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다른 한편 본질적 문제를 심도 있게 고찰하자면 우리는 다음과 같은 사항을 찾아낼 수 있다. 즉 루터는 무엇보다도 폭력을 위하여 폭력을 숭배했으며, 오로지 권위를 위해서 권위를 신격화했다고 말이다. 예컨대 스토아사상가들과 (조만간 고찰하겠지만) 계몽주의자들은 비교적 손쉬운 방법으로 자연법적 내용에서 형법을 추론해낼 수 있었다. 이에 비하면 마르틴 루터는 한술 더 떠서 죄지은 사람들을 처벌하는 법 규정을 자연법으로부터 가장 수월하게 도출해내었다. 다시 말해서 “노여운 신의 법 ius divinae irae”으로 이해되는 루터의 자연법 속에는 이른바 인간의 본질적 권리 내지 만인의 권리를 유추하게 하는 내용이 완전히 생략되어 있다. 어디 그뿐이랴. 천국의 자유라든가 모든 재화를 만인이 공동으로 소유하는 내용은 루터에게서는 눈 씻고도 찾아볼 수 없다. 그 대신에 루터는 정의로움을 절대적인 관건으로서 절대화시키고 있다. 이로써 그는 마치 신화에서 나타나는 악령의 면모처럼 끔찍한 모습으로 법의 이상을 고립시킨 셈이다. 아닌 게 아니라 루터에게는 신화에서 나타나는 악령을 떠올리는 요소가 현저하게 발견된다. 그것은 다름 아니라 죄와 원죄를 가리킨다. 모른 인간 존재는 루터에 의하면 언젠가는 반드시 저주받아야 마땅한 기본적인 원죄를 지니고 있다. 루터에게는 마치 찬란한 빛과 같은 법의 카테고리는 처음부터 완전히 생략되어 있다. 가령 인간이라면 누구나 스스로 제기하고 요구해야 마땅한 자연법적인 인간 권리를 루터는 완전히 무시하고 있다. 만인을 무조건 악랄하게 처벌하는 법이 아니라, 인간이 원래 지니고 있었던 기본적인 권리를 중시하는 자연법을 생각해 보라. 물론 다른 목표를 위해서였지만 스토아학파 사람들은 자유, 평등 그리고 인간의 선함에 관해서 충분히 언급하지 않았던가?
마르틴 루터와 결혼한 수녀, 카타리나 폰 보라. 6명의 자식을 낳았다. 마르틴 루터는 "일주일에 두 번 살 섞으면 그미와 나 사이에 손해 볼 것 없다"라는 말을 일기에 남겼다.
나중에 칼뱅 Calvin에 이르러서야 지금까지 추구한 법의 방향이 다시 다소 친숙한 쪽으로 선회할 수 있었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시대적 상황이 바뀌어 칼뱅이 살던 시기에는 재세례파 사람들과의 갈등이 거의 사라지고 없었다. 칼뱅은 세상에 대한 넓고 깊은 안목을 지닌 법률가로서 무엇보다도 서부 유럽의 지역에서 살았다. 주위에는 경제적으로 발전된 시민계급이 점차적으로 성장하고 있었으며, 시민계급이 어느 정도의 범위에서 국가에 대해 직접적인 영향을 끼치기 시작했던 것이다. 당시에 기독교인이라고 명명되던 사람들은 주로 상인들이었다. 이들은 조용한 중세의 자그마한 방을 박차고 나와서 세계의 질서에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하였다. 이는 신의 계명에 따라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신의 질서를 전하면서 무엇보다도 장사하기 위함이었다. 칼뱅은 이러한 생각이 이미 고대의 십계명에 도사리고 있으며, 고대 이스라엘의 전체적인 역사 속에 널리 퍼져 있다고 믿었다.
칼뱅은 오래 전에도 국가가 존재하였다는 사실을 지적한다. 고대의 예언자들은 사악한 왕들의 폭정의 횡포에 대항하여 그들에게 완강하고도 집요한 경고를 보낸 바 있다는 것이다. 이를 고려한다면 국가라는 존재는 칼뱅에 의하면 인류의 타락의 결과를 징벌하는 강제적 수단, 그 이상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국가는 처음부터 선한 신의 질서를 내재하고 있으며, 무엇보다도 신의 명예를 지키기 위하여 고유의 일을 행해나가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십계명의 내용과 일치한다. 십계명은 더 이상 루터가 주장한 바 있는 “유대인의 작센 법전”이 아니다. 그것은 칼뱅의 표현에 의하면 “정의의 길에 관한 영구적이고 필연적인 규칙 Règle perpétuelle et infaillible de route justice”이다. 루터는 어떤 기이한 이원론을 표방하면서, 최고 권력의 체제로서의 국가의 영역을 기독교의 영역으로부터 완전히 일탈시켰다. 나아가 그는 야훼 신의 전언이 담긴 십계명을 단호한 자세로 사랑의 신, 그리스도의 복음과 철저히 구분시켰다. 이렇게 함으로써 루터는 반동적 관점에서 정치와 종교를 서로 분리하려고 시도했던 것이다. 그러나 칼뱅은 루터와는 달리 십계명에서 복음의 정신을 찾고, 복음 속에서 십계명의 가르침을 발견해내야 한다고 설파하였다.
신의 법칙은 칼뱅에 의하면 구약성서와 신약성서 속에서 따로따로 분할되어 있지 않다고 한다. 바꾸어 말하자면 십계명은 얼마든지 기독교 사상의 측면에서 이해되고 해석되어야 마땅하며, 산상수훈 또한 반드시 고대의 전쟁의 신 내지 법의 신이 들려주던 말씀으로 수용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문제는 칼뱅의 주장이 성서 해석의 방식 뿐 아니라, 보다 발전된 서방 경제적 상황과 묘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칼뱅은 자연법에 관한 루터의 견해를 진보적 방향으로 뒤집어 해명하였는데, 이러한 입장 속에는 변모하는 사회적 상황 및 상업과 무역의 관점이 적극적으로 반영되어 있다. 이를 위해서 인간은 끈덕지게 노력해야 하며, 가급적이면 합리화된 노동을 행해야 하며, 재화를 더욱더 증가시켜야 한다고 칼뱅은 주장하였다. 칼뱅은 자본주의가 발전되기 시작하는 시기에 이에 상응하는 인간의 자세를 신학적으로 구명하였다. 칼뱅은 절약 정신, 절제하는 태도 그리고 사치와 향락을 거부하는 생활관 등을 중시했는데, 이는 어떤 고결한 인간 유형을 강화시켜주는 덕목으로 자리하였다. 이로써 시토이앙이 출현하였으며, 이들로 하여금 결코 부르주아로 나락할 수 없는 미덕을 지니게 하였다. 칼뱅이 중시하는 인간 유형은 처음부터 “신에 의해서 임명 받은 관리인 내지 집사”로 정해져 있었다. 가령 청교도주의자는 자기 자신을 그런 식으로 간주하였다. 물론 칼뱅의 주장은 처음에는 인정받지 못했지만, 나중에는 모든 유형의 이윤 추구의 사업은 하나의 기독교적 생활방식으로 정착된다.
칼뱅은 개인 그리고 그가 속한 국가 공동체가 구원을 추구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과업은 하나의 권한일 뿐 아니라, 하나의 의무라고 한다. 다시 말해서 “주의 위대한 명예에 대한 ad majorem gloriam Dei” 소유를 획득하기 위한 의무 말이다. 사람들은 지금까지 처벌을 위해서 폭력을 사용하고, 전쟁을 치르며, 믿음에 대해 자부심을 느껴 왔다. 예언자들은 불의에 대해 노여움을 표명하고, 열정적으로 경건한 신앙을 드러내었다. 이를 위해서 지금까지 동원된 것은 모세의 법전 혹은 원죄 상태 속의 자연법이었다. 이 모든 행위는 칼뱅에 의하면 주의 위대한 명예를 드높이기 위한 행동들이었다고 한다. 바로 이러한 내용 때문에 칼뱅 사상은 위대한 가치를 지니며, 결코 단순한 원죄 상태를 전제로 한 상대적 자연법사상으로 축소화될 수 없다.
칼뱅의 모습. 그는 엄격한 신학자로서 타 종교와 마녀 사냥을 불러온 장본인이지만, 자연법 사상에 있어서는 하나의 고결한 원칙을 추구하였다. 자연의 법은 칼뱅에 의하면 신의 법으로서 십계명 dekalog에 이미 기술되어 있다고 한다.
칼뱅은 선량한 신께서 인간 사회에 처음부터 불변하는 무엇으로 정해둔 질서를 따라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로써 칼뱅사상은 개개인이 자본을 추구하는 것 자체가 하나의 영웅적 과업이라고 내세울 수 있게 되었다. 이로써 칼뱅은 복음의 사상적 내용과의 대립적인 요소 내지는 갈등들을 사전에 차단시킬 수 있었다. 가령 성서에 기술된 낙타의 비유에 의하면 부자는 천국에 발을 들여놓을 수 없다고 한다. 그렇지만 칼뱅은 사람들이 선량한 신의 질서에 따르기 위해서 얼마든지 자본을 축적할 수 있다고 주장함으로써, 성서의 내용과의 대립적 내용을 어느 정도 약화시킬 수 있었다. 이를테면 예수가 산상수훈으로 사람들에게 전파한 급진적 사랑의 이상은 근본적으로 고찰할 때 막연하게 “남들에게 충분하게 사랑을 베풀라.”는 어떤 추상적인 요구사항으로 남게 되었다. 물론 이러한 요구사항은 구약성서에서 더욱더 중요한 구체적인 사항으로 수없이 언급된 것이지만 말이다. 우리는 바료 여기서 칼뱅의 입장이 루터와 철저하게 구분되고 있음을 간파할 수 있다. 한마디로 말해서 칼뱅의 자연법사상은 오로지 구약성서 그리고 십계명에 담겨 있는 “신의 법 lex divina”에 관한 비유에 의해서 해석되고 있다. 바로 그렇기에 칼뱅은 산상수훈의 내용에 대해 당혹감을 표명하지도 않았으며, 마르틴 루터처럼 이중장부를 작성할 필요성도 느끼지 않았다.
칼뱅은 산상수훈의 내용을 모세와 예언자들의 말씀 나아가 다윗과 시편의 내용과 동일시하였다. 칼뱅의 이러한 입장은 근본적으로 루터에 반대되는 놀라운 예술적 성공 작품으로 남게 되었다. 아닌 게 아니라 칼뱅이 남긴 작품들은 교회사적으로 고찰할 때 “반-사도 바울 Anti-Paulus”, “반-아우구스티누스 Anti-Augustin” 그리고 특히 “반-마르키온 Anti-Marcion”의 입장을 표방한 걸작으로 간주된다. 바로 이 점을 고려할 때 절대적 자연법은 칼뱅에게서 완전한 모습으로 드러나고 있다. 이를테면 칼뱅은 「재세례파에 반대하여 Contre les Anabaptistes」라는 놀라운 제목의 문헌 그리고 여러 편지들과 법학 개요를 집필했는데, 여기서 진지하게 다음의 사항을 주장하고 있다. 즉 신은 불변하는 존재이기 때문에, 인간은 어떠한 경우라 하더라도 십계명을 따라야 한다고 말이다. 십계명은 설령 그리스도의 법이 파기되는 한이 있더라도 인간이 고수해야 할 유일한 가르침이라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칼뱅의 견해에 의하면 원죄 상태의 상대적 자연법으로서의 모세의 법에다가 어떠한 것도 첨가하지 않았으며, 또한 이에 관한 어떠한 것도 수정하지도 않았다. 그리스도는 산상수훈을 매개로 하여, 오로지 바리새인들의 모세의 법에 대한 잘못된 해석만을 부분적으로 용인하였다고 한다. 다시 말해 산상수훈은 오로지 다음의 사항만을 첨예하게 가르쳐주고 있다. 즉 상대적 자연법에 입각한 산상수훈의 말씀들은 개인적인 증오심이라든가 사적 열정이 없이 발생해야 한다는 사항 말이다. 우리는 여기서 다음의 사실을 분명하게 알 수 있다. 즉 복음의 말씀 속에는 주어진 현실과 천국의 원초적 상태 (스토아사상가들이 언급한 황금의 시대 역시 마찬가지로) 사이의 대립이 흐릿하게 드러나고 있으며, 심지어는 완전히 파기되어 있다. 자본주의가 태동하는 시기의 자연법적 이상은 공동의 소유를 급진적 사랑의 이상이라는 의미로 받아들이지 않고 있었다. 다시 말해서 칼뱅 시대의 사람들은 가파르나움 근처의 산에 모여 있던 사람들이 꿈꾸던 천국의 원초적 상태를 전혀 의식하지 못했다. 그들은 원래 존속했던 재화의 평등이 사유재산으로 둔갑했다는 사항을 어디서도 발설하지 않았다. 사유 재산은 오히려 신께서 그들에게 직접 하사하신 재화로 이해되었던 것이다.
칼뱅에 의하면 신의 존재는 -원죄 상태의 상대적 자연법 속에서든, 아담과 이브가 선악과를 먹지 않던 이전의 원초적 상태 속에서든, 그리스도의 복음 속에서든 간에- 상부에서 모든 재화를 소유하는 분이라고 한다. 그렇기에 공산주의는 칼뱅의 눈에는 실제 삶에 있어서든 신학적 논의에서든 간에 도저히 있을 수 없는 넌센스로 비쳤다. 바로 이 점이 칼뱅의 자연법사상에 담겨 있는, 유일한 자본주의적 면모가 아닐 수 없다. 다시 말해서 칼뱅은 어떤 성장하는 중간 세력의 입장을 두둔하고 그들의 상업과 무역을 도모하기 위하여 성서 속에 담긴 사랑의 공산주의의 정신을 처음부터 차단시켰다. 그러한 한 우리는 칼뱅 사상이 기독교의 이상으로부터 가능하면 멀찌감치 거리감을 취했으며, 특히 급진적 개혁을 표방하던 재세례파의 이상으로부터 완전히 등을 돌렸다고 말할 수 있다. 실제로 급진적 재세례파는 자본주의의 경제 체제 속에서 서서히 몰락하였으며, 마치 퀘이커 교도들의 종교적인 생활방식과는 달리 방법론적으로 기독교적 이상을 실천하지 못했다.
상기한 취약점에도 불구하고 칼뱅은 스토아학파 사람들에 의해서 닦여진 자연법사상의 토대를 처음부터 분명하게 숙지하고 있었다. 비록 그는 “공동의 소유 communis possesio”에 대해 알려고 하지 않았지만, 최소한의 범위에서 개인의 자유를 인식하고 있었다. 다시 말해서 칼뱅은 새롭게 태동한 기업가의 정신을 자유라고 이해했지만, 그럼에도 그것을 국가 전체의 권력에 대항하는 하나의 새로운 세력으로 받아들였다. 바로 여기서 파생된 것이 바로 “하급 관청 magistrats inférieurs”의 저항법 내지 개혁법에 관한 유명한 이론이다. 이것은 얼마 지나지 않아서 “폭정”에 대한 가장 훌륭한 폭력으로 질적 변화를 이루게 된다. 다시 말해 사악한 왕의 끔찍한 폭력이 십계명에 기술된 자연법의 정신에 위배되거나 이를 지속적으로 해체시킨다면, 개인은 이에 대해 무력으로 제재를 가할 수 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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