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 동구러문헌

서로박: 쿤데라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2)

필자 (匹子) 2016. 5. 27. 15:40

친애하는 B, 테레사가 서방세계에서 무엇을 느꼈을까요? 그것은 사랑과 우정 그리고 동류의식이 아니었습니다. 결국 테레사는 고향인 체코로 돌아가기로 결심합니다. 비록 프라하에는 가난과 부자유가 도사리고 있지만, 풍요롭지만 외로운 삶을 강요하는 서방세계보다는 고향이 낫다고 여겼습니다. 스위스에 혼자 남은 토마스 역시 고독을 견디지 못하고. 체코로 되돌아갑니다. 그러나 그는 더 이상 체코에서 의사로 일할 수 없습니다. 당국이 1968년에 발표한 자신의 기사 내용을 번복하라고 명령했을 때, 토마스는 이를 완강하게 거부했기 때문입니다.

 

그러자 그의 외과의사 자격은 일순간에 박탈당하게 됩니다. 토마스는 창문 닦는 청소부로 일하면서 살아갑니다. 주어진 환경의 변화에도 불구하고 주인공의 바람기는 사라지지 않습니다. 테레사는 토마스의 방탕한 생활방식 그리고 서로를 감시하는 프라하 사람들의 태도 등으로 인하여 오랜 시간 번민합니다. 결국 그미는 프라하를 떠나 보헤미안의 시골의 마을로 이주합니다. 토마스는 자신의 방탕한 생활을 접고, 테레사가 있는 마을로 향합니다. 두 사람은 그곳의 농업 공동체에서 마침내 평온을 얻게 되지만, 우연한 교통사고로 인하여 유명을 달리합니다.

 

 

 

영화의 한 장면 . 프라하의 봄

 

 

 

소설은 두 남녀의 사랑의 삶을 서로 교차시켜 서술하고 있습니다. 토마스와 테레사의 애정 관계 그리고 프란츠와 사비나의 애정관계가 그것입니다. 여기서 토마스와 사비나는 삶을 마음껏 향유하지만, 마치 나비처럼 가볍게 살아갑니다. 이들에 비해서 테레사와 프란츠는 완전무결한 사랑을 갈구하며 꿈속에서 살아가지만, 일상의 무거움 속에서 무겁게 생활합니다. 주인공 토마스는 존재의 가벼움을 즐기며 생활합니다. 의사인 그는 손을 내밀기만 하면, 모든 여성의 가냘픈 허리를 낚아챌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정작 자신이 무엇을 열망하는지 모릅니다. 그렇기에 그는 현대의 오이디푸스라고 말할 수 있으며, 사랑으로 방황하다 고향을 찾는 오디세이와 비교될 수 있습니다. 그에게는 순애보의 사랑을 베푸는 테레사가 있습니다. 테레사는 한편으로는 주인공의 모든 일상적 일감을 처리하는 하녀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생의 동반자이기도 합니다.

 

 

마치 오이디푸스가 진리를 깨닫고 권좌에서 물러났을 때 진정한 자아와 만날 수 있었듯이, 토마스는 모든 특권을 박탈당하게 되었을 때 비로소 자기 자신에게로 되돌아갈 수 있습니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 가벼운 존재로서의 인간 삶은 쿤데라에 의하면 참을 수 없는 게 아니라, 품을 수 없으며, 갈구할 수 없는 무엇일지 모릅니다. 그것은 망각과 같습니다. 작가는 작품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이야기는 개별적 인간의 삶처럼 참을 수 없이 경박합니다. 그것은 바람에 치솟는 먼지 혹은 깃털처럼 가볍습니다. 내일이면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을 그러한 사물처럼 말이지요.친애하는 B, 자고로 가벼운 존재의 유희는 마치 나비의 꿈처럼 망각 속에 머물고 있는 반면, 무거운 존재의 고통은 마치 무의식 저편에서 도사린 기억으로 머물지 않습니까?

 

 

마지막으로 쿤데라의 세계관을 비판적으로 고찰하기로 합니다. 그는 사상적으로 무신론을 표방합니다. 그렇지만 그의 무신론은 “인간의 영혼은 없고, 인간 존재는 주로 탄소, 산소, 수소로 이루어져 있다.”고 주장하는 경박한 무신론자, 루드비히 뷔히너 그리고 야콥 몰레쇼의 주장을 따르고 있습니다. 쿤데라에게 종교는 아무런 의미를 지니고 있지 않았습니다. 그가 하나님을 믿지 않는 것은 하나님이 완벽한 존재가 아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이 완벽하다면, 인간이 성가시게 똥을 누고 있지는 않을 것이라고 합니다. 다시 말해서 쿤데라는 인간이 태어나서, 밥을 먹고 배설하고, 죽는 자연 질서의 순환을 바람직한 것으로 고찰하지 않는 게 분명합니다.

 

이와 관련하여 녹색평론의 김종철 교수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근대의 세계에서는 이러한 순환 구조가 깨져버렸는데, 그것을 고찰하지 못하고 쿤데라는 똥을 단지 성가신 것으로 보는 거죠. 이게 서양의 현대 작가로서 그가 가진 근본적인 한계라고 저는 생각해요. 순환의 개념이 없어요. 하느님의 질서는 순환 고리로 연결된 완벽한 질서예요. 삶과 죽음이 돌고 돌면서 우주 생명을 지탱하는 구조란 말예요.” (녹색평론 111호, 74쪽).

 

작품은 송동준 교수에 의해서 번역 소개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