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몸젠의 삶 (1): 테오도르 몸젠은 (1817 – 1913) 1821년부터 북독의 올데스로에 지역의 목사로 일하는 큰아들로 태어나, 다섯 동생들과 함께 자랐습니다. 아이들은 시간이 흐름에 따라 아버지의 영향으로부터 벗어나 다른 곳으로 이주했지만, 테오도르 몸젠은 가톨릭에 대해서 거부감을 지닌 자유로운 프로테스탄트로 고향에 오래 머물렀습니다. 비록 가난한 살림이었지만 옌스 몸젠은 자식들을 어릴 때부터 교육을 통해 라틴어, 그리스어 그리고 고전 문학에 눈을 뜨게 하였습니다.
몸젠은 처음에는 1838년 킬 대학교에서 법학을 공부하였습니다. 1839년 그는 킬 대학교에서 나중에 독일의 유명한 작가로 거듭나게 될 테오도르 슈토름을 알게 되었습니다. 몸젠은 슈토름과 자신의 동생 티코 몸젠과 함께 시선집을 간행하였는데, 이 선집은 문단에서 호평을 받았습니다. 같은 해에 몸젠은 『문헌학자들의 법칙의 권위에 관하여 Ad legem de scribis et viatoribus et De auctoritate』로 킬 대학교에서 법학 박사학위를 받았습니다. 박사학위를 받았지만 몸젠의 관심사는 로마법으로 향하고 있었습니다.
2. 몸젠의 삶 (2): 몸젠은 학자로 성공을 거두려고 했지만 생계를 유지할 수 없어서 가정교사로 살아야 했습니다. 1844년 덴마크 공국으로부터 장악금을 받았습니다. 당시에는 슐레스비히홀슈타인은 덴마크령이었습니다. 몸젠은 프랑스, 이탈리아 등지로 연구 여행을 떠나, 나폴리의 비석에 기록된 글들을 연구하는 서적을 출판했습니다. 1847년 독일로 돌아와서 저널리스트로 불안정한 생활을 영위했습니다.
1848년 독일 혁명이 발발했을 때 많은 글을 발표하여 자신의 자유주의의 지조를 드러내었습니다. 바로 그해에 몸젠은 라이프치히 법학 교수로 초빙되었습니다. 1849년 작센에서 5월 폭동이 발발했을 때 고초를 겪고 대학에서 쫓겨나기도 했습니다. 다행히 그는 1849년 스위스의 취리히에서 교수직을 얻었습니다. 1858년 몸젠은 프로이센 왕실 아카데미의 연구 교수가 되었으며, 1861년에는 베를린의 프리드리히 빌헬름 대학의 교수가 되었습니다. 1902년 몸젠은 『로마사』로 노벨 문학상을 받았습니다.
3. 인간, 테오도르 몸젠: 대학 교수로서 몸젠은 학생들의 사랑을 받지 못했습니다. 그는 인성이 유아독존적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사실 몸젠은 학문적으로는 탁월하지만, 인간으로서는 깐깐하고 타협할 줄 모르는 식으로 처세하였습니다. 이를테면 몸젠의 제자들 가운데 역사학 교수가 된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의 제자 가운데에는 나중에 사회학의 가두가 되는 막스 베버가 있습니다. 막스 베버 역시 몸젠의 제자였지만, 역사학을 주 전공으로 삼지 않고, 사회학으로 연구 분야를 바꾸어서, 하이델베르크에서 자신의 터전을 쌓아야 했습니다.
1854년 몸젠은 출판업자 카를 라이머의 딸, 마리와 결혼하여 16명의 자식을 거느렸는데, 그 가운데 네 명이 죽고 12명이 어른이 되었습니다. 교수로서 월급 그리고 연구비를 받았지만, 그의 아내, 마리는 무척 힘들게 생활했다고 합니다. 자식이 12명이니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고 합니다. 몸젠의 딸은 도합 여섯 명이었는데, 그 가운데 네 명이 나중에 직업을 선택하였습니다. 여성으로서 직업을 지니는 게 당시에는 몹시 힘이 들었지만, 네 명의 딸들은 교사 내지 간호사로 일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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