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 Brecht

브레히트: 이성의 저항력에 관한 연설 (2)

필자 (匹子) 2022. 6. 8. 11:15

(앞에서 계속됩니다.)

 

두뇌노동자는 자신의 개별 영역의 연구를 위해서 자신의 논리적 능력을 끊임없이 발전시켜야 합니다. 그렇지만 국가는 그가 자신의 논리적 사고의 능력을 (전쟁 내지 평화의 문제와 같은) 주요 분야에 적용시킬 능력을 갖추어서는 안 된다고 강권합니다. 두뇌노동자는 전쟁이 얼마나 끔찍한가를 혼자 고심할 수는 있겠지만, 매우 중요한 정치적인 결정권을 몇몇 소수의 사람들에게 모조리 떠맡기고 있습니다. 이를테면 전쟁을 치를 것인가, 평화를 선택할 것인가? 하는 선택권을 생각해 보세요. 문제는 이러한 소수의 사람들은 통상적으로 천박하기 이를 데 없는 지적 능력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따라서 두뇌노동자들은 이를테면 물리학 그리고 의학 등과 같은 개별 영역에서는 놀라운 능력을 발휘하여 어떤 학문적 결과를 도출해내지만, 정작 전쟁과 평화에 관한 가장 중요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이들의 방법론 내지 이론은 마치 중세에 출현한 그것들처럼 진부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현재 진행 중인 국가정책의 과업을 수행하기 위해서 고위층이 필요로 하는 이성의 양은 과연 얼마나 될까요? 그것은 그들의 자발적으로 선택하는 정책 결정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어떤 현대 국가에서 활용되는 이성의 양은 그야말로 놀라울 정도입니다. 만약 이러한 정책 결정이 다른 수단에 의해서 수행될 경우, 이를테면 전쟁의 와중에서 행해질 경우 정치가들은 놀랍게도 이성에 위배되게, 그야말로 비이성적으로 모든 것을 함부로 판단하여 결정 내리고 있습니다. 이처럼 현대의 전쟁은 엄청난 범위로 인간의 수많은 이성을 집어삼키고 있습니다.

 

이성의 중요성은 현대적인 인민 학교 교육을 통해서 실천되지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당시의 지배층은 어떤 이상적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 이성을 도입한 게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오로지 현대의 산업을 발전시키기 위한 목적으로 폭넓은 사회 계층 사람들의 지적 능력이 필요하다고 판단했습니다. 그리하여 지배층은 인민들이 학교 교육을 통해서 이성적 판단력을 배양하도록 원했기 조처를 취했던 것입니다. 만일 공장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정확하게 생산품에 나사를 박아 넣을 수 없을 정도로 최소한의 지적 능력을 갖추지 못한다면, 산업은 결코 정상적으로 가동되지 않으리라고 판단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실제로 사람들은 머리를 굴리지 않고서는 공장에서 제대로 일할 수 없었습니다. 이렇듯 고위층 사람들은 대중들이 사회의 기능인으로 일할 수 있을 정도만큼의 이성의 능력을 갖추기를 고대했던 것입니다. 사실 글을 읽을 수 없는 자들이 국가 간에 벌어지는 전쟁터에서 전투에 가담한다는 것은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이렇듯 대부분의 인간에게 필요한 이성의 양은 고위층이 내리는 정책 결정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이렇듯 사회적으로 요구되는 최소한의 이성, 이로써 보장 받게 되는 이성의 양은 이성의 질과는 무관하게 오로지 사회적 필요에 의해서 인위적으로 생성되는 것입니다. 사회적 지도층은 일반 사람들이 고도의 이성을 지니는 것을 결코 원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편안한 자세를 취하면서 대중들이 자신들이 필요한 만큼의 이성의 양을 발휘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당국은 전국에 인민학교를 도입함으로써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의 이성의 능력을 폭넓게 활용하도록 조처하였습니다. (히틀러는 1938년 인민의 무상 교육의 의무화하는 법안을 통과시켰다. 그렇지만 이 글은 1930년대 독일에만 해당하는 것은 아니다.- 역주) 이는 (전쟁) 산업의 활성화를 도모한 것이었지만, 수많은 대중들의 요구 사항을 광범위하게 채택한 것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대다수의 국민들에게 약간의 교육을 받을 수 있는 기회를 부여함으로써, 당국은 그들의 정치적 참여의 욕구를 철저히 봉쇄할 수 있다고 확신하였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한 가지 명제를 설정할 수 있을 것입니다. 지배층은 수많은 대중들을 억압하고 착취하기 위한 목적으로 그렇게 많은 량의 이성 그리고 그렇게 놀라운 이성의 질적 특성을 누리게 해주었는데, 결국 이로 인하여 그들의 억압과 착취가 역으로 위험에 봉착하게 되었다고 말입니다.

 

이를 냉철하게 생각한다면, 우리는 다음의 결론에 도달하게 됩니다. 파시즘 정부가 사람들로 하여금 최소한의 이성적 판단력을 지니게 하려는 비이성적 술수는 그야말로 돈키호테의 허튼 행동으로 판명되리라는 결론 말입니다. 말하자면 고위층 사람들은 어쩔 수 없이 거대한 양의 이성이 존속되고, 일반 사람들로 하여금 이성의 교육을 받도록 조처하였습니다. 그렇지만 그들은 다른 한편 자신이 원하는 바대로 마구잡이로 이성에 대해 모욕적인 발언을 일삼아 왔습니다. 그들은 원한다면 얼마든지 이성 자체를 하나의 질병이라고 선언할 수 있습니다. 지식인들을 야수와 같은 족속이라고 매도하면서 이들을 고발할 수 있으며, 이성의 힘으로 만들어진 라디오를 통해서 이성을 모독하는 발언을 마구잡이로 일삼을 수도 있습니다. 그들은 자신의 지배를 공고히 하기 위해서 대중들에게 더 많은 이성의 능력을 쌓으라고 설파하지만, 이러한 능력은 차제에는 그들의 지배 구도를 약화시키게 작용할 것입니다.

 

출전: Bertolt Brecht: Rede über die Widerstandskraft der Vernunft, in: ders. GW. Bd. 20, Frankfurt a. M. 1967, S. 252 – 25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