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사회심리론

서로박: 프로이트의 도스토예프스키 (2)

필자 (匹子) 2021. 7. 20. 11:39

도스토예프스키에게는 양성의 소질이 주어져 있었다. 가혹했던 아버지에게 종속되지 않기 위해서는 격렬하게 자신을 보호해야 했다. 그가 지녔던 죽음의 증후는 자아에게는 자학적 충족이고, 초자아에게는 처벌을 위한 충족 즉 가학적 충족이다. 다시 말해 전자는 “너는 아버지를 대신하여 죽는 중”이고, 후자는 “아버지가 너를 죽이고 있는 중”이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신경증 역시 아버지의 죽음에 대한 욕망과 관계된다. 발작은 응징으로서 아버지의 죽음처럼 끔찍하고 두려운 것이다. (...) 그러나 한 가지 사항은 특이하다. 발작의 전 단계에서 승리감 내지 쾌감을 느낀다. 이렇듯 발작은 그에게 응징의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도스토예프스키는 아버지를 대신하는 존재가 자신에게 형벌을 가하도록 방임해 버렸다. 그는 아버지를 죽이고 싶다는 무의식적 욕망으로부터 결코 벗어날 수 없었다. 국가 그리고 신에 대해 자신의 행동을 결정한 것도 바로 자신의 마음속에 담긴 죄의식 때문이었다. 도스토예프스키는 특히 종교의 영역에서 비교적 자유로움을 견지할 수 있었다. 그는 그리스도의 이상을 통해서 죄에서 벗어나는 출구를 원했고, 자신의 고통을 내세우며 그리스도의 필요성을 주창하기도 했다. 그는 기독교와 무신론 사이에서 끊임없이 방황했다.

 

세계 문학사의 영원한 세 걸작, 소포클레스의 오이디푸스 왕, 셰익스피어의 햄릿, 도스토예프스키의 카라마조프의 형제가 모두 아버지 살해하는 주제를 다루고 있음은 우연이 아니다. 소포클레스의 작품에서 주인공은 아무런 의도 없이 아버지를 살해한다. 오이디푸스가 자신의 과오를 알게 되었을 때, 스스로 “운명의 장난” 때문이라고 자신에게 유리하게 변명하지 않는다. 셰익스피어의 경우 사건은 간접적으로 발생한다. 주인공 햄릿은 범죄자에게 복수하려고 하나, 그렇게 하지 못한다. 그를 방해하는 것은 어떤 놀라운 죄의식인 것이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소설은 이와는 약간 다르다. 주인공 드미트리는 아버지에게 살의를 품는다. 그러나 살해자는 그의 배다른 동생, 스메르쟈코프였다. 도스토예프스키는 자신이 마치 아버지 살해자라고 고백하듯이, 스메르쟈코프에게 자신의 이른바 간질 증세를 부여하고 있다. 또한 작가는 재판을 통해서 수사 과정을 조롱하고 있다. 누가 아버지를 살해했는가? 하는 문제는 작품에서 중요하지 않다. 모든 형제들은 죄인이었던 것이다. 도스토예프스키는 범죄자에 대해 말할 수 없는 애정을 느꼈다. 이는 동정의 수준을 넘어서는 것이었다. 그는 처음에는 정치범 종교 사범 등을 다루었다. 근원적 죄악인 아버지 살해를 다룬 것은 그의 말년이었고, 이로써 도스토예프스키는 문학적으로 고해하고 있었던 것이다.

 

도스토예프스키는 생전에 도박을 즐겼다. 빚을 갚기 위해 도박을 계속했다는 것은 다만 핑계에 불과했다. 오히려 그는 돈을 탕진한 뒤에 병적인 만족감을 느꼈다. 자신에게 욕설을 터뜨리고, 아내 앞에서 자신을 비하했으며, 아내로 하여금 자신을 경멸하게 만들었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아내는 다음과 같이 술회하였다. 남편의 창작이 가장 활발할 때는 모든 재산을 저당 잡혔을 때라고 말이다. 자신의 죄의식이 자신 스스로 가한 응징에 의해 해방되었을 때, 창작을 방해하던 금기가 사라졌기 때문이다. 도스토예프스키의 도박에 대한 강박증은 무엇인가? 이에 대한 해답은 다음의 소설을 읽으면 저절로 풀린다. 그것은 슈테판 츠바이크의 중편 소설 「한 여인의 24시간」이다.

 

나이든 품위 있는 여인이 작가, 츠바이크에게 자신의 경험을 털어놓는다. 그미는 과부로서 두 아들을 출가시키고 허전하게 살고 있다. 42세 되던 해에 모나코의 어느 카지노 앞에서 그미는 재산을 탕진한 젊은이를 만난다. 그는 절망감으로 자살할 것 같았다. 여인은 그의 자살을 막고 싶었다. 젊은이는 그미와 사랑을 나눈 뒤, 절대로 도박하지 않겠다고 약속한다. 그미가 이를 요구했던 것이다. 여인은 청년을 사랑하게 되었다. 함께 여행을 떠나기로 약속했으나, 여러 가지 작은 일들로 인하여 그미는 기차를 놓친다. 사라진 청년을 그리워하며 그미는 다시 카지노를 찾는다. 놀랍게도 거기에 청년이 도박에 빠져 있었다. 청년은 여행 약속을 어기고, 다시 도박장을 찾았던 것이다. 그는 빌려 받은 돈을 그미의 면전에 던지며, 꺼지라고 고함을 지른다. 결국 그미는 자리를 떠났는데, 나중에 청년의 자살 소식을 접한다.

 

도벽은 인간의 “자위행위 (Onanie)”와 무관하지 않다. 노름이란 어린이들이 방에 숨어서 성기를 만지작거리는 것과 동일하다. 견딜 수 없는 유혹, 멍멍한 쾌감 이후에 자리하는 죄책감과 자괴감, 이 모든 것은 판이 바뀌어도 그대로 남아 있다. 여인은 작품 속에서 어머니와 같은 존재다. 젊은이는 생각한다. “자위의 위험을 안다면, 어머니는 몸을 허락함으로써 나를 보호할 것이다.” 작품 속에서 청년은 여인을 창녀로 간주한다. 독자는 작품에 등장하는 과부 여인의 돌발적인 행동에 대해 의구심을 품는다. 어째서 정절을 지키며 살던 여인이 순간적 충동에 사로잡힐 수 있는가? 하는 게 그것이다. 그러나 이는 다음과 같이 설명될 수 있다. 여인은 고인이 된 남편을 생각하며 계속 정절을 지켜왔다. 그러나 그미는 감시 받지 않는 어느 낯선 공간에서 아들로 향하는 사랑의 전이 현상을 벗어날 수 없었던 것이다.

 

노름을 통해서 돈을 따는 경우는 없다. 마찬가지로 자위를 통해서 완전한 성적 만족을 얻지 못한다. 어쩌면 도스토예프스키는 자위에 대한 강박관념에 시달려 왔는지 모른다. 이러한 강박 관념이 그를 도박에 빠지게 했는지 모른다. 심각한 노이로제 증세 속에는 으레 사춘기 시절의 자위행위를 통한 경험이 담겨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