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사회심리론

서로박: 일리치의 젠더 론 비판 (3)

필자 (匹子) 2021. 10. 12. 10:56

9. 젠더의 상실과 그림자 노동: 일리치의 이론에서 가장 중요한 사항은 자본주의와 시장의 발전으로 인한 “젠더의 상실”, 바로 그것입니다. 자본주의의 발전은 인간을 돈과 자본의 노예로 만들고 급기야는 남성과 여성의 고유한 일감을 차단시켰다고 합니다. 그리하여 젠더는 고유의 기능을 상실한 채 섹스의 개념으로 가치하락하고 말았다는 것입니다. 일리치는 토착적 젠더 사회에서 경제적 섹스의 사회로 이행되었다고 주장합니다.

 

특히 우리가 예의주시해야 할 사항은 일리치가 인간의 노동 가운데에서 돈 가치로 환산되지 않는 “그림자 노동”의 의미와 가치를 발견했다는 사실입니다. 이를테면 여성들의 가사 노동은 임금으로 지불받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림자 노동이 여성의 일감에서만 출현하는 것은 아닙니다. 남자들의 경우에도 임금으로 할당되는 노동이 있는가 하면, 임금 노동에서 배제되는 노동이 부분적으로 존재한다고 합니다.

 

자본주의의 교환 가치는 인간 삶에서 행해지는 모든 행위 가운데 다만 일부를 재화로 보상해주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인간 삶에는 돈으로 환산되지 않는 놀라운 절대적 가치가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일리치는 분명하게 지적합니다. 경제가 발전할수록, 그림자 노동은 증가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생산력의 극대화로 인한 여러 가지 수단들 (기계, 합리화 등)은 임금노동의 부분을 서서히 잠식하기 때문입니다. 임금노동은 시간이 흐름에 따라 그림자 노동의 빙산일각을 차지합니다. 문제는 이러한 그림자 노동의 범위를 넓혀나가는 자본주의의 경제 성장에 있습니다.

 

흔히 사람들은 경제 성장을 통해서 남녀평등이 실현되리라고 기대하는데, 이러한 기대감은 일리치에 의하면 하나의 망상에 불과하다고 합니다. 젠더의 상실을 피하고 남성과 여성 사이의 평등과 평화 공존을 달성하려면, 사람들은 경제 영역을 대폭 축소해나가지 않으면 안 된다고 일리치는 역설적으로 주장합니다. 다시 말해서 인간이 어떻게 해서든 자본주의의 이윤 추구의 생활방식으로부터 등을 돌릴 때 어떤 바람직한 평등의 구도는 서서히 성립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10. 이반 일리치의 전근대적인 여성관 (1): 어쨌든 우리는 일리치의 여성관에서 참으로 구태의연한 요소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가만히 고찰하면 일리치는 고대로부터 중세 초기로 이어지는 인간의 삶의 방식에서 가장 바람직한 삶의 범례를 발견하려 합니다. 남자는 밖에서 농사를 짓거나 사냥하고, 여자는 집에서 가사노동 아니면 아기를 키우면서 살아가는 것 – 이것은 일리히에 의하면 하나의 자연스러운 인간 삶의 방식이라고 합니다. 이러한 시각에는 현대적인 관점에서 젠더의 융통성이 결여되어 있습니다. 물론 자본주의가 사람들로 하여금 젠더를 상실하게 만든 것은 사실일 것입니다.

 

그렇지만 현대 사회에서 이전 사회의 젠더의 부활을 위해서 현대 문명의 모든 사항을 인위적으로 포기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오늘날 누구든 간에 성의 구분 없이 자발적 의지에 의해서 어떤 노동에 종사할 수 있습니다. 여기에는 독점 자본주의의 횡포라는 이데올로기만 작용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일리치는 남성과 여성의 일감이 구분되고, 남성과 여성의 신분이 하늘로부터 정해져 있다는 것을 하나의 바람직한 보편성으로 규정하고 있습니다.

 

그는 이러한 보편성 하에서 남성적 일감과 여성적 일감 그리고 구분된 남성성과 구분된 여성성이 바람직하다고 은근히 강권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입장은 오늘날 고도로 전문화된 민주주의 사회가 답습해야 할 바람직한 덕목은 아닐 것입니다. 물론 현대에 이르러 “임금 노동”은 줄어들고, 은폐되어 있던 “그림자 노동”이 재조명되고 있다는 전지구의 독점 자본주의로 인한 프레카리아트의 출현 등을 감안한다면, 일리치의 견해는 상당 부분 설득력을 드러내지만 말입니다.

 

11. 이반 일리치의 전근대적인 여성관 (II): 한마디로 우리는 『젠더』에 나타난 일리치의 입장이 아니라, 그의 전근대적인 시각을 비판해야 할 것입니다. 일리히의 책에서는 날카로운 체제 비판적 자세는 명시적으로 드러나지 않고 있으며, 오히려 가톨릭 고위사제의 관점에 의해서 여성의 삶을 추상적 사변에 의해서 기술할 뿐입니다. 그렇기에 그의 논리는 기독교를 벗어난 제3세계 정황을 모조리 포괄할 수는 없습니다.

 

이를테면 이스라엘에서 유대인 정교에 속한 여성들은 오늘날 얼굴을 감추어야 하고 대학에서 공부할 수도 없습니다. 남자들이 유유자적한 자세로 토라 경전을 공부하는 동안 여성들은 비참한 노동을 행하면서 연명하고 있습니다. 이들 앞에서 일리치가 여성의 본분을 외치면서 남녀의 구분을 설파하는 것은 이들에 대한 모독으로 여겨집니다. 이곳의 처녀들은 헛간에서 쪼그려 앉아서 힘들게 빵을 굽는 반면에, 남성은 이들이 가져다준 음식을 즐기면서 기도하고 토라 경전을 암송하는 것으로 소일합니다.

 

일리치의 책을 읽고 나면 우리는 다음과 같은 물음에 봉착하게 됩니다. 즉 과거 시대의 여성 문화는 과연 어떠한 척도에 의해서 보존해야 하는가? 하는 물음을 생각해 보세요. 어떻게 하면 여성들도 차별 당하지 않고 살아갈 수 있을까? 유감스럽게도 일리치는 이에 대한 해답 내지는 미래 사회를 위한 구체적 대안에 관해서 더 이상 사고를 개진하지 않습니다. 기껏해야 그는 생동감 넘치고 축제의 체제 내지는 기관을 존속시켜야 한다고 추상적으로 주장할 뿐입니다. 이는 물론 오늘날의 생태 공동체의 삶의 방식으로 이해될 수 있지만, 그의 비판은 새로운 대안을 위한 전제 조건으로서의 논의를 남기지 않고 있습니다.

 

12. 일리치의 과거지향의 반유토피아주의: 일리치는 단순하게 다음과 같이 언급합니다. “나는 어떠한 전략을 지니지 않고 있다. 어떤 가능한 처방에 관한 사변적 언급을 거부하고 싶다. 말하자면 나는 다만 과거에 무엇이 있었고, 현재에 무엇이 있는지를 독자에게 전할 뿐, 처음부터 미래에 관한 그림자를 설계하려고 하지는 않았다.” 이는 다음과 같은 논지로 설명될 수 있습니다. 태초에 진리가 있었는데, 남은 것이라고는 이러한 진리를 실천하면 족할 뿐, 어떠한 다른 대안이나 가능성은 불필요하다고 확신하는 논리를 생각해 보십시오. 이것은 플라톤의 재기억 Anamnesis의 사고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않고 있습니다.

 

그밖에 일리치는 공공연하게 다음과 같이 천명합니다. “미래 따위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그것은 사람을 잡아먹는 우상입니다. 제도에는 미래가 있지만, 사람에게는 미래가 없습니다. 오직 희망이 있을 뿐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미래에 대한 기대감을 처음부터 포기하려는 일리히의 불신을 분명히 인지할 수 있습니다. 즉 유토피아란 일리치에게는 더 이상 출현할 수 없는 인간의 망상이거나, 마치 파시즘 내지 스탈린주의와 같이 미래의 사람들을 눈멀게 하여서 끔찍한 파국으로 몰아가는 전체주의적인 슬로건에 불과한 것으로 간주될 뿐입니다. 유토피아에 대한 전체주의적 의혹 – 이것은 엄밀히 따지면 사람들을 망상으로 그리고 착각 속으로 나락하게 하는 허황된 천년왕국에 대한 비판일 뿐, 유토피아의 사고에 대한 본질적 비판으로 확장될 수는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