌거벗은 채 TV 수상기 앞에 앉아 있는데, 새로 구입한 가죽 소파가 자신의 피부에 닿을 때 느끼는 오한의 장면 등을 생각해 보십시오. 이 모든 세부적 묘사는 어떤 위협을 전해주는 암시일 수 있습니다. 인간은 자신을 위해서 그리고 자신의 삶을 즐기려고 많은 물건들을 구입했으나, 정작 물품들은 인간에게 보이지 않는 칼을 겨누고 있습니다. 한 가지 재미있는 비유를 들어보겠습니다. 노동청의 높은 계단 아래에는 그물이 쳐져 있습니다. 이것은 실업자의 자살을 방지하기 위한 목적으로 드리워진 안전망입니다. 그럼에도 노동청을 찾는 사람들은 이를 다르게 해석합니다. 새로운 공동체의 “사회적 그물”에 대한 상징이라고 말입니다.

 

 

 

잉고 슐체의 또다른 전환기 소설 '아담과 에벌린' 미래는 결코 남성에 의해서 좌지우지되지는 않을 것이다.

 

물론 슐체의 작품은 이러한 사소한 대목에 커다란 비중을 두지 않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렇지만 작품은 동독지역 사람들의 어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상실감을 급진적으로 드러내고 있습니다. 그것은 통일로 인한 사회적 변화에 병행하여 나타나는 제반 갈등과 위화감 등으로 파생되는 사항들입니다. 그렇기에 독자는 고색창연한 소도시, 알텐부르크에 관한 아름다움을 거의 접할 수 없습니다. 마지막으로 에피소드 하나를 들어보겠습니다. 마르틴이라는 이름을 지닌 어느 사내는 생선 요리 음식점의 전단지를 돌리기 위하여 잠수부 차림으로 슈투트가르트 시내 한 복판을 어슬렁거리다가 행인에게 얻어터집니다. 물갈퀴가 어느 행인의 발을 밞았기 때문입니다. 그는 예술사학을 전공했지만, 자신의 학문을 계속할 수 없어서 일용직 노동자로서 오로지 전단지만 뿌리면서 살아가야 합니다. 그 남자의 동거녀 레니는 “원래 우리에게는 언제나 행운이 따랐답니다.”하고 말합니다. 두 사람은 손을 잡고 물구덩이를 첨벙거리면서 지나칩니다. 주위에는 팡파르와 함께 경쾌한 음악이 울려 퍼지지만, 이는 두 사람의 내면과는 전혀 반대되거나 대조되는 축제의 풍경으로 인지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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