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사회심리론

서로박: 일리치의 젠더 론 비판 (4)

필자 (匹子) 2021. 10. 12. 10:57

13. 일리치의 과거 지향적 시각: 일리치의 상기한 시각은 수미일관 과거로 향하여 걸어가려는 독일의 소설가, 귄터 그라스의 퇴행적 걸음과 결코 다르지 않습니다. 아니, 일리치는 자신의 시각을 직접 하나의 게걸음에 비유하였습니다. 그는 언젠가 역사학자, 루돌프 쿠헨부흐 (Ludolf Kuchenbuch, 1939 - )의 “게의 비유”를 인용하면서, 자신의 과거 지향의 시각을 설명한 바 있습니다. 자고로 게는 눈 하나를 적으로 향한 채 뒷걸음질, 혹은 옆걸음질 칩니다. 마찬가지로 역사가의 눈은 현재의 난제로 향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과거에 대한 그의 관심사는 “현재의 문제점을 더욱더 낯설게 간파하기 위한 수단”이라는 것입니다. (박경미: 155쪽 참고). 일리치는 마치 게가 그러하듯이 현재에 하나의 눈을 고정시킨 채 다른 눈으로 과거로 향해 투시하고 있습니다. “현재의 낯설음”은 어떤 문제를 근원적으로 그리고 급진적으로 포착하기 위한 방편일 뿐, 더 나은 미래를 위한 구체적 대안을 찾기 위한 전초의 작업은 아닙니다.

 

이와 관련하여 우리는 다음의 사항을 분명히 깨달을 수 있습니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과거 지향적 유토피아를 서술하는 일일 뿐, 결코 남녀평등을 실천할 수 있는 구체적인 유토피아의 방안 내지 전략이 아니라는 점 말입니다. 사실 일리치는 언제나 미래에는 전혀 관심이 없다고 말하면서 자신의 반-유토피아주의의 입장을 노골적으로 표명한 바 있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그의 책 『젠더』는 부분적으로 혼란스러운 입장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일리히는 고대인들의 자생, 자활 자치를 찬양하는데, 여성들도 무언가를 자발적으로 결정하려는 욕구를 지니고 있었으며, 현재도 지니고 있다는 사실을 처음부터 끝까지 좌시하고 있습니다.

 

14. 일리치의 이론에 담긴 최소한의 구체적 유토피아: 그렇다면 일리히는 어떤 긍정적 가능성으로서의 구체적 유토피아를 한 번도 의식하지 않았을까요? 그렇지는 않습니다. 일리치는 최소한 제도가 아니라, 인간의 선한 마음에서 하나의 해답을 찾으려고 합니다. 그는 신의 선물인 판도라의 상자에서 모든 재앙이 빠져나갔듯이, “희망” 역시 빠져나갔다는 신화를 자주 언급합니다.

 

다시 말해서 판도라의 상자에서 빠져나온 것은 수많은 사악한 것들이었지만, 맨 마지막으로 빠져나간 것은 다름 아니라 희망이라고 합니다. 현대인은 이러한 희망의 끈마저 포기해서는 안 된다는 게 일리치의 지론입니다. 만약 인간이 정치의 측면에서 전체주의의 체제 그리고 경제적 측면에서의 자본주의의 경제 구도 등으로부터 자신의 삶을 일탈시킨다면, 만약 기독교 정신의 의미에서 “가난의 은총”을 자청해서 살아갈 자세가 되어 있다면, 인간은 어쩌면 부분적 측면에 한해서 마치 에피메테우스처럼 새롭게 부활할 수 있으리라고 합니다.

 

에피메테우스는 프로메테우스의 동생으로서 이전의 사항을 예건하는 자가 아니라, 나중을 바라보는 반신입니다. 적어도 에피메테우스는 문명 이후의 사회에 살아가야 하는 인간형의 전형을 그대로 보여줍니다. 그는 청렴을 자청하며, 자원을 아끼며 이웃을 사랑하며 살아가는 지혜로운 인간의 전형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일리히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전통 사회에서 가난은 “지혜로운 인간 Homo sapiens”을 탄생시켰다면, 현대 사회에서의 가난은 언제나 무언가 부족하다는 강박 내지 결핍감에 빠져 있는 “곤궁한 인간 Homo miserabilis”을 탄생시켰다고 합니다. 다시 말해서 모든 전체주의의 시스템의 간섭과 부자유의 질곡으로부터 떨어져 나온 자유로운 사람들은 비록 처음에는 일부의 영역이기는 하지만 소규모의 새로운 필라델피아 공동체 속의 자유를 맛보며 살아갈 수 있으리라고 일리히는 생각했습니다. 어쩌면 이러한 사고는 오늘날 생태학적 관점에서 현대인들이 수용하고 답습해야 할 자세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젠더의 상실을 극복할 수 있는 참신한 방안에 관해서 일리치는 여전히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습니다.

 

참고 문헌

 

 

 

- 박경미: 근대의 확실성을 넘어서, 실린 곳: 녹색평론, 통권 131, 7, 8월호, 152 – 169쪽.

- 이반 일리히: 그림자 노동, 박홍규 역, 미토 2005.

- 이반 일리히: 병원이 병을 만든다, 미토 2004.

- 이반 일리치: 위기에 처한 산업 문명, 쓸모없는 경제학, 실린 곳: 녹색평론, 통권 131, 2013, 7, 8월호, 130 – 151쪽.

- 이반 일리치: 젠더, 따님 2003.

- 이반 일리치: 과거의 거울에 비추어, 느린 걸음 2013.

- Ernst Bloch: Freiheit, ihre Schichtung und ihr Verhaeltnis zur Wahrheit in: ders. Philosophische Schriften, Frankfurt a. M. 1985, 573 - 597.

- David A. Gabbard: Silencing Ivan Illich: A Foucauldian Analysis of Intellectual Exclusion. Austin & Winfield, 1993.

- André Gorz: Kritik der ökonimischen Vernunft, Sinnfrage am Ende der Arbeitsgesellschaft, Zürich 2010.

- Günter Grass: Im Krebsgang. Eine Novelle, München 2004.

- Ivan Illich: „Genus. Zu einer historischen Kritik der Gleichheit“; Rowohlt Verlag, Reinbek bei Hamburg, 1983.

- Ivan Illich: Needs, The Developements Dictionary, ed. by Wolfgang Sachs, London 1992.

- Karl Polanyi: The Great Transformation. (독어판) Politische und ökonomische Ursprünge von Gesellschaften und Wirtschaftssystemen, 8. Aufl. Frankfurt 197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