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 동구러문헌

서로박: 도스토예프스키의 '백치' (2)

필자 (匹子) 2019. 1. 17. 06:12

 

7. 사랑의 깊이를 깨닫는 나스타시아: 나스타시아는 참된 사내를 알아볼 줄 아는 혜안을 지닌 정열적인 여성이었습니다. 그미는 그의 경험담을 들은 뒤에 “공작이야 말로 진정으로 사랑할 수 있는 남자이다.”라고 굳게 믿습니다. 그리하여 그미는 가냐 제후와의 약혼을 미루고 파기한 다음에 므이시킨 공작과 함께 성 페테르부르크 외곽에 위치한 별장에서 여름을 보냅니다. 이 시점에서 그미가 주인공과 육체적으로 깊은 관계에 빠진 것은 아닙니다. 친애하는 D, 지금까지 그미 주위에는 자신을 따라다니던 남자들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그미는 이들을 자신의 아름다움에 매혹된 남정네들이라고 간주했을 뿐입니다. 나스타시아는 지금까지 한 번도 마음에 드는 남자를 만나지 못했습니다. 그렇지만 므이시킨 공작은 달랐습니다. 그래서 그미는 주인공에게서 깊은 연정을 느낍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미는 자신의 사랑을 쟁취하려고 결심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사랑하는 임의 행복을 위하는 게 무엇보다도 중요했기 때문입니다. 이로 인하여 나스타시아는 공작에 대한 사랑의 감정과 이룰 수 없는 사랑 사이에서 쓰라린 고통을 느끼며 방황합니다. 게다가 나스타시아는 자격지심에 못내 괴로워합니다. “나는 그 분보다 나을 게 없어.” “공작만큼은 아글라야와 행복하게 살아야 해.” 결국 나스타시아는 사랑하는 임을 위하여 로고친과 마음에도 없는 결혼식을 올리려고 결심합니다.

 

 

 

판토마임 백치. 클라우스 킨스키의 열연이 돋보인다.

 

8. 아글라야의 질투심: 다른 한편 아글라야는 주인공이 나스타시아를 대하는 모습을 보고, 엄청난 질투심에 사로잡힙니다. 처음에 공작은 그미의 눈에는 가련한 기사처럼 보입니다. 실제로 아글라야는 돈키호테를 묘사한 푸시킨의 시 「가련한 기사」의 시구를 떠올리면서, 이타주의의 방식으로 어리석게 행동하는 므이시킨 공작에게 조소를 터뜨리면서도 어떤 연민의 정을 느낍니다. 그미의 동정심은 서서히 강렬한 사랑의 감정으로 바뀝니다. 아글라야는 지금까지 한 번도 누군가를 깊이 사랑해본 경험이 없는 귀족 처녀였습니다. 그렇기에 공작과 나스타시아에 대한 자신의 질투심을 스스로 감당해내지 못합니다. 미리 말하자면 경험 없는 처녀의 질투의 감정이 결국 자신의 애틋한 사랑을 끝내 파멸시키고 맙니다. 이를테면 그미는 나스타시아가 공작과 육체관계를 맺었다고 지레짐작합니다. 문제는 아글라야가 일견 온갖 사내들과 놀아난 것처럼 보이는 여자와 법적 투쟁을 불사하려는 태도에 있었습니다. 공작을 차지하기 위한 아글라야의 이러한 태도는 일견 당연하게 보였지만, 몰인정한 처사나 다름이 없습니다. 이때 므이쉬킨 공작은 다시금 나스타시아를 두둔하고 나섭니다. 아글라야는 제후의 딸로서 부유하게 살지만, 나스타시아는 가난하고 불쌍한 여성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이때 아글라야는 어처구니없는 공작의 태도에 실망감을 금치 못합니다. 그 후에 자존심에 깊은 상처를 입은 그미는 주인공으로부터 영원히 종적을 감추어버립니다.

 

 

9. 비극이 발생하다: 므이쉬킨 공작은 나스타시아에게 결혼을 신청합니다. 주인공에게 결혼이란 무소유의 행위나 다름이 없었습니다. 스위스에서 병든 마리를 도와주었듯이, 이번에는 (사랑하는 임의 행복을 위하여 임을 떠나려고 결심하는) 나스타시아를 아무런 조건 없이 돕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소설은 비극적으로 끝을 맺습니다. 나스타시아는 주인공과 결혼하기 직전에 로고친에게 향합니다. 이전의 모든 관계들을 깨끗하게 매듭지어야만, 공작과 결혼할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므이쉬킨 공작 역시 그미를 찾으려고 로고친의 집으로 달려갑니다. 로고친은 주인공이 보는 앞에서 자신을 배신했다는 이유로 나스타시아에게 향해 칼을 뽑아듭니다. 그미는 로고친의 칼에 찔려 그 자리에서 즉사합니다. 므이쉬킨 공작은 순간적으로 엄청난 충격을 받고 기절합니다. 다음날 아침 사람들은 나스타시아의 시체 옆에서 쓰러져 있는 공작을 발견합니다. 공작은 그미의 시신 앞에 엎드린 채 넋 나간 듯이 그미의 뺨을 쓰다듬고 있습니다. 나중에 로고친은 살해 혐의로 15년 구금 형을 받고 어디론가 끌려갑니다. 그런데 우리의 주인공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므이쉬킨 공작은 요양원으로 되돌아갑니다. 그의 의식은 세상의 모든 어처구니없는 모순에 방해받은 채 서서히 꺼져 갑니다.

 

 

 

 

10. 파르치발, 바보 예수: 친애하는 D, 므이시킨 공작은 러시아의 파르치발이며, 바보 예수와 다를 바 없습니다. 러시아 귀족들의 간계와 술수 등으로 인하여 그의 순수성, 솔직함, 고결한 명예 그리고 고결한 인간성 등은 그야말로 치명상을 입게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인공은 돈과 명예를 앞세우는 귀족들의 타산적인 사고에 정면으로 대응하면서, 인간애의 이상을 내세웁니다. 사람들은 한편으로는 그의 정직성 그리고 선한 마음에 대해 경탄을 터뜨리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그를 백치로 몰아세웁니다. 자신의 분명한 입장을 정하지 않고, 모든 사항에 개입하는 주인공을 우유부단한 사내로 간주하였습니다. 그는 나스타시아와 아글라야에게 동시적으로 사랑의 감정을 느끼지만, 사회적 인습의 관점을 고려하여 행동하지 못합니다. 만약 그가 사회적인 인습을 고려했다면, 결코 나스타시아를 선택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만약 아글라야와의 사랑을 실현시켰다면, 그는 나스타시아의 내면에 도사린 폭력과 내적인 갈등을 자신의 삶으로 받아들이지 않았을 것이고, 그리고 정신착란에 빠지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11. 성숙하고 해방된 여성, 좌절을 맛보다: 그렇다면 나스타시아의 입장에서 고찰할 때 그미의 사랑은 어떻게 이해될 수 있을까요? 그미는 로고친의 소유욕에 근거한 육체적이고 열정적인 사랑 그리고 므이시킨 공작의 아가페의 사랑 사이에서 어떤 하나를 선택할 수 없었습니다. 말하자면 나스타시아에게는 사랑은 육체적 결합이면서도 동시에 정신적 심리적 결합이었던 것입니다. 그렇기에 그미는 몸 따로, 마음 따로 구분된 사랑을 실천할 수 없었습니다. 친애하는 D, 도스토예프스키는 19세기 말의 러시아 현실을 배경으로 삼았지만, 등장인물들이 겪는 사랑의 갈등은 어쩌면 초시대적인 것일지 모릅니다. 분명한 것은 다음의 사항입니다. 즉 우리는 등장인물 어느 누구를 단죄할 수도 그렇다고 해서 그들의 행동을 찬양할 수도 없을 것입니다. 등장인물들은 19세기 러시아라는 관습 도덕 그리고 법의 틀 내에서 자신의 사랑의 삶을 실천하고 해결하려고 노력했습니다. 우리는 이들을 동해서 자신이 처하고 있는 현재의 정황을 성찰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