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사회심리론

서로박: 일리치의 젠더 론 비판 (1)

필자 (匹子) 2021. 10. 12. 10:56

1. 일리치의 젠더 이론의 앞모습과 뒷모습: 자고로 대부분의 이론은 “대상에 대한 직접적인 관점 intentio recta” 그리고 “이러한 관점에 대한 반성적 성찰 intentio obliqua”을 내용으로 하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사물에 대한 직접적인 인식 그리고 이러한 인식에 대한 성찰이지요. 그렇기에 우리는 어떤 특정한 이론의 두 가지 측면을 일단 구분해서 고려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를테면 일리치의 젠더 이론은 현대 문명을 다각도에서 비판하므로, 그 자체 존재 가치를 지닙니다. 실제로 일리치는 “최상의 것을 망치는 것이 가장 나쁘다. Corruptio optimi pessima”라는 말을 인용하면서, 현대 문명을 “신약성서의 내용이 완전히 파괴된 무엇”으로 규정하곤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의 젠더 이론의 경우 성찰의 측면을 고려할 때 여러 가지 문제점을 드러냅니다.

 

구체적으로 말씀드리건대 일리치의 서구의 문명 비판적 시각은 날카롭고, 상당 부분 수용할 무엇을 포괄하고 있습니다. 특히 그의 비판은 교회, 학교 내지 병원 체제로 향합니다. 테오도르 아도르노 Th. Adorno 그리고 루돌프 슈타이너 Rudolf Steiner를 제외한다면 이반 일리치만큼 서구 문명의 전체주의의 성향을 통렬하게 비판한 사람은 아마도 드물 것입니다. 그런데 일리치의 이론을 반성적으로 성찰할 때 우리는 부분적으로 어떤 취약점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가령 일리히의 찬란한 과거를 막연하게 동경하는 태도 그리고 여성의 체제순응의 삶을 미화하려는 태도 등이 그것입니다. 바로 이 점에 있어서 그의 책 『젠더』는 반성적 성찰의 측면에서 놀라운 문제점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2. 비역사적 낭만주의의 관점: 이반 일리치는 지금까지 철저하게 비역사적 낭만주의 관점에 입각하여 독자적으로 서구 문명을 비판해 왔습니다. 그가 발표한 책들은 놀라운 식견이 담긴 영역을 뛰어넘는 저작물임에 분명합니다. 이를테면 『학교는 죽었다』, 『의학의 네메시스』, 『자기 제한』 그리고 『엘리트에 의한 미성숙』등을 생각해 보세요. 이러한 일련의 저서들을 통하여 일리히는 엘리트의 전체주의의 사고 내지 정책에 의해 오늘날의 세계가 결국에 가서는 몰락을 맞이하리라는 것을 신랄한 어조로 경고하고 있습니다.

 

체제 내지 기관들은 개개인의 이득내지 관심사를 충분히 반영하는 게 아니라, 무엇보다도 권력지향의 속성을 지닌다는 게 일리히의 지론입니다. 이것들은 일리치에 의하면 결국 개인의 안녕보다는 체제 내지 기관, 급기야는 국가의 안녕을 최우선적으로 간주하는 전체주의적 의향을 실천에 옮긴다고 합니다. 이를테면 교사, 의사 그리고 건축가 등과 같은 오늘날의 엘리트에 대한 일리치의 발언은 날카롭고 공격적이지만, 약간 과장된 면이 없지 않습니다. 그는 다음과 같이 예견합니다. “20세기 말에 이르면 우리가 알고 있는 학교는 역사에서 완전히 사라지게 될 것이다. 아이들은 힐턴 하이스쿨 그리고 거대한 대학 건물의 폐허와 잔해 위에서 천진난만하게 뛰놀고 있을 것이다.” 결과론이기는 하나, 일리치의 예견은 아직도 실행되지 않고 있습니다.

 

3. 원시성과 이국적인 것의 찬양: 미리 말씀드리건대 일리치의 『젠더』는 부분적으로 지나간 사회에 대한 놀라운 번득이는 통찰력을 드러내고 있지만, 하나의 치명적 문제점을 보여줍니다. 그것은 다름 아니라 이반 일리치가 모든 원시적인 것 그리고 이국적인 것을 동경하면서, 그것들을 암묵적으로 찬양한다는 사실입니다. 지금 여기로부터 오래되고,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일수록 더욱 단순하고 훌륭하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황금의 시대를 동경하는 고대인과 유사한 자세 내지는 미래에 대한 철저한 무관심 등을 읽을 수 있습니다.

 

일리치의 이러한 태도는 물론 부분적 사항에 있어서는 현대인들의 심성을 자극하고, 때로는 즐겁게 하기도 합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일리히치 이론이 이른바 시민 사회의 염세주의의 학자들 (이를테면 퇴니스 그리고 슈펭글러 등)이 범한 역사 허무주의 내지 이른바 “눈물의 계곡”을 바라보는 가톨릭 사상가들의 현실에 대한 수수방관적 시각을 전적으로 보여주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지만 최근의 논문집 『젠더』는 이전에 발표된 문헌들과는 달리 이러한 긍정적인 효과를 전혀 드러내지 않고 있습니다. 그의 논지는 흥겹지도, 독창적이지도 않으며, 부분적으로는 물질문명의 풍요로움을 누리는 현대인의 마음속에 암울한 느낌을 안겨줍니다. 왜냐하면 그의 논지 속에는 현대의 삶이 아니라, 원시적 삶의 생활 방식이 바람직한 것으로 미화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4. 젠더 그리고 섹스: 『젠더』는 미리 말하자면 성과 젠더의 문제를 추적한 책입니다. 일리치는 젠더의 개념을 광의적으로 이해합니다. 다시 말해 “젠더 γένος”는 인간의 종(種)으로서 성을 포괄하는 개념입니다. 그렇기에 그것은 남성성과 여성성이라는 생물학적 범주를 함께 아우르고 있습니다. 남성성과 여성성은 젠더의 개념에 의하면 독자적이고 천부적이며 자연스러운 유형입니다. 이에 반해 그것들은 섹스의 개념에 의하면 강압적이고, 인위적이며, 부자연스러운 유형으로 설명될 수 있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일리치는 섹스를 남성과 여성의 똑 같은 유형의 쌍을 찍어내는 복합체로 이해하는 반면에, 젠더를 복제 불가능한 전체를 만들어내는, 각자 고유한 유형을 지니고 있는 복합체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문제는 일리치의 관심사가 역사의 과정에서 나타나는 “젠더의 상실”로 향한다는 사실입니다. 다시 말해서 인간이 어떠한 이유로 그리고 어떠한 과정을 거쳐서 고유한 종 (種)으로서의 젠더의 기능을 상실하고 성의 구분이 불분명한 섹스의 기능만을 행하게 되었는가? 하는 문제를 비판적으로 구명하는 작업이 일리치에게 가장 중요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