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의 비평가, 한스 마이어 (Hans Mayer, 1907 - 1998)의 "무효 선고받은 독일인 (Ein Deutscher auf Widerruf)"은 두 권으로 이루어진 회고록인데, 1982년에서 1984년 사이에 씌어졌다. 마이어는 문예 이론가 내지 에세이스트로 살아오면서, 많은 풍파를 겪었다. 그의 회고는 작품 속에서 50년대부터 시작되어 1980년까지 이어지고 있다.
한스 마이어는 계몽된 유대인 시민의 가정에서 태어나, 처음에는 법률학을 공부했다. 이 시기의 이야기는 제 1장 “물고기의 표시 속에서”에 자세히 서술되고 있다. 당시에 쿠르트 투콜스키 (K. Tucholsky)의 날카로운 산문은 그에게 커다란 감명을 주었다. 마이어는 1923년에 게오르크 루카치 (G. Lukács)의 "역사와 계급의식"을 읽었다. 이 책은 어디에도 커다란 관심을 기울이지 않으며, 그냥 놀면서 세월을 보내던 대학생 마이어의 눈을 번쩍 뜨게 해 주었다고 한다.
1928년 마이어는 사회주의 학생 운동에 가담하였으며, 1930년 법학과에서 "독일 국가 이론의 위기 그리고 루돌프 스멘드의 국가관"이라는 제목의 연구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취득한다. 특히 마이어는 카를 슈미트 (Carl Schmitt) 그리고 한스 켈젠 (H. Kelsen)에게서 배운 바 있는데, 그들의 정치적 태도에 대해 무조건 동조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그 반대였다. 특히 칼 슈미트의 보수적 국가관은 마이어에게는 비난의 대상이었다.
히틀러의 권력 장악은 유대인 출신의 법률가로서의 전망을 어둡게 만들었다. 나치들은 쾰른에 있던 부모님의 도서관을 온통 약탈해 갔던 것이다. 회고록의 제 2부는 “국경을 넘어서”라는 제목을 달고 있다. 마이어는 스트라스부르에서 “세계”라는 일간지의 편집자로 잠시 일한 뒤 스위스로 떠난다. 한스 켈젠 그리고 막스 호르크하이머 등은 마이어를 경제적으로 도와준다. 물론 이러한 경제적 도움은 고정적인 수입원은 아니었다.
마이어는 그저 때때로 주어진 원고료에 의존하면서 살아야 했다. 켈젠 그리고 호르크하이머 스스로도 망명 생활을 영위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칼 부르크하르트 (Carl J. Burckhardt)는 마이어의 은사가 되었다. 부르크하르트는 마이어에게 법률가, 정치가, 역사가 대신에 오로지 작가로서 살아가기를 권고했고, 이러한 충고는 마이어의 삶에 결정적으로 작용하였다.
제 2차 세계대전 동안에 마이어는 자신의 대표작 가운데 하나인 "게오르크 뷔히너 그리고 그의 시대 (Georg Büchner und seine Zeit)"를 집필한다. 이 책은 1946년에야 비로소 간행된다. 제 2차 세계대전의 시기에 주로 스위스에서 생활하는 동안 이 책이 집필되었던 것이다. 마이어는 때로는 어느 격투와 같은 난동 사건에 연루되어, 티신, 왈리스, 비츠빌 그리고 윌리스 등의 수용소에 격리된다. 몇 개월 동안 그는 수감 생활을 영위하면서, 독서로 소일한다. 스위스에 살던 젊은 독일인들은 1944년에 “스위스 내의 자유 독일”이라는 잡지를 간행했는데, 마이어 역시 여기에 참여한다.
전쟁 말기의 시기는 “낯선 곳으로의 귀향”이라는 장에서 다루어지고 있다. 1946년 한스 마이어는 프랑크푸르트 라디오 방송국의 주 편집자로 일하게 되었다. 그러나 미군정은 마이어와 같은 사회주의자가 방송 주편집자로 일할 수는 없다고 판단하여, 그를 방송국 밖으로 내쫓았다.
마이어는 당시 프랑크푸르트에서 새로 생긴 노동 아카데미의 강사로 일하며 생계를 이어간다. 그해에 라이프치히 대학 독문과는 마이어를 교수로 초빙한다. 그곳에서는 프링스 (Th. Frings), 코르프 (H. A. Korff), 크라우스 (W. Krauss) 그리고 에른스트 블로흐 (Bloch) 등이 교수로 일하고 있었다. 마이어는 이를 수용하여, 약 15년 동안 교수로 라이프치히에서 살아간다.
처음에는 모든 게 순조롭게 진행되는 것 같았다. (네 번째 장은 “라이프치히 혹은 양자택일”이라는 제목을 달고 있다.) 그러나 소련의 이데올로기가 동독에 뿌리를 내리고 있었고, 마이어는 싸움, 독단적 논쟁, 관청의 권위주의 등에 내적으로 갈등을 느낀다. 그럼에도 그의 마음속에는 더 나은 사회주의 국가가 재건될 수 있다는 희망이 떠나지 않았다.
적어도 라이프치히 대학의 강의실 40의 강단만큼은 마이어 자신이 스스로 부여한 완전한 자유의 공간이었던 것이다. 이 시기에 가르치고 글 쓰는 작업은 이상적으로 접목되는 것처럼 보였다. 마이어는 "토마스 만. 작품 그리고 발전 (Thomas Mann. Werk und Entwicklung)" (1950) 그리고 "리하르트 바그너 (Richart Wagner)" (1959) 등을 완성한다.
마이어는 1953년 동베를린 노동자 데모의 사건, 1956년 자유주의로부터 강경 일변도로 전환하는 동독의 문화정책 그리고 1961년 베를린 장벽의 건설 등을 냉철하게 서술한다. 강경 일변도의 문화 정책에 맞서는 것은 참으로 힘든 일이었다. 자유로운 태도를 취하던 브레히트는 1956년에 죽었고, 에른스트 블로흐는 1961년에 여행 중에 동독으로 귀환하지 않았다. 게다가 시인 페터 후헬 역시 소도시, 빌헬름스호르스트에서 감시받고 살아가고 있었다. 암담한 분위기에도 불구하고 마이어는 교육학자 케티 하리히 등의 친구들에게서 심리적 도움을 얻었다.
나아가 서독의 작가, 잉게보르크 바흐만, 한스 마그누스 엔첸스베르거 등은 마이어의 초대를 받고, 라이프치히로 향했다. 이로써 마이어는 당 문화 관료들로부터 빈축을 사게 된다. 1963년에 마이어는 해외로 여행하였는데, 이때 그는 -1955년에 동독 국가상을 받았기 때문에 해외여행에 어려움을 겪지 않았다- 더 이상 동독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마지막 장은 “나이든 희망”이라는 제목을 달고 있는데, 여기서 마이어는 “과연 내가 처벌당했는가, 구조되었는가?” 하고 묻는다. 1965년에 마이어는 잠깐 튀빙겐에 머물다가, 하노버로 거주지를 옮긴다. 당시에 하노버 대학은 인문 학부를 만들려고 계획 중이었다. 그러나 그곳에서도 문화 관료주의가 득세하여, 1973년에 마이어에게 정년퇴임을 강요한다.
그후 마이어는 세계 여행을 다니며, 바그너를 연구한다. 바그너에게서 독일 비참상에 대한 모티브를 발견하려고 했던 것이다. 1975년에는 "국외자 (Außenseiter)"가 간행된다. 이 책에서 마이어는 이른바 유대인, 동성연애자 혹은 흡혈귀로 상징화되는 여성 등에 대한 시민들의 편협한 입장을 예리하게 비판한다.
마이어의 회고록은 개인의 사적 삶의 차원을 넘어서, 20세기 유대인 지식인으로서, 어떻게 전체주의적 폭력으로부터 도주하여, 귀환 그리고 자신의 자유로운 존재를 드러내었는가 하는 점을 예리하게 보여준다. 물론 슈피겔 잡지의 창간 그리고 47그룹의 활동 등에 대해서는 주관적인 색채가 농후하기는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이어의 회고록은 1930년부터 1970년까지 이어지는 시대적 사건을 객관적으로 서술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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