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 근대불문헌

서로박: 페늘롱의 베티카, 살렌트 (1)

필자 (匹子) 2023. 4. 6. 09:01

1. 페늘롱의 소설: 미리 말하지만 페늘롱의 소설 『텔레마크의 모험』속에는 두 개의 유토피아 모델이 내재해 있습니다. 그 하나는 “베티카”라는 공동체 모델이며, 다른 하나는 “살렌트”라는 국가 모델입니다. 이것들은 상호 보완적으로 기능하며, 동시에 유토피아 역사에서 생략될 수 있는 부분을 제각기 보충해주고 있습니다. 페늘롱의 작품은 오늘날 18세기 초의 프랑스 문학의 고전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페늘롱의 작품이 발표될 무렵 이를 예언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이 작품은 부르군드 공작이자 루이 14세라고 불린 황제의 큰아들의 교육을 위해 구상되고 발표되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작가는 바람직한 제후가 되려면 어떠한 덕목을 갖추어야 하는가? 하는 물음을 소설 속에 담았던 것입니다. 그렇기에 그것은 한마디로 “거울에 비친 제후의 상”으로 비유될 수 있습니다. 작품 『텔레마크의 모험』이 발표되자마자, 페늘롱은 안타깝게도 엄청난 스캔들에 휘말리게 됩니다. 프랑스 황제와 그의 측근들은 이 작품을 절대주의 왕권과 이를 휘두르는 권력자들에 대한 은밀한 풍자의 문헌으로 간주하였던 것입니다. 실제로 루이 14세는 바로 그 시점에 이르러 페늘롱에 대한 극심한 반감을 품었으며, 자신의 왕위를 계승해야 할 손자가 1712년에 불과 서른 살의 나이에 사망했을 때, 왕자의 모든 글들 그리고 그를 가르친 은사들의 모든 문헌을 직접 불태웠다고 합니다.

 

2. 루이 14세 비판: 추측하건대 루이 14세는 내심 페늘롱을 자신의 숨어 있는 가장 완강하고도 끈덕진 정적(政敵)으로 간주한 게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페늘롱은 절대주의에 대한 노골적인 비판을 겉으로 드러낼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왕 앞에서 비판적인 발언을 행하게 되면 자신의 목을 내놓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1694년에 캄브라이 지역을 관장하는 대주교가 된 다음에 루이 14세에게 보내려고 하던 페늘롱의 편지는 오늘날 전해 내려오는데, 여기서 우리는 절대왕정에 대한 페늘롱의 비판을 재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 편지는 끝내 루이 14세에게 송달되지 못했습니다.

 

“약 30년 전부터 당신이 임명한 장관들은 당신의 권위를 하늘보다 높이 설정하기 위해서 법 규정 그리고 모든 공공연한 국가시험 등과 같은 질서를 완전히 뒤집어 놓아버렸습니다. 이로 인하여 모든 권력은 오로지 당신의 손에 쥐어지게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더 이상 국가와 국법을 언급하지 않고, 오로지 대왕 폐하만 언급하며 백성들에게 폭정을 가했습니다. (...) 1672년에 수많은 지방에 화염에 휩싸이고, 아름답던 도시와 마을은 잿더미로 화하게 되었습니다. 이 모든 끔찍하고 슬픈 결과는 당신의 이름으로 행해진 전쟁 때문입니다.” (Saage: 75).

 

3. 페늘롱의 이력: 페늘롱은 신교와 구교 사이의 종교적 갈등이 극심한 시대에 살았습니다. 그런데 어째서 그가 앙시앵레짐 하의 정치 권력자 그룹 근처에 머물면서 기존하는 권력 체제를 노골적으로 문제 삼았을까요? 일단 페늘롱의 이력을 약술해 보겠습니다. 1651년 8월 5일 프랑스와 페늘롱은 샤토에서 지방 귀족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그의 조상은 높은 신분을 지니고 있었지만, 급변하는 정세의 여파로 가난을 면치 못하고 있었습니다.

 

1672년 고향에서 학교를 졸업한 페늘롱은 파리의 신학교에서 공부하다가 4년 후에 수사로 서품된 다음에 “새로운 가톨릭 Nouvelles Catholiques” 학교의 교장으로 봉직하게 됩니다. 당시에 프로테스탄트를 신봉하는 위그노들은 신변의 위협을 느끼고 가톨릭으로 개종하곤 하였습니다. “새로운 가톨릭” 학교는 가톨릭으로 개종한 이들의 딸의 교육을 담당하기 위해 설립된 학교였습니다. 당시, 그러니까 1685년 무렵에 루이 14세는 낭트 칙령을 취하하고, 주로 상업에 종사하는 위그노 교도들을 정치적으로 탄압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때 페늘롱은 가톨릭교도들의 근엄하고 완강한 태도를 유연하게 변화시키려고 노력하였습니다.

 

4. 참된 교육자, 페늘롱: 물론 페늘롱은 프로테스탄트의 교리를 용인하지 않았으며, 가톨릭의 신앙적 판단에 이의를 제기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그는 가톨릭의 고위 공직자들이 신교도를 강제로 개종시키는 완강하고도 철저한 정책에 대해서 반대 입장을 표명하였습니다. 새로운 가톨릭 학교에서의 교육적 경험을 통해서 페늘롱은 1687년 「소녀 교육에 관한 논문 Traité de l’éducation des filles」을 발표하였습니다. 이 책에서는 소녀들이 어떻게 종교적으로 교육받아야 하는가? 하는 내용이 교육자적 시각에서 체계적으로 서술되고 있습니다. 페늘롱의 논문은 프랑스 전역에 알려지게 되었으며, 결국 어느 주교의 추천으로 루이 14세의 큰손자의 교육을 담당하게 됩니다. 이로써 그는 약 9년 동안 황실 자제의 교육을 담당하는 은사로서의 특권을 누리게 됩니다.

 

실제로 페늘롱은 놀라울 정도로 피교육자의 수준과 관심사를 예리하게 꿰뚫어보는 능력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당시 황태자는 매우 고집스럽고 걷잡을 수 없이 막무가내로 행동하는 아이였는데, 페늘롱의 노력으로 부드러운 심성을 갖추고 자기 자신을 다스릴 줄 아는 젊은이로 거듭나게 됩니다. 이로 인하여 페늘롱은 처음에는 루이 14세의 총애를 받기도 하였습니다. 당시에 페늘롱은 교육을 위해서 상당히 많은 글을 써서 발표했는데, 이로 인하여 왕궁에서 그리고 일반 대중들에게 많은 호평을 받게 됩니다. 1693년 페늘롱은 프랑스 아카데미의 회원이 되었으며, 2년 후에는 캄브레이 지역의 대주교로 발탁됩니다.

 

5. 페늘롱의 말년의 삶: 물론 교육자로서의 그의 경력은 이른바 정적주의 논쟁으로 참혹하게 꺾이게 됩니다. 이미 1688년에 기용이라는 이름을 지닌 마담과 친교를 맺었으며, 그미의 “”순수한 사랑에 관한 이론“에 매료됩니다. 기용 부인은 신비주의자로서 질서의 고수를 종교의 합법적 근원으로 이해하지 않았습니다. 신앙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기용 부인에 의하면 오로지 사랑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왕궁의 학자들 가운데 특히 작 베니뉴 보쉬에 J. B. Bossuet는 가톨릭 독단론에 입각하여, 기용 부인의 입장을 신랄하게 비난하였습니다. 이때 페늘롱은 기용 부인의 입장을 옹호하는 논문을 써서 발표하게 되는데, 이로써 보쉬에와의 관계가 상당히 나빠지게 됩니다. 페늘롱에게 정치적 경력을 쌓게 하는 길을 열어준 사람은 보쉬에였는데, 보쉬에는 자신의 은덕을 배반하고, 기용부인을 두둔하는 페늘롱을 서서히 정치적 적대자로 간주하기 시작합니다.

 

자고로 권력자의 눈에 미운 털로 박히게 되면, 추락하는 것은 기정사실이나 다름이 없었습니다. 결국 페늘롱은 대주교의 자리에서 쫓겨나고, 그의 양친 역시 궁궐을 떠나야 했으며, 군인으로 일하던 그의 조카 역시 근위대에서 추출 당하게 됩니다. 여기에 간접적으로 작용한 것은 페늘롱의 신앙과 철학적 사고에 이의를 제기한 보쉬에의 탄원서, 바로 그 한통이었습니다. 1699년 루이 14세는 페늘롱으로 하여금 모든 직책을 물러나게 하고 귀양을 보냅니다. 페늘롱은 1715년 귀양길에서 마차 사고를 당하게 되어 사망합니다.

 

6. 페늘롱의 전원적인 상 베티카 그리고 이후의 영향: 작품 『텔레마크의 모험』이 간행된 해는 1699년이었습니다. 로마 교황청이 페늘롱을 옹호하는 소견서를 발표하였고, 베르사유에서 그의 대주교 직위가 박탈된 바로 그 해에 작품이 간행되었습니다. 어느 출판업자는 페늘롱의 의사와는 반대로 작품을 간행하였습니다. 물론 루이 14세는 페늘롱의 작품이 프랑스 지역에 배포되는 것을 철저히 금했고, 페늘롱이 죽은 뒤엔 1717년에야 비로소 작가의 수정 판본이 발간되었지만, 어느 누구도 유럽 전역에 펴진 그의 작품들을 모조리 회수할 수는 없었습니다. 심지어 프랑스의 야권 세력은 페늘롱의 작품을 절대주의를 비판하는 진보적인 문헌의 대표적 문헌으로 채택하였습니다. 그렇기에 왕궁으로서도 더 이상 페늘롱의 작품 배포를 막을 수 없었습니다.

 

게다가 『텔레마크의 모험』에 묘사된 유토피아의 상은 이후의 사상가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쳤습니다. 이를테면 루소는 선한 삶 그리고 이국적인 생활 속에 담긴 무위의 삶 등을 상상하곤 하였는데, 여기에 영향을 끼친 것은 바로 페늘롱의 소설이었습니다. 이를테면 루소는 페늘롱의 작품에서 묘사된 “베티카 Bätica”라는 전원적 장면을 자주 언급하였습니다. 물론 루소가 페늘롱의 다룬 목가적인 향락을 반정치적인 향수를 불러일으킨다는 이유로 퇴행적이라고 폄하한 것은 사실입니다.

 

실제로 페늘롱의 베티카 장면은 아나크레온 주의의 열광을 부추기기 때문에 정치적 의미에서의 진보적 관점을 도출해낸다는 것은 사실상 어렵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페늘롱의 유토피아 소설은 왕정 체제에 반대하는 의미로 활발하게 수용되었습니다. 18세기 프랑스 문학을 전제로 한다면, 볼테르를 제외하면 페늘롱만큼 체제비판적인 작가도 없었습니다. 이렇듯 『텔레마크의 모험』이 정치적 진보의 분위기를 가열시킨 것은 사실입니다. 그렇기에 문학사의 거시적 관점으로 고찰하면, 프랑스와 페늘롱은 진보적 혁명을 부추긴 선구자의 반열에 오르는 것은 어쩌면 당연할지 모릅니다.

 

7. 오디세이의 아들, 『텔레마크의 모험』: 미리 말하자면 작품은 제후의 거울상으로 이해될 수 있으며, 나아가 교육소설의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작품의 영향력이 정치적으로 이어진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 모릅니다. 작품은 그리스 신화를 매개로 하지만, 고대 작가 (호메로스, 베르길리우스, 오비디우스, 플리니우스 리비우스 등)의 문헌에 의존하고 있습니다. 페늘롱은 호메로스의 『오디세이』 네 번째의 노래에 이어서 오디세이의 아들 텔레마크의 모험을 다루고 있습니다. 그는 아버지를 찾으려고 이곳저곳으로 여행을 떠납니다. 이를테면 텔레마크는 팔라스 아테네가 보낸 멘토어라는 이름을 지닌 스승의 도움을 받으면서, 에스파냐의 목가적인 전원 속에 자리하고 있는 이상적 공동체, 베티카를 접하게 됩니다. 이탈리아 남부 지역인 칼라브리아에 위치한, 페늘롱에 의해서 창안된 가상 도시, 살렌트의 이모저모를 시찰하기도 합니다.

 

텔레마크는 (지금의 레바논 지역에 해당하는) 티로스 지역의 전제 군주의 잔인무도한 폭력을 알게 됩니다. 독재자 피그말리온이라는 인물은 마치 루이 14세의 모습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습니다. 수많은 경험을 통해서 텔레마크는 자신의 고향 이타카를 다스릴 수 있는 이상적 군주의 특성을 하나씩 체득해 나갑니다. 이를 고려하면 『텔레마크의 모험』은 훗날에 출현하게 되는 교양 소설의 고전적 본보기로 간주될 수 있을 것입니다.

 

(2 3으로 계속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