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 Brecht

서로박: 브레히트의 '앙리 뒤낭의 기이한 병' (2)

필자 (匹子) 2023. 2. 4. 06:51

 

친애하는 H, 눈을 뜨니 유명한 사람이 되어 있었다고 누가 말했던가요? 뒤낭의 책은 그야말로 순식간에 팔려나갔습니다. 수많은 독자들은 뒤낭에게 격려의 편지를 보냈습니다. 더러는 파리로 와서 강연해 달라고 권하기도 했습니다. 파리에서는 뒤낭이 의도하는 국제적인 자선단체가 결성될 수 있는 토대가 마련되어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당시에 뒤낭은 제네바 출신의 약혼녀와의 밀회를 꿈꾸고 있었고, 결혼 전 약 2주일간의 도보 여행을 계획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수많은 편지는 뒤낭의 인류애를 자극했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약혼녀와의 도보 여행 계획을 포기하고, 국제 자선 단체에 참가하기 위하여 프랑스 파리로 떠났습니다.

 

친애하는 H, 뒤낭은 멋지게 차려입고, 군인들의 비참한 삶과 죽음에 관해 강연하기 시작했습니다. 뒤낭의 강연은 커다란 호응을 얻기 시작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그의 말을 듣고 열광적으로 박수를 쳤습니다. 뒤낭의 강연 소식은 파리 전역에 알려지게 됩니다. 심지어 황제 역시 그를 만나려고 사람을 보냈습니다. 뒤낭은 어느새 프랑스 사회의 유명 인사가 되었습니다. 이 와중에서 그는 고향으로부터 한 통의 편지를 받게 됩니다. 뒤낭의 친구가 보낸 것이었습니다. 편지에서 친구는 뒤낭의 약혼녀가 몹시 불행하게 느끼고 있다고 서술했습니다. 뒤낭은 머뭇거리다가, 황제와의 알현을 잠시 접어두고, 고향으로 내려갔습니다. 그러나 약혼녀는 고향에 없었습니다. 그미는 뒤낭을 기다리다가 실망하여, 다른 남자와 함께 2주간의 도보 여행을 떠나고 말았던 것입니다.

 

친애하는 H, 타인에 대한 사랑과 동정심 그리고 박애주의의 정신은 때로는 경제적 손실을 낳기도 합니다. 뒤낭의 경우가 그러했습니다. 그는 개인적으로 불행을 맛보게 된 것입니다. 몹시 실망한 그는 이제 자신의 은행 일에 충실하려고 노력합니다. 은행장이 자리를 비워둔 관계로 그의 은행은 약간의 손해를 입고 있었습니다. 뒤낭은 파리에 있는 친구들에게 편지를 써서, 알제리 금융 사업을 도와달라고 부탁합니다. 그러나 파리의 친구들은 뒤낭의 부탁을 공손하게 거절하면서, 차라리 파리에서 하나의 새로운 사업을 계속해 보라고 권고합니다. 그것은 말하자면 적십자의 사업을 지칭하는데, 친구들은 위대한 휴머니스트 그리고 박애주의자로서 헌신적 노력을 다하게 되면, 사적인 이득이 저절로 굴러들어온다고 뒤낭을 설득하였습니다.

 

뒤낭은 이 시기에 깊은 좌절감에 빠져 있었습니다. 그것은 사랑의 상실로 인한 고통이었습니다. 바로 그 시기에 뒤낭은 자신의 약혼녀로부터 편지 한 통을 받았습니다. 거기에는 약혼녀가 다른 남자와 결혼하게 되었다고 적혀 있었습니다. 어느 날 뒤낭은 자신의 약혼녀가 어느 남자와 열정적으로 키스하는 모습을 먼발치에서 바라봅니다. 사랑하는 여자를 잃었다는 고통이 그의 가슴을 짓눌렀습니다. 바로 이때 제네바에서는 적십자사라는 단체가 창립되었습니다. 앙리 뒤낭의 이름이 맨 처음에 올라와 있었습니다. 초청장을 받아드는 순간 그의 마음속에서는 기쁨과 뿌듯한 자부심이 솟아올랐습니다. 그렇지만 주위에는 그를 반겨줄 사람이라고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적십자 단체가 지출하는 비용은 모조리 앙리 뒤낭의 몫이었습니다. 정작 창립 대회가 개최되던 날에 뒤낭은 적십자 단체에 자주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단체를 방문한 손님들을 접대하느라고 분주했기 때문입니다.

 

친애하는 H, 뒤이은 이야기를 짐작하시겠지요? 뒤낭의 은행은 경제적으로 위기에 봉착합니다. 앙리 뒤낭은 금융 사업에 심혈을 기울일 수 없었으며, 적십자 단체를 운영하기 위한 경비를 스스로 감당했기 때문이었습니다. 파리에 적십자 지사를 건립하는 데에만 약 5만 프랑이 소요되었습니다. 유럽의 수많은 사람들이 그를 초대했을 때, 뒤낭은 거의 절망적으로 알제리 금융 사업을 도와달라고 호소했습니다. 그러나 뒤낭의 호소는 언제나 물거품으로 화하고 말았지요. 2년 후에 뒤낭은 파산의 위기를 맞이합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은행에 맡겨둔 금액은 뒤낭에 의해 다른 곳으로 새나가고 말았던 것입니다. 이제 뒤낭은 사기꾼이라는 오명을 듣게 됩니다.

 

뒤낭을 가장 고통스럽게 만든 것은 자신의 약혼녀와 결혼한 남자가 은행 파산으로 인하여 자살하고 만 사건이었습니다. 그 남자는 자신의 온 재산을 뒤낭의 은행에다 맡겨 두었는데, 은행이 망하게 되자, 순식간에 알거지가 되어 거리로 나앉게 되었던 것입니다. 뒤낭은 언젠가 사랑했던 적이 있었던 여자 앞에서 무슨 말로 위로해야 할지 몰랐습니다. 마치 자신이 그미의 남편을 살해한 것 같은 느낌이 들어서 차마 그미가 눈물 흘리는 모습을 눈뜨고 바라볼 수 없었습니다. 언젠가 사랑하던 사람의 행복과 안녕을 도모해주어도 시원찮을 판국에 뒤낭은 옛 임을 엄청난 불행 속으로 빠져들게 하였던 것입니다.

 

 

 

 

 

 

 

친애하는 H, 돈이 없으면, 가족도 아무런 소용이 없다고 누가 말했던가요? 뒤낭의 가족들도 그로부터 서서히 등을 돌렸습니다. 가족들은 “조금만 기다리면, 좋은 결과가 있으리라.”는 뒤낭의 말을 더 이상 믿지 못하게 된 것입니다. 뒤낭의 동생들은 더 이상 그와 상대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이제 뒤낭은 경제적으로 그리고 심리적으로 완전히 패망하고 맙니다. 뒤낭은 적십자 운동으로 인하여 파산의 고통을 겪었지만, 적십자 단체에 속한 사람들 모두 뒤낭을 배척하려 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이제 더 이상 단체를 위해 경제적으로 도움을 줄 수 없는 처지에 이르렀기 때문이었습니다.

 

어느 날 뒤낭은 빚쟁이를 피해 종적을 감춥니다. 그 후에 뒤낭이 어떻게 살아갔는지에 관해서는 자세히 알려진바 없습니다. 그는 이곳저곳에서 강연했다고 하지만, 별반 수입을 얻지는 못했습니다. 사람들은 남루한 옷차림을 보고, 그를 무척 측은하게 여겼다고 합니다. 그래서 강연 역시 포기해야 했습니다. 1871년 독불 전쟁 당시에 적십자는 거대한 성과를 거두게 됩니다. 뒤낭 역시 전쟁 당시에 위생병으로 근무하려고 했는데, 사람들은 그를 알아보지 못하고, 적국의 첩자로 오인하여 나이든 위생병을 감옥에 처넣었다고 합니다. 80년대에 뒤낭은 거지처럼 동냥하며 살아야 했습니다. 1890년 사람들은 스위스의 빈민구호 단체에서 뒤낭을 발견하였습니다. 그는 지극히 냉소적인 인간으로 바뀌어 있었습니다. 가령 늙은 거지는 다음과 같이 중얼거리고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선함을 베푸는 자들을 망치게 해요. 그러니 더 이상 타인에게 도움을 주지 마세요. 그건 자신을 망치게 합니다.” 1901년에 한림원에서 두 사람이 그를 찾아왔습니다. 뒤낭은 노벨상 수상자로 선정되었던 것입니다. 노인은 수상을 거부하였습니다. 그리하여 노벨 평화상의 모든 금액은 어느 박애 단체에 귀속되게 됩니다. 말년에 그가 내뱉은 말들은 온통 염세주의적이고, 경고적인 것으로 이었습니다. 뒤낭은 1910년 어느 빈민 구호 단체에서 쓸쓸하게 죽어갔습니다.

 

친애하는 H, 그렇다면 뒤낭의 기이한 병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과 관련되는 무엇입니다. 자본주의 국가에서 “선”이란 하나의 끔찍하고도 파괴된 열정만을 부추기지 않습니까? 위대한 박애주의자 뒤낭은 궁극적으로 끔찍하고도 파괴적인 열정만을 부추기는 “선” 때문에, 스스로 파괴된 삶을 살다가 비참하게 최후를 마쳤습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선하게 살아간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한 것일까요? 우리는 사회주의 사회에서도 자신의 행복을 기대하던 바만큼 완전하게 실현할 수 없다는 사실을 구동독에서 체험할 수 있었습니다. 어째서 타인을 위해서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치면, 자신은 정작 불행을 겪어야 하는 것일까요? 「요한의 복음서」 12장 24절에는 다음과 같이 기술되어 있습니다. “한 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썩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썩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그렇다면 밀알이 오로지 썩어야만, 많은 열매를 맺는 것일까요? 하나의 밀알이 한 알 그대로 있으면서, 많은 열매를 맺게 한다는 것은 그렇게 어려운 과업일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