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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카르다넬리, 그 이름 속의 일곱 가지 의미 (1)

필자 (匹子) 2021. 1. 5. 10:04

1. 자신을 스카르다넬리라고 명명하다.: 친애하는 J, 횔덜린은 약 30년 동안 탑 속에 칩거하며 지냈습니다. 다른 사람이 보기에는 약간 곱게 미친 시인처럼 보였습니다. 그는 나이 오십이 되기까지 시집 한 권 간행할 수 없었습니다. 괴테도 실러도 물심양면으로 그를 지지하지 않았습니다. 오랜 시간 횔덜린은 자신의 친필 시 원고를 친구들에게 나누어주었을 뿐입니다. 때로는 귀족들도 횔덜린의 친필 시를 선물 받기도 하였습니다. 구스타프 슈밥 그리고 루드비히 울란트는 이리저리 헌정된 횔덜린의 시를 모아서 1826년 처음으로 횔덜린 시집을 간행하였습니다.

 

49세의 나이에 처음으로 다른 사람의 노력에 의해서 시집이 간행된 것입니다. 1827년 시인 빌헬름 바이블링거가 자신의 책, 『횔덜린의 삶 그리고 작품과 광기』라는 책을 가지고 그를 찾았을 때, 시인 횔덜린은 잘못 찾아왔다고 하며, 자신이 횔덜린이 아니라고 항변하였습니다. 자신의 이름은 횔덜린이 아니며, 스카르다넬리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어째서 자신의 존재를 은폐하려고 했던 것일까요? 아니면 정체성의 혼란을 겪고 있었던 것일까요? 이에 관해서는 누구도 확답을 내릴 수 없습니다.

 

2. 시인에게 가해진 정치적 탄압: 사실 횔덜린은 처음에는 미친 척함으로써 자신에게 돌아올 정치적 핍박을 피하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나중에는 시인은 자신의 삶, 자신의 문학 등에 깊은 절망을 느낀 게 분명합니다. 한 인간이 그토록 강렬한 의지와 열정을 하루아침에 상실한다면, 과연 어떻게 행동하게 될까요? 깊은 절망과 우울은 그를 허탈의 심연 속으로 가라앉게 했는지 모릅니다. 자신이 추구하던 찬란한 사회적인 삶은 전혀 출현하지 않았습니다.

 

진정한 자유와 평등은 지금 여기에서는 실현될 기미가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의 사고 그리고 기개는 시대를 앞서 있었으나, 주어진 현실은 여전히 낙후하고 진부할 뿐이었습니다. 횔덜린은 삶의 수단으로 글쓰기를 선택한 작가가 아니었습니다. 다시 말해 그는 타인의 인정을 받기 위해서 창작을 선택하지는 않았습니다. 그에게 글쓰기는 처음부터 끝까지 생존하는 일이고, 호흡하는 일이며, 나아가 자신의 속내를 동시대인들에게 전하는 유일한 방법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방법마저도 실천하기 어려운 처지에 놓이게 된 것입니다.

 

3. 냉대와 핍박 속의 시인: 횔덜린 주위에는 자신을 진정으로 알아주는 사람이 거의 없었습니다. 창작에 모든 것을 투자한 횔덜린으로서는 자신에게 가해지는 냉대, 핍박 그리고 외면을 도저히 감당할 자신이 없었습니다. 1. 냉대: 평생 자신만 바라보고 살아온 과부 어머니의 기대감을 도저히 충족시켜줄 수 없었습니다. 어머니는 횔덜린이 목사가 되어 동생들을 부양하기를 애타게 바랐는데, 횔덜린은 전업 작가라는 길을 선택하였습니다.

 

가족을 부양하기는커녕, 서른이 가까운 나이에 어머니로부터 매달 생활비를 수령해야 했습니다. 2. 핍박: 횔덜린은 당국으로부터 정치적인 핍박에 시달렸습니다. 1805년 자신의 친구 이삭 폰 싱클레어 Isaac von Sinclair는 반역 혐의로 인하여 헤센 홈부르크 공국에서 체포되었습니다. 친한 문우들은 미쳐 죽고, 정치범으로 감옥에 갇히거나, 절필하며 잠행하며 살아가야 했습니다. 횔덜린 역시 1805년에 당국의 조처로 가죽조끼를 입은 채 아우텐리트 병원으로 끌려가야 했습니다.

 

4. 동시대인들로부터의 외면 그리고 임의 죽음: 사람들은 시인 횔덜린의 진면목을 간파하지 못했습니다. 실러만이 횔덜린이 지니고 있는 문학적 위대성을 파악했으나, 예술적 질투심 때문에 그를 외면하였습니다. 천재를 알아본 천재는 자신의 코가 석자라고 만 생각했던 것입니다. 또 한 가지 생략될 수 없는 것은 횔덜린이 그토록 사랑하던 여인, 수제테 폰 곤타르가 사망했다는 사실입니다.

 

자고로 대부분의 예술가는 사랑과 관심의 자양을 주로 사랑하는 임으로부터 받으면서, 자신이 처한 고독과 가난을 극복하곤 합니다. 그들의 마음속에는 결코 만인의 사랑을 받기 원하는 카르멘의 정서가 자리하지 않습니다. 예술가는 연예인이 아니기 때문이지요. 만인의 사랑을 받는 것보다는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한 분으로부터 사랑 받고 인정받기를 원하는 자가 횔덜린과 같은 시인 내지 예술가일 것입니다. 그러나 그가 사랑하는 디오티마는 그만 유명을 달리하고 말았습니다. 그것도 횔덜린이 생계를 위해서 멀리 보르도로 가 있는 동안에 마치 사랑의 수분을 머금지 않은 화초처럼 그만 병들어 죽었던 것입니다.

 

5. 살바토레 로자, 부오나로티, 혹은 스카르다넬리: 이러한 상황에서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깊은 절망은 그를 조용히 숨어지내게 했고, 눈과 귀를 차단시키게 했으며, 시간관념을 상실하게 했습니다. 횔덜린은 찾아오는 손님들에게 “폐하”라고 호칭하며, 자신을 “스카르다넬리 Scardanelli” 라고 일컬었습니다. 때로는 자신의 이름을 살바토레 로자 Salvatore Rosa, 부오나로티 Buonarroti 라고 명명했습니다.

 

살바토레 로자라는 이름은 그 자체 “붉은 구원자”라는 의미를 지닙니다. 부오나로티는 이탈리아의 혁명가 “필리포 부오나로티” (Filippo Buonarroti, 1761 – 1837)를 연상시키게 합니다. 부오나로티는 프랑스 혁명 당시에 그라쿠스 바뵈프 Gracchus Babeuf와 함께 “평등주의자의 모반”을 선언하며 더 나은 사회적 삶을 실천한 인물입니다. 그렇다면 스카르다넬리는 어떠한 의미를 지닐까요? 미리 말씀드리지만 우리는 그 이름의 의미를 정확히 알 수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