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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카르다넬리, 그 이름 속의 일곱 가지 의미 (2)

필자 (匹子) 2021. 1. 5. 10:12

6. 스스로 자신을 비하하려고 했는가?: 그렇지만 후세 사람들은 스카르다넬리의 이름의 의미를 계속 추적하였습니다. 이를테면 우리는 다음과 같은 여섯 가지의 개연성을 찾을 수 있는데, 이것들은 사실로 확정될 수 없는 추론에 불과합니다. 첫째로 빌레펠트의 어학자, 크리스티안 외스터잔트포르트 Chr. Oestersandfort는 시인이 자신을 비하하기 위해서 그런 이름을 붙였다고 주장했습니다.

 

“스카르단”은 발음상으로 “Scharlatan (야바위꾼, 협잡꾼, 돌팔이 의사)”을 연상시키며, “elli” 라는 접미사는 “놈”과 같은 인간 비하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에 의하면 횔덜린은 자신을 “겸허한 마음으로 글을 쓰는 자”라고 명명하고 싶었다는 것입니다. 사실 횔덜린은 찾아오는 손님에게 깍듯이 인사하며, 친필 원고를 건네주곤 하였습니다. 그가 어째서 자신을 비하하려고 했는지에 관해서 외스터잔트포르트는 더 이상 언급하지 않았습니다.

 

7. 은폐의 미학, 혹은 겸허함의 극치를 드러내기?: 둘째로 횔덜린은 자신의 존재를 감추기 위해서 가명을 쓴 것 같습니다. 만약 자신이 속내를 드러내면, 정치적으로 에술적으로 핍박당하리는 것을 인식하고 의도적으로 이름을 감추려고 했다는 것입니다. 이를테면 “스카르다넬리”라는 이름 중에서 “rdanelli”의 부분은 횔덜린의 이름 가운데 “lderlin”과 비슷하게 발음된다는 것입니다. 사실 1805년 횔덜린은 당국의 형사들이 자신에게 가죽조끼를 입힐 때, “나는 자코뱅주의자가 아니야, 폐하 만세”를 외치며, 졸도한 적이 있었습니다. 이는 스스로 정치적 희생양이 되지 않으려는 극도의 단말마의 외침으로 이해됩니다.

 

셋째로 언어학자, 로만 야콥슨 Roman Jakobson은 다음과 같이 주장하였습니다. 횔덜린은 단순히 상대방에게 공손함을 드러내고 겸허한 자세를 돋보이게 하기 위해서 그러한 이름을 사용했다는 것입니다. 이에 대한 예로서 야콥슨은 몰리에르의 극작품을 예로 듭니다. 몰리에르의 극작품 가운데에는 “스가나렐 Sganarelle”이라는 등장인물이 출현하는데, 그는 상대방의 뜻에 따라서 행동하는 인간의 전형이라고 합니다.

 

8. 문제를 일으키는 방해꾼 (Störenfried)으로서의 시인: 넷째로 스카르다넬리는 두 명의 실존인물과 관련될 수 있습니다. 두 명의 실존 인물과 유사하게 명명함으로써 횔덜린은 자신의 존재를 흐릿하게 만들려고 했는지 모를 일입니다. 그게 아니라면 주위의 조롱을 감내하는 인간의 모습을 은근히 드러내려고 했는지도 모릅니다. 가령 예수회 수도사 가운데 장 밥티스타 스카라멜리 (J. B. Scaramelli, 1687 – 1752)라는 인물이 있습니다. 그는 고해 신부로 일하면서 영혼의 안내서와 같은 책자를 간행했는데, 이따금 신비주의의 발언을 퍼뜨림으로써 주위 사람들로부터 조롱을 당하곤 하였습니다.

 

또 한 명은 지롤라모 카르다노 (Girolamo Cardano, 1501 – 1576)를 가리킵니다. 그는 천한 신분을 지니고 있었지만 워낙 영특하여 르네상스 시대에 제후들의 주치의로서 실력을 인정을 받았습니다. 그 역시 곧이곧대로 바른 말을 일삼다가 종교 재판소에 취조당한 인물이었습니다. 이 점에 있어서 그는 스카라멜리와 비슷한 이력을 지닙니다.

 

9. 타인에게 경계심을 떨치게 하기 위한 수단으로 그 이름이 사용되었을까? 다섯째로 스카르다넬리라는 이름은 고향인의 특성을 강하게 부각시키기 위함일 수 있습니다. 특정 지역에 많이 분포해 있는 이름은 토박이들에게 무척 친숙한 것입니다. 그렇기에 이러한 고향 사람을 의식하게 하는 이름은 이방인 내지 타인의 의미를 배제시키게 합니다. 이를테면 “스카르다날 Scardanal”은 라인란트 팔츠 주의 마을 이름이라고 합니다.

 

사실 횔덜린의 찬가 「라인 강 Der Rhein」에는 이와 관련되는 이름이 등장합니다. “scatinari”라는 단어는 이탈리아어로 “경작하다”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는데, 향토적 편안함을 느끼게 해주는 단어입니다. 그런데 과연 횔덜린이 오로지 고향의 친숙함 내지 안온함을 강조하기 위해서 이러한 이름을 채택했을까요?

 

10. 정신 나간자의 일감으로서의 실타래 감기: 여섯째로 횔덜린은 “스카르다넬리”라는 이름을 사용함으로써 자신이 심리적으로 정상이 아니라는 것을 은근히 표현하려고 했는지 모릅니다. 독문학자 우테 욀만 Ute Oelmann은 다음과 같이 주장하였습니다. 이탈리아어로 “스카르다사레 scardassare”라는 단어는 실타래 감기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정신 나간 사람들이 주로 요양원에서 행하는 일감은 실타래 감는 일이라고 합니다.

 

아무런 생각 없이 실타래를 감고 잇으면 환자들의 집중력은 적어도 그 시간 만큼은 커진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주장 역시 신빙성이 약간 떨어집니다. 횔덜린은 그리스어 그리고 라틴어에 능통했지만, 이탈리아어를 잘 몰랐습니다. 설령 그 단어를 알았다고 해도 횔덜린이 정신 나간 자의 실타래 감기를 의식하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11. 시선을 고착시키지 못하는 무능력: 일곱째로 횔덜린은 튀빙겐의 탑 속에 살면서 찾아오는 손님의 눈을 바라본 적이 한 번도 없었습니다. 그렇기에 그는 어떤 특정한 사물을 골똘히 바라보지도, 손님의 눈을 쳐다보며 분명한 대화를 나누지도 못했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우리는 스카르다넬리라는 이름을 통해서 시인의 무능력, 다시 말해서 시선을 고착시키지 못하는 무능력을 지적할 수 있습니다. 가령 그리스 비극 시인 에우리피데스의 극작품에는 이타카에 도착하는 오디세우스가 묘사되어 있습니다.

 

이때 오디세우스는 자신의 부하들에게 “눈을 깜박이지 말라. 스카르다무사인 skardamussein”고 명령합니다. 한 곳에 눈을 고착시키지 못하는 무능력 – 그것은 시인의 마음 속에 다른 세계가 도사리고 있어서 상호 분열되고 충동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전형적으로 두 개의 세로 인한 정신 분열에 근거하는 시대착오의 특성이 아닐 수 없습니다.

 

12. 결론, 자기 정체성을 상실한 시인, 세계의 주인: 친애하는 J, 지금까지 우리는 “스카르다넬리” 속에 도사린 지닌 일곱 가지의 함의를 간략하게 살펴보았습니다. 나는 이 가운데 무엇이 타당하고, 무엇이 그른가? 하는 물음에 대한 답은 유보하려고 합니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제각기의 그럴 듯한 논거를 지니고 있기 때문입니다. 확실한 것은 횔덜린이 자기 정체성을 상실한 채 살았다는 사실입니다. 시인으로서 시인의 삶을 살 수 없는 영어 (囹圄)의 삶이 그로 하여금 외부로부터 자신을 차단시키게 한 게 분명합니다.

 

우리는 슈테판 헤름린 Stephan Hermlin의 방송극 「스카르다넬리」에서 그 해답을 찾을 수 있습니다. “스카르다넬리”라는 이름의 의미를 밝히는 작업은 단순히 문헌학적인 일감을 넘어서, 오늘날 시인의 위상을 가늠케 하는 좋은 자료로 자리매김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시인은 “자기 집 속의 이방인”으로서 꿈과 유토피아가 사라진, 돈의 사회에서 여전히 거지 취급을 당하며 살아가고 있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