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문학 이야기

세르반테스와 돈키호테

필자 (匹子) 2020. 4. 9. 09:01

친애하는 S, 세상 사람들은 때로는 문학과 예술을 잘못 이해합니다. 잘못 이해하여 놀랍게도 창조적 수용을 유발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러한 경우를 통해서 해석학자인 가다머Gadamer는 독자 중심의 해석학 이론을 도출해낸 바 있지요. 어쨌든 작품이 원래의 의도와 다르게 해석되는 것은 작가의 입장에서 고찰할 때 안타까운 노릇입니다. 오늘날 세계 명작 가운데 가장 많이 읽히는 작품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입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이 작품은 한 인간에 대한 세상 사람들의 몰이해를 주제화하고 있습니다. 

 

 

 

 

 

 

 

오늘날 세계 명작들 가운데 가장 많이 읽히는 작품은 돈 키호테입니다. 사진은 미구엘 드 세르반테스 (Miguel de Cervantes의 동상을 찍은 것입니다. 그는 28세에 레판토 전투에 참가하여 왼팔을 잃었습니다. 그래서 그의 별명은 "레판토의 외팔이"습니다. 그가 작가로서 활동한 것은 35세 때부터였습니다. 당시 그가 이십대와 삼십대에 보낸 삶은 참으로 파란만장한 것이었습니다. 세르반테스는 1547년 에스파냐의 알칼라에서 태어나, 1616년 마드리드에서 사망했습니다. 1616년에는 셰익스피어가 사망한 해이기도 합니다.

 

 

 

 

 

 

세르반테스가 태어난 알칼라 드 헤나레스라는 지역의 풍경. 알라카 드 헤나레스는 마드리드에 속하는 인접 도시입니다.

 

 

 

 

 

세르반테스는 에스파냐의 살라망카 대학에서 신학을 공부하였습니다. 우연히 젊은 남자의 결투 신청을 받아서 그를 죽이게 되었는데, 이로 인하여 감옥에 갇히기도 했습니다. 1517년에 그는 해군에 자원 입대하여 레판토 전투에 참가하였습니다. 1575년에는 알제리에서 노예 신세로 전락하여, 이곳저곳으로 돌아다녀야 했습니다. 그가 노예 신분으로서 겪은 경험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참혹한 것이었습니다. 1580년에 트리니다드 교단의 도움으로 마드리드로 돌아올 수 있게 됩니다. 1580년 그는 다시 군인으로 차출되어, 아초렌 전투에 가담하였으며, 1583년에야 비로소 마드리드에 정주여 작품을 집필하게 됩니다.

 

 

 

왼쪽은 정상인의 뇌 활동을 적외선 사진으로 촬영한 것이고, 오른쪽은 조현병 환자의 뇌 활동을 촬영한 것이다. 도파민의 활동이 과다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돈키호테는 자신이 중세의 시대에 살고 있다고 착각합니다. 오늘날에 이르러 정신 분열증Schizoprenia의 원인은 의학적으로 거의 증명되었습니다. 뇌의 신경 전달물질인 도파민의 분비가 과다하게 출현하여 나타나는 질병으로 일려져 있습니다. 그것은 약물을 통하여 도파민 분비를 감소하게 할 수 있습니다. 마치 당뇨병처럼 오랜 기간 약을 통해서 치료하면 완치될 수 있습니다. 이를테면 정신분열증의 치료제로 쓰이는 할로페리돌(haloperidol)이나 클로로프로마진(chloropromazine)은 도파민 수용체의 작용을 방해하는 약물입니다.

 

그런데 세르반테스가 살던 시대에서는 이러한 의학 기술이 발달하지 않았습니다. 심리학이라는 분야 역시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주인공, 돈키호테는 많은 기사 소설을 일고, 현실 감각을 상실합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돈키호테는 문학적 세계를 현실이라고 믿고, 주어진 세계를 가상이라고 간주합니다. 모든 사건은 이러한 시대 착오적 착각 내지는 편집 망상증에서 발생합니다. 그는 16세기에 살고 있지만, 자신이 중세에서 정의를 위해서 싸우는 슬픈 기사 아마디스와 동일시합니다.

 

 

 

돈키호테는 남들에게 도움의 손길을 던집니다. 그러나 언제나 매끄럽게 처리하지 못하고, 일을 망치곤 합니다. 제 하나 몸조차도 건사하지 못하는데, 그는 불쌍한 처녀들을 보호해 주겠다고 공언합니다. 언제나 타인의 마음속에 동정심을 불러일으키는 이 기사는 고독한 바보입니다.

 

그의 체격은 장대하나, 몹시 말랐습니다. 누렇게 찌든 얼굴, 광대뼈 등은 광기로 인하여 수척한 내면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습니다. 돈키호테의 뇌리 속에서 어떤 바보 같은 착상이 끓어올랐을 때, 책의 사소한 내용들은 어느새 연상 작용을 불러 일으켜, 스스로 점화되기 시작합니다. 문제는 책의 내용이 상상이 끝난 다음에도 돈키호테의 삶에 직접적으로 작용한다는 점입니다. 그의 내적 정서 속에는 지금까지 읽었던 모든 자질구레한 사건들이 영속적으로 이어지면서, 그의 현실 감각을 혼란스럽게 만듭니다.

 

 

 

돈키호테는 한 번도 현실을 정확하게 인지하지 못합니다. 거세된 양떼는 군인들로 보이고, 구름은 적들이 도사리고 있는 성 (城)으로 비칩니다. 풍차의 날개는 험상궂은 거대한 인간으로 보이며, 반쯤 깨어진 이발사의 세숫대야가 햇빛에 비칠 때, 그것은 영웅의 투구로 보입니다. 기사가 갈망하는 꿈은 날개 달린 말, 날개 달린 사자로 가득 차 있습니다. 햇빛에 비쳐 불타는 듯이 보이는 바다, 그리고 누군가 헤엄치는 듯이 떠있는 섬들은 마치 수정으로 만들어진 왕궁과 같이 보입니다. 주인공의 이러한 착각은 단순히 사회적 시대착오를 넘어서는 것입니다. 그것은 나름대로의 고대적 갈망의 특성을 지닌 것으로서, 어떤 미래의 세계와 지속적으로 결부되어 있습니다. 말하자면 돈키호테의 미래는 무엇보다도 고결하고, 아주 휘황찬란한 상으로 그려져 있습니다.

 

 

 

 

“우리의 일그러진 영웅”은 어느 날 아주 몹쓸 경험을 하게 됩니다. 그의 몸은 주먹질로 인하여 만신창이가 되어, 온 몸이 멍들고, 피투성이가 되었습니다. 삭신이 쑤시기 때문에 꼼짝도 할 수 없게 된 것입니다. 그는 목로주점의 다락방으로 간신히 기어 올라갑니다. 이때 가축을 돌보는 하녀가 돈키호테가 누워 있는 방에 살며시 기어 들어옵니다. 그러나 그미는 돈키호테의 눈에는 하녀로 비치지 않습니다. 그미는 고결한 전투에 가담하여 싸운 위대한 기사를 위로하러 나타난 아름다운 공주였던 것입니다.

 

돈키호테는 손을 뻗어, 그미를 맞이합니다. 그미의 셔츠는 거친 포장용 천으로 만들어진 것이었으나, 가장 섬세하고 가장 부드러운 고급 아마 (亜麻)처럼 느껴졌습니다. 그미가 들고 있었던 유리 등불은 그에게는 가장 아름다운 동방의 진주와 같은 찬란한 광채를 발하고 있습니다. 그미의 머리카락은 마치 말갈기처럼 뻣뻣했는데도, 그에게는 가장 세련된 아라비아 황금빛 머리카락이었습니다. 오랫동안 잠자지 못한 그미의 입에는 샐러드 냄새가 가득했는데도, 돈키호테는 이를 이국적인 향긋한 조미료 냄새로 받아들일 뿐이었지요.

 

 

 

돈키호테는 토보소에 거주하는 둘시네아를 가장 아름다운 미녀라고 생각한다. 그미는 실제로는 그냥 이목구비가 면상에 박혀 있는 지극히 못생긴 처녀였다.

 

 

인간 삶에서 커다란 영향을 끼치는 자는 “사랑하는 임”일 것입니다. 가령 완전무결한 처녀로서 돈키호테의 뇌리에 존재하는 둘시네아는 주인공에게 엄청나게 강력한 영향력을 끼칩니다. 돈키호테는 그미를 직접 만나려 하지 않습니다. 둘시네아와 조우하는 일은 한편으로는 진정으로 바라는 꿈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엄청난 두려움과 환멸을 가져다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기사들은 사랑하는 임에 대한 연애봉사를 실천하면서도, 사랑과 성에 대해서는 지극히 소극적 태도를 취합니다. 눈을 감으면 천국의 형상 속에서 아름다운 공주를 만나 사랑을 나누지만, 눈을 뜨면 기사는 고해의 현실, 불의와 죄악이 창궐하고 있음을 바라봅니다.

 

 

 

 

그러니까 기사들은 어떤 정복될 수 없는 처녀 외에는 어떠한 다른 여자를 완전한 여성이라고 칭송하지 않습니다. 문 앞에서의 이러한 기다림, 상상 속에서 완전무결한 미녀를 갈망하는 행위는 돈키호테에게 엄청난 위안으로 작용합니다. 왜냐하면 꿈속에서 그의 상상을 가로막는 장애물은 하나도 없기 때문입니다. 돈키호테는 사랑하는 여성에 대한 편력기사들의 우상 숭배를 찬양합니다. 그리고 자신의 그러한 자세에 대해서 자부심을 품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미인은 이러한 우상 숭배를 통하여 “거의 도달될 수 없는 고결한 분”이라는 것입니다.

 

 

 

임을 애타게 갈구하면, 만남은 성급하게 이루어지지 않는 법인가요? 사랑을 애타게 갈구하는 남자는 그미를 사랑하는 대신에, 스스로 갈구하는 임의 상만을 사랑합니다. 돈키호테는 (비록 착각 속에서 살아가지만) 자신의 행위를 필요로 하는 현실과 직접 부딪칩니다. 현실 속에는 자신의 갈망을 방해하는 장애물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그러나 돈키호테가 둘시네아를 생각할 때는 이와는 다릅니다. 그미는 하나의 명상으로서 돈키호테의 뇌리 속에서만 출현할 뿐입니다.

 

친애하는 T, 언젠가 독일의 작가 투콜스키는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우리는 키 크고 날씬한 분을 갈구하지만, 작고 뚱뚱한 분을 얻는다. 그게 삶 C'est la vie”이라고 말입니다. 둘시네아는 아주 가까운 곳, 토보소에 살고 있는, 속된 표현으로 이목구비가 그냥 달려 있는 추녀입니다. 그런데도 돈키호테는 그미를 최고의 미녀로 착각하고, 가급적이면 그미를 만나지 않으려고 합니다. 돈키호테는 다음과 같이 중얼거립니다. 즉 그미의 사랑을 받아들이기에는 자신이 가치 없는 인간이며, 언제나 그미로부터 떠나 있어야 한다고 말입니다.

 

철학자 키르케고르는 젊고 매력적인 약혼녀 레기네 올젠 Regine Olsen과 결혼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그는 한편으로는 수사의 길을 걷고 싶었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일상의 결혼생활로 인하여 행여나 그미에 대한 깊은 사랑이 실제 현실에서 파괴될까 두려워했던 것입니다. 그럴 바에야 처음부터 사랑하는 임과 이별함으로써 영원한 사랑을 마음속에 품을 수 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미가 파혼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어리석은 철학자는 행여나 그미가 자살할까 노심초사했다고 합니다. 그는 평생 레기네를 그리워하며 집필에 몰두했습니다. 결국 레기네 올젠이 받은 것은 사랑이 아니라, 후회의 편지 그리고 유산으로 남긴 그의 저작물이었습니다.

 

돈키호테 역시 키르케고르처럼 행동합니다. 실제 현실에서 둘시네아에 대한 사랑을 처음부터 포기함으로써, 마음속으로 가장 커다란 위안을 얻으리라고 확신합니다. “나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 죽어도 아니 눈물/ 흘리오리다.” 그러나 이러한 정서는 엄밀히 따지면 비정상적으로 왜곡된 것입니다. 21세기의 지금 여기를 의식한다면 오히려 “사랑하면 뺏어라”라는 전언이야 말로 만고불변의 진리로 작용하지 않을까요?

 

 

 

 

사진은 피카소의 안락의자에서 잠든 여인입니다. 돈키호테는 깨어있는 꿈속에서 살면서, 자신의 실존을 마냥 시험하고 있습니다. 돈키호테가 희망하는 세계는 실제 세계와는 다릅니다. 그것은 기사들의 전설 그리고 그들이 추종하는 여인들로 이루어진 세계입니다. 주인공은 바로 이러한 희망의 세계 속에 그리고 갈구하는 세계 근처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물론 그의 세계가 -제한적인 의미에서 고찰할 때- 결코 천박하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둘시네아는 그 자체 “발견될 수 없는 여인 la femme introuverble”입니다.. 그미는 오히려 꿈속의 현재형으로 출현합니다. 돈키호테는 그미의 모습을 떠올리고 그미를 애타게 갈망하지만, 그미는 영원히 건드릴 수 없는 북극성과 같은 항성일 뿐입니다. 그러니까 환상 속에서 가장 아름다운 완전한 여인이 만들어졌습니다. 그러나 돈키호테는 이러한 상이 깨어지는 것을 가장 두려워합니다. 돈키호테 그리고 둘시네아 - 우리는 지금 이 순간에도 어처구니없는 사랑의 그림자를 쫓는 젊은 청춘남녀들을 수없이 만날 수 있습니다. 세상에는 사랑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습니다. 허상인데도 불구하고, 실재하는 인간을 바로 고찰하는 분은 무척 드뭅니다.

 

 

 

 

작품 돈키호테는 문학 작품에 대한 사람들의 오해를 주제화하고 있습니다. 돈키호테는 거룩한 이상을 실현하려는 꿈을 꾸고 있는데, 일반 사람들은 그를 미치광이로 간주하고 조소를 터뜨립니다. 세상에 이다지도 어처구니 없는 오해가 있을 수 있는지요? 김지하의 『밥』에 언급되는 에피소드입니다.

 

어느 봄날 광대부부는 이 마을 저 마을로 유랑하고 있었습니다. 강물이 녹아서 강가에는 얼음이 녹고 있었습니다. 남편이 강을 건넜을 때, 뒤따라오던 아내가 그만 강에 빠진 게 아니겠습니까? 광대는 아내를 구할 밧줄도 없고, 발만 동동 굴렸습니다. 그러다가 지나가는 행인들에게 위험을 알리기 위해 있는 힘을 다해 춤을 추었습니다. 그러자 행인들은 광대가 춤을 잘 춘다고 박수만 치고 있었습니다. 세상의 위기를 알리고 있는데, 사람들은 이를 간파하지 못하고, 에술적 분위기 내지 기술에만 박수를 치고 있었던 것입니다.

 

 

 

위의 그림은 렘브란트의 "이 사람을 보라 Ecce homo"입니다. 로마 병정들은 나사렛 출신의 유대인 왕을 십자가에 못 박으려고 의도하면서, “이 사람을 보라 Ecce homo!”하고 말하면서 낄낄거리며 웃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세계를 구원하려는 고결한 이상을 품고, 이를 실천하려고 하는데, 일반 사람들은 그를 이해하기는커녕 아예 미친 자로 비아냥거리고 있습니다. 그의 머리에는 INRI (Jesus Nazarenus Rex Judaeorum)가 새겨져 있습니다. 유대인의 왕, 나자렛 출신의 예수 - 그 때 그리스도는 이렇게 토로합니다. "오 하느님, 그들은 스스로 무슨 일을 자행하는지 전혀 모르고 있습니다." 일반 사람들이 영웅의 고결한 이상을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는 참으로 많습니다.

 

 

 

 

그게 아니라면 체 게바라를 생각해 보십시오. 그는 “더 많은 월남을!” 하고 외치며 볼리비아로 떠났습니다. 그는 쿠바에서의 혁명에 만족하지 않고, 남미 대륙을 착취로부터 해방시키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일반 사람들은 그를 이해하지 못합니다. 소시민 농부들은 눈앞의 먹을 것 그리고 편안한 잠을 원할 뿐입니다.

 

만약 농부들, 소시민들이 체 게바라를 이해하고 그의 갈망과 이상을 파악하며 그를 물심양면으로 도와주었더라면, 그는 밀림에서 그렇게 허망하게 게릴라 사냥꾼에 의해 발사된 총탄에 개죽음을 당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소시민의 의식이 무조건 나쁘다는 말은 아닙니다. 다만 그게 때로는 사회의 변화에 커다란 악재로 작용한다는 사실이 우리를 슬프게 합니다.

 

 

 

 

작품의 마지막에 이르러 돈키호테는 자신의 망상을 깨닫고 마침내 현실 감각을 되찾습니다. 이때는 죽기 직전이었습니다. 이에 반해 그의 시종 산초 판사는 처음부터 냉정한 현실주의자였는데, 주인공의 영향으로 갈망이 무엇인지, 다른 찬란한 세계가 무엇인지 감지하게 됩니다. 돈키호테가 현실 감각을 찾는 반면, 냉정한 현실주의자 산초 판사는 인간의 꿈이 얼마나 소중한지를 비로소 깨닫게 된 것입니다. 이렇듯 인간은 아무리 하찮은 존재라고 하더라도 주위 사람에게 영향을 끼치면서 살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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