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 근대불문헌

서로박: 푸리에의 팔랑스테르 (1)

필자 (匹子) 2022. 4. 26. 11:36

1. 푸리에는 허튼 소리를 내뱉는 기인으로 이해되었다: 친애하는 F, 유토피아 사상가 가운데에서 샤를 푸리에 (1772 - 1837만큼 세인들로부터 노골적이고도 악랄한 비난을 감수하는 사람은 아마 없을 것입니다. 사람들은 그를 “기괴한 인간”, “가정 파괴범”, “체제파괴적인 반정부주의자”, “음탕한 속물”로 규정하였습니다. 사실 푸리에는 참으로 황당무계한 논리를 전개하였습니다. 그는 케플러의 천체 법칙에 의거하여, 혹성들 사이의 비밀스러운 교신을 거론하였고, 북극성에서 나오는 안달루시아의 열기가 액체를 토해낸다고 주장하였습니다.

 

북극에서 품어 나오는 방향유를 통해서 바닷물을 레몬주스로 변화시킬 수 있다고 말하기도 하였습니다. 게다가 정어리, 청어 그리고 조개류가 바다 속의 모든 해로운 동물들을 무찌르며, 반-상어, 반-고래가 나타나서 사람들의 이동을 편리하게 해주리라고 예언하기도 하였습니다. 사실 푸리에의 이러한 발언은 그 자체 기상천외한 상상의 궤변이나 다를 바 없습니다. 그렇기에 혹자는 푸리에의 주장을 “허튼소리”라고 단정하였으며, 혹자는 그의 문헌을 “백치의 기록”이라고 매도하였습니다.

 

2. 페미니즘, 생태 공동체 그리고 도시 계획의 선구자: 그렇지만 푸리에는 오늘날 놀랍게도 페미니즘, 생태 공동체 운동 그리고 도시 계획을 위한 건축의 영역 등의 선구자로서 새롭게 인정받고 있습니다. 이는 19세기 유럽 사회에 대한 푸리에의 정확한 진단과 관련됩니다. 푸리에는 19세기의 문명사회를 가장 철저하고도 노골적으로 비판했습니다. 말하자면 문명 속에서 “가치 전도된 자연 현상”을 예리하게 투시한 사람이 바로 푸리에였습니다.

 

19세기 산업 사회는 그에게 “모든 악덕이 조직적으로 발전된 공간”으로 비쳤습니다. 자본가는 경제적 향상과 이윤추구를 지상 최대의 관건으로 간주하였고, 사회 하층민의 가난과 부패는 극한에 달하게 됩니다. 인간과 인간의 자연스러운 관계는 금전 거래에 의해서 파괴되었는데, 특히 농부와 여성들이 서서히 노예 신세로 전락하게 됩니다. 푸리에는 자본주의의 생산 양식이 만인에 대한 만인의 전쟁을 불러일으킨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가장 심각한 것은 여성들이 마치 가축처럼 살아가고, 자연의 황폐화로 인하여 생태계가 파괴되며, 상업과 공장지대로 인하여 인간의 의식주의 공간이 사라진다는 시실이었습니다.

 

3. 연방적인 자치 공동체 팔랑스테르: 상기한 사항은 푸리에로 하여금 19세기 중엽 프랑스에서 연방주의의 자치 공동체 팔랑스테르를 설계하게 하였습니다. 당시 프랑스는 산업 혁명의 여파를 영국으로부터 맞이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일반 사람들의 생활환경은 여전히 열악했습니다. 대도시 파리에는 밤낮으로 쥐들이 우글거렸으며, 쥐와 함께 빈민가를 가득 채웠던 사람들은 가난한 노동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도시는 사람들을 자유롭게 만든다.”라는 소문을 듣고, 지방으로부터 올라온 무산계급이었습니다.

 

말이 근로자이지, 그들의 삶은 너무나 비참하기 이를 데 없었습니다.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모두 수공업에 매달렸는데, 미성년자들까지 하루 최소한 14시간 혹은 그 이상 일해야 했습니다. 여성의 경우 대도시에서 살아가려면 또 다른 방법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다름 아니라 몸을 파는 것이었습니다. 가난한 젊은 여성들은 파리의 밤에 골목길에서 호객 행위를 일삼았습니다. 푸리에는 산업이 인간으로 하여금 참담한 노동에 시달리게 만든다는 사실을 직시하였습니다.

 

4. 노동과 성의 아우르기: 푸리에는 평생 노동과 성을 서로 화해시킬 수 없을까 하고 고뇌했습니다. 말하자면 그는 사람들이 경제적으로 윤택하고 에로스를 향유하기를 강렬하게 꿈꾸었던 것입니다. 노동이 쾌락이 되고 쾌락이 노동이 되는 인간의 행위는 바로 푸리에의 이상이었습니다. 근엄한 퓨리턴주의와 금욕적 반-향락주의가 여전히 존속하는 오늘날 사회주의를 지지하는 무신론자조차도 관능과 경제는 서로 구분되어야 한다고 강하게 주장하고 있습니다. 노동은 노동이고, 성적 향유는 성적 향유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입장이 팽배한 곳에서는 푸리에의 이론이 제대로 먹혀 들어갈 리 만무합니다. 게다가 푸리에의 사상은 마치 학문적 연구의 가치가 없는 것과 같은 황당무계한 내용을 담겨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렇기에 푸리에의 저작물은 향락주의의 헛소리로 매도되곤 하였습니다. 푸리에는 산업의 발전으로 인해 태동한 상업을 무엇보다도 저주하였습니다. 왜냐하면 장사꾼은 오로지 돈을 버는 데 혈안이 되어 있으며, 상행위는 파산, 매점, 투기 자본의 축소 등을 통해서 사회를 교란하는 일감이라는 것이었습니다. 문명사회 내에서 상업과 산업은 푸리에에 의하면 조화로운 질서를 창출하는 것이 아니라, 오리혀 사회의 질서를 파괴합니다.

 

5. 상인으로서의 실패한 삶: 푸리에는 경제적 삶에서 실패에 실패를 거듭했습니다. 말하자면 돈이 그의 삶을 비켜갔다고나 할까요? 베상송에서 직물 상인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13세에 부친상을 당했습니다. 어머니는 돈을 아꼈고, 너무 신앙에 매달려 있었습니다. 그는 공무원이 되고 싶어 했지만, 귀족이 아니라는 이유로 실현 불가능했습니다. 그래서 외판 상인이 되어 전국을 떠돌아다니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때 프랑스 혁명이 발발했습니다. 푸리에는 아버지가 남겨둔 유산의 절반으로 식민지에서 유입된 물건을 사두었습니다. 리용에서 이 물건을 보관해 두려고 했을 때, 상품들은 군대에 의해 몰수당하고 맙니다. 게다가 푸리에는 밀매 상인이라는 이유로 감옥에 갇혀 사형선고를 받습니다. 그가 지롱드 당의 편에 서서 폭동에 가담했다는 것이 판결의 이유였습니다. 이때 자코뱅 당에 가담했던 사촌의 도움으로 간신히 풀려나지만, 순식간에 군에 끌려가 라인 강 전선에 배치됩니다.

 

그 사이에 푸리에의 삼촌은 아버지 유산의 절반을 어딘가에 투자해버립니다. 출병 후 푸리에는 마르세유로 가서 그곳에서 상업 연수 및 부동산업을 시작합니다. 미국의 무역 회사, 어느 백화점의 경리 등 무엇을 하든지 닥치는 대로 일했으나, 그에게 주어진 것은 지속적인 실패였습니다. 어머니가 사망한 후 푸리에는 어머니의 유산으로 매달 약간의 생활비를 받게 됩니다만, 그 돈으로는 살 수도 죽을 수도 없었습니다.

 

6. 말년의 삶: 1816년부터 1820년까지 그는 탈리쉬에라는 시골에 은둔하며 살아갑니다. 이때 그의 주요 저서인 『새로운 사랑의 세계로부터 Le nouveau monde amoureux』를 집필합니다만, 어느 누구도 그의 원고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습니다. 파리에서 찾아온 사촌 여동생과의 비밀스러운 애정 관계는 그의 머리를 매우 혼란스럽게 만듭니다. 모든 게 수포로 돌아가고, 결국 어디론가 잠적해야 했습니다. 푸리에는 평생 혼자 살았으며, 때때로 일회용 사랑을 돈으로 구매하곤 하였습니다.

 

그는 하루 네 시간 일하고 나머지 시간을 화원에서 지냈습니다. 그는 평생 남의 집에 세 들어 살았는데, 그의 거주 공간에는 화분으로 가득 차 있어서 발 디딜 틈이 없었다고 합니다. 여담이지만, 그는 식성 또한 까다로웠습니다. 대부분 프랑스인들이 잘 먹는 개구리 요리 그리고 면 종류의 요리를 거의 증오하다시피 했다고 합니다. 말년에 이르러 그의 주위에는 젊은이들이 가르침을 받으려고 모여들었습니다. 1832년에 제자 한 사람이 람뷔에 근처에서 500 헥타르의 땅을 구매하여 공동체를 건설할 계획을 세웠을 때, 푸리에는 공동체 건설의 제안을 받았습니다. 이때 그는 거절했습니다. 왜냐하면 공동체의 계획이 자신이 뜻하던 바와 달랐기 때문이었습니다.

 

7. 사랑, 농업 그리고 소규모의 생산조합: 친애하는 F, 푸리에는 대학 문턱도 넘지 않은 독학파였습니다. 그은 혼자서 책을 읽으면서 엄청난 지식을 쌓은 입지적인 인물입니다. 푸리에의 사상은 「네 개의 운동과 보편적 규정에 관한 이론 Théorie des quatre mouvements et des destinées générales」 (1808), 「우주의 일원성에 관한 이론 Théorie de l’Unité universelle」 (1822) 그리고 그의 논문 「새로운 산업의 세계와 사회 Le nouveau monde industriel et sociétaire」 (1829) 등에 반영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원고들은 오랜 시간 동안 출판사의 서랍 속에 묵혀 있었습니다.

 

그의 전집은 푸리에의 사후 130년 이후인 1966년에 비로소 처음으로 간행되었습니다. 푸리에는 비참하게 사는 주위 환경을 극복하기 위하여 어떤 더 나은 세계를 찬란하게 상상했습니다. 그가 가장 깊이 숙고한 것은 오로지 사랑이었습니다. 삶의 모든 사상은 푸리에에 의하면 인간에 대한 사랑으로 출발합니다. 애호, 이해심, 협동 그리고 상호부조의 정신 등은 푸리에가 강조한 사항이었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푸리에의 유토피아의 세계는 농업 그리고 산업의 생산 조합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이 조합은 오로지 인간과 인간 사이의 열정에 의해서 영위되는 것입니다. 푸리에는 에너지로서의 쾌락을 무엇보다도 중요한 무엇으로 생각하였습니다. 쾌락은 푸리에에 의하면 하나의 에너지원입니다. 만약 사람들이 즐거운 마음으로 쾌락을 유용하게 활용한다면, 모든 사회적 움직임은 아무런 마찰 없이 그리고 문제없이 진행되리라고 합니다.

 

8. 즐거움으로서의 노동: 친애하는 F. 그렇다면 푸리에는 성과 노동의 에너지를 어떻게 생각했을까요? 푸리에는 성적 에너지를 사회적 우주에 관한 (뉴턴 식의) 기본 법칙이라고 이해했습니다. 이러한 법칙을 알고 이를 적절히 활용하는 자는 성의 혁명 그리고 경제의 혁명을 발전시키고 인류를 완전성의 상태로 이전시킬 수 있다고 합니다.

 

인간 삶의 가치는 자신의 충동을 만족시키는 데서 나타나지, 결코 충동의 억압으로 성취되는 것은 아니라고 합니다. 다시 말해 인간 사회의 목표는 만인의 충동이 만족되는 것입니다. 이 점에 있어서 푸리에의 이론은 빌헬름 라이히 Wilhelm Reich의 오르가슴 이론과 근본에 있어서 유사합니다. 자고로 노동은 인간 삶을 위한 필연적 조건과 같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노동이 오로지 돈을 벌기 위해서 마지못해서 영위하는 일이어서는 안 된 다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