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 근대불문헌

서로박: 라블레의 '팡타그뤼엘 그리고 가르강튀아' (2)

필자 (匹子) 2022. 4. 9. 09:02

5. 학문과 교육 그리고 취미 활동: 텔렘 사원의 사람들은 마치 나중에 제후 내지는 고위 신하로 활약하려는 듯이 놀라울 정도의 교육을 받습니다. 이를테면 한 사내는 고결한 유희에 익숙해 있으며, 승마, 달리기, 수영, 레슬링 등을 연마합니다. 그는 무엇보다도 놀라운 춤 솜씨를 자랑하는 댄서이며, 고풍스러운 승마를 즐기기도 합니다. 사내는 여러 가지의 외국어에 능숙하며, 문학에도 조예가 깊습니다.

 

이렇듯 대부분 사람들은 아무런 걱정 없는 환경 속에서 자신이 하고 싶은 학문과 스스로 원하는 취미 생활을 즐기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텔렘 사원의 사람들이 고위층의 교양을 위한 모든 조건을 갖추기 위해서 학문과 운동에 몰두하며, 동시에 생업을 위한 의미 있는 직업에 대해서 전혀 신경 쓰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에게는 하인들이 있어서 의식주 문제에 걱정할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6.네가 원하는 대로 행하라!” 자유의 유토피아: 찬란하고 풍요로운 생활에도 불구하고 라블레의 텔렘 사원에서의 삶은 우리가 생각하기에는 지루함이 자리할지 모릅니다. 그렇지만 권태와 따분함은 텔렘 수도원에서는 전혀 찾아볼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곳의 사람들은 원하는 대로 행하라!”라는 원칙에 따라서 살아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텔렘 사원에서는 인간 삶에 있어서의 세 가지 고통이 원천적으로 배제되어 있습니다.

 

첫째의 고통은 가난입니다. 이곳 사람들은 아무런 걱정 없이 의식주의 풍요로움을 즐길 수 있습니다. 가난이 없으니, 노동할 필요도 없고, 미래의 걱정도 자리하지 않습니다. 인간 삶에 있어서의 두 번째의 고통은 복종입니다. 인간은 주어진 관습과 도덕 그리고 실정법의 노예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텔렘 사원의 사람들은 이러한 법과 도덕 그리고 관습을 무시하며 살아갈 수 있습니다. 이 대목에서 우리는 르네상스 시대의 인간인 작가 라블레의 완전한 자유에 대한 갈망을 읽을 수 있습니다.

 

 

7. 오늘을 즐겨라 Carpe diem. 그러나 방종으로 치닫지는 말라.: 인간 삶에 있어서의 세 번째 고통은 순결입니다. 여기서 순결함은 성의 순결을 지칭합니다. 자고로 순결과 정조는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인간 사회의 미덕으로 이해되어 왔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와 정반대되는 질문과 마주하게 됩니다. “만약 금욕이 지금까지 미덕으로 이해되었다면, 성을 즐기고 향유하는 것은 과연 악덕인가?” 이에 대해서 모두가 수긍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라블레에 의하면 성은 한편으로는 종족 번식과 관련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향유와 쾌락과 관련됩니다. 지금까지 인간의 성적 본능을 죄악으로 단정하고 이를 금기한 사상가 그리고 종교인은 아무도 없다고 합니다.

 

특히 사랑하는 임이 없이 살아가는 솔로들에게 누군가가 방종하게 살지 말고 순결과 지조를 지켜라.”고 말한다면, 이는 부자유의 질곡 속에서 살라는 것과 다를 바 없습니다. 라블레는 이 대목에서 성의 자유를 누리라고 은근히 말합니다. 인간의 삶은 결코 고통스러운 지옥으로 점철될 수는 없습니다. 라블레는 가르강튀아를 통해서 우리에게 다음과 같이 속삭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있으면 그에게서 사랑을 쟁취하라. 그 다음에 사랑을 실천하라. 설령 그것이 주어진 관습과 도덕 그리고 법의 범위에서 벗어난다고 할지라도 타인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범위에서 자유를 만끽하라고 말입니다.

 

 

 

 

 

8. 찬란한 삶과 무제한적인 자유를 묘사한 명작: 혹자는 다음과 같이 주장할지 모릅니다. “성적 자유를 최대한으로 누리면서 살라.”라는 디오니소스의 전언은 때로는 방종과 타락의 삶을 조장하는 게 아닌가? 하고 말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우리는 텔렘 사원의 사람들의 특성을 분명히 인지해야 할 것입니다. 텔렘 사원의 사람들은 교양을 지니고, 선한 품성을 간직하고 있는 귀한 인간군입니다. 설령 이곳의 모든 사람들이 자신의 느끼는 바를 실천하라.”는 계명을 실천한다고 하더라도 서로의 이해관계가 맞지 않는 경우에 있어서 그들은 타인에게 자신의 권한을 양보함으로써 이웃을 배려할 줄 압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텔렘 사원의 사람들은 늙은 사람이든 젊은 사람이든 간에 종심소욕을 생활화하더라도 결코 어떤 갈등을 빚지 않고 살아갑니다. 기실 풍족한, 억압 없는 삶이 태고 시대부터 이어져 온 인간의 원초적 갈망이었다는 사실을 고려한다면, 라블레의 텔렘 사원은 관료주의의 찬란한 유토피아에 대한 하나의 범례가 아닐 수 없습니다.

 

9. 텔렘 사원 공동체: 라블레의 텔렘 사원 공동체는 문학 유토피아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 적어도 인간이 공동으로 살아가는 한 사회적 의무 내지는 한계는 주어지기 마련입니다. 따라서 무제한의 자유는 부분적으로 제한당할 수밖에 없습니다. 바로 이 점이 텔렘 공동체가 현실적으로 출현할 수 없는 이유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20세기에 이르러 텔렘 사원 공동체는 잠시 고개를 내밀었습니다. 1920년 알레이스터 크롤리 Aleister Crowley라는 사람은 시칠리아의 세팔루 근처에서 농가를 변형시켜서, 텔렘 공동체를 개설하였습니다. 이 공동체는 시골의 코뮌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크롤리는 네가 원하는 대로 행하라!”라는 계명을 실천하였습니다. 그는 이곳에서 심령학 센터를 만들어서 마법적 제식을 행하게 하였는데, 많은 관심 있는 사람들이 이곳을 방문하기도 하였습니다.

 

문제는 공동체가 재정적인 어려움에 봉착했다는 점 그리고 공동체 사람들이 마약을 복용한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어느 날 영국의 대학생이 이곳에서 마약을 복용하다가 사망했는데, 이로 인하여 공동체는 출현한 지 3년만에 와해되고 맙니다. 텔렘 사원 공동체가 실현되기 위한 전제조건은 두 가지로 요약됩니다. 그 하나는 공동체 회원들이 고결함과 신의를 지녀야 하며, 경제적으로 풍족함을 누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참고 문헌

 

-라블레, 프랑스와: 가르강튀아와 팡타그뤼엘, 유석호 역, 문학과 지성사 2004.

-라블레, 프랑스와: 팡타그뤼엘 제 3, 유석호 역, 한길사 2006.

-Rabelais, Francois: (독어판) Gargantua und Pantagruel, München 1974.

-Berneri, Marie Louise: Reise durch Utopia, Berlin 198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