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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박: 하인리히 뵐의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필자 (匹子) 2019. 1. 19. 21:15

 

친애하는 S, 오늘은 하인리히 뵐의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를 다루어보기로 합니다. 이 작품은 당신의 졸업논문 테마이기 때문에 언급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뵐의 이 작품은 1953년에 발표되었습니다. 이 작품은 뵐의 첫 번째 성공작으로서 두 명의 숨은 영혼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숨은 영혼이라는 말은 약간의 설명을 요합니다. 두 명의 주인공은 고해의 바다 속에서 고통스럽게 헤엄치는 사람들로서, 내면적으로 독실한 교인들입니다. 이들의 모습은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의 상을 연상시키기에 충분합니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이들은 로마가톨릭교회를 저주하고 있습니다.

 

작품은 독일의 전후 사회를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전쟁이 끝났을 때 쾰른의 건물들은 전쟁으로 인하여 거의 모두 폭파되었으며, 대부분의 사람들은 물 부족과 식량난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이 와중에서 한 부부가 여러 명의 아이를 키우는 경우를 생각해 보세요. 폐허 속에서 아이를 돌보고, 우유 등의 생필품을 구하려고 동분서주하는 그들의 모습을 상상해 보세요. 어려운 환경에서 자식 키우는 일은 몹시 힘이 듭니다. 이는 그들에게 하나의 재앙으로 다가옵니다. 어쩌면 그들은 비유적으로 말하면 인고의 삶을 살아가는 힘없는 양들과 같습니다. 문제는 이들이 사회 내에서 망각한 힘과 경제력을 자랑하는 일부의 사람들에게 언제나 핍박당하면서 살아간다는 사실입니다.

 

 

 


남자 주인공 프레트 보그너는 어느 교회의 관청에서 전화 교환수로 살아가는 소시민입니다. 그는 전화 교환수로 일하며, 남는 시간에 다른 부업을 택하여 일하지만, 그의 수중에는 남아도는 돈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에게는 아내와 세 명의 자식이 달려 있기 때문입니다. 그의 뇌리에는 어떻게 해서든 가족을 돌보고 가정을 꾸려나가야 한다는 생각에 없습니다. 그러나 그는 안타깝게도 혼자 가출해야 했습니다. 저녁이 되면 쾰른 시가 마련해준 거처에서 다른 사람들과 뒤섞인 채 잠을 자며, 주말이 되면 아내를 만나서 값싼 여관을 선택하여 하룻밤을 지냅니다. 이때 그는 일주일 동안 번 돈을 고스란히 아내에게 전해줍니다. 그들은 어째서 이런 식으로 별거해야 할까요? 케테는 전쟁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프레트는 이에 대해서 전적으로 동의하지는 않습니다. 프레트의 마음을 짓누르는 것은 전후 사회의 끔찍한 상황입니다. 지난 5년 동안 제법 사람들이 서서히 번영을 누리게 되었는데, 여기에 보그너 가족과 같은 소시민들이 처음부터 배제되어 있습니다. 주위에서 불법을 자행하면서 살아가는 이기주의자들은 서서히 부자로 변신하는데, 가난하지만 착한 사람들은 여전히 공핍한 삶을 떨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 점은 프레트의 마음을 더욱더 갈갈이 찢어놓습니다.


다섯 명으로 이루어진 프레트의 가족들은 지금까지 누추한 단칸방에서 살아왔습니다. 방은 다섯 사람이 살기에는 너무 비좁습니다. 게다가 벽이 얇아서, 옆집으로부터 온갖 소리가 다 들려옵니다. 집의 여주인 프랑케는 돈을 벌어서 폐허가 된 집을 복구하느라고 여념이 없습니다. 소음은 주인공 프레트의 심리를 거의 병들게 만듭니다. 소음에 시달리는 주인공의 마음속에서는 어떤 공격 성향이 수시로 솟아오르니까요. 지금까지 주인공은 거의 6년 동안 어느 목사님의 도움을 빌려 비교적 넓고 조용한 거주지를 얻으려고 노력해 왔습니다만, 집의 여주인은 주인공의 이러한 요청을 처음부터 단칼에 거절했던 것입니다. 게다가 주인공이 가출한 이유은 오로지 거주지 문제 때문만은 아닙니다. 트레트는 자신을 내려다보는 집의 여주인, 프랑케의 경멸스러운 눈초리를 참지 못합니다. 프랑케의 눈에 비친 주인공은 아무런 능력 없는 술꾼 한 사람에 불과합니다. 그리하여 프레트는 두 달 전부터 가족을 떠나 혼자 살아갑니다. 시간이 나면 그는 폭탄 투하로 파괴된 쾰른의 거리를 이리저리 배회합니다.

 

 

 

영화 속의 여주인공 케테

 

집의 여주인 프랑케는 겉으로는 거대한 신앙심을 표명하지만, 실제 현실에서는 냉혹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그미는 “매달 한 번 미사를 집전하는 주교의 반지에 입을 맞추려고 안달하지만”, 주위의 힘들고 가난한 자들을 돕기는커녕 오히려 그들을 핍박하며 자신의 이익을 챙깁니다. 기껏해야 성탄절이 되면, 프랑케는 마치 거지에게 동냥하듯이 포도주, 초콜릿 등과 같은 온갖 싸구려 선물을 주인공의 집에 던져놓고 사라집니다. 왜냐하면 로마가톨릭교회가 연말이면 으레 프랑케의 동정심을 부추기기 때문입니다. 작가는 이 대목에서 특정 인간의 겉 다르고 속 다른 신앙심을 신랄하게 비판합니다. 나아가 작가는 로마 가톨릭교회의 체제 또한 신랄하게 비판합니다. 이를테면 교회는 겉으로는 십계명을 지키고 성찬식을 거행하면서 가난한 사람을 돕는다고 말하지만, 이는 제대로 실천되지 않습니다.


작품에는 농부의 얼굴을 지닌 신부님이 등장하는데, 오로지 이 분만이 유일하게 이웃 사람들을 진심으로 성심껏 돌보면서, 기독교적 사랑을 실천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신부님은 실제로 가톨릭의 체제와는 정반대되는 지조를 지닌 사람들을 규합하는데, 이들이 만나는 장소는 다름이 아니라 간식을 파는 길거리 가제입니다. 간이식사 가게에서 뜻있는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만나게 된 것입니다. 간이식사 가게는 마치 한국의 포장마차를 방불케 하는데, 이곳에서 행인들은 소시지와 음료수를 쉽게 구입할 수 있습니다. 프레트 보그너와 케테 그리고 신부님이 조우하는 것은 바로 그곳이었습니다.


소설은 1950년 9월 30일에 시작되어, 이틀 후인 10월 2일에 끝납니다. 케테는 어느새 다시 임신하여 자식을 낳으려 하고 있습니다. 프레트는 삶을 너무 고달프게 생각하면서, 아내와의 결별까지 염두에 두고 있습니다. 세 번째 날 그는 어느 거리에서 하나의 전환점을 맞이합니다. 이것은 그의 눈을 번쩍 뜨이게 하는 착상,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가족에게 되돌아가는 게, 바로 그 착상이었습니다. 원래 하인리히 뵐은 처음에는 14개의 장을 구상하였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계획은 철회되었습니다. 뵐은 14장을 생략하는 대신에, 13장 마지막에다 압축된 문장들을 덧붙였습니다. 작품에서 놀라운 점은 무엇보다도 주인공들의 관점 그리고 그들의 태도 변화입니다. 프레트는 아내가 다시금 임신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이루 말할 수 없는 괴로움을 느낍니다. 이러한 괴로움은 그를 깊은 우울 속으로 빠지게 합니다. 지금까지 주인공은 언제나 고통스러운 기억으로부터 그저 도피하기만 했습니다. 어린 시절에 접한 죽음의 기억, 전쟁터에서 군인으로 아주 지루하게 복무하던 기억 등은 그의 심리에 약간의 상흔을 안겨준 게 분명합니다.


그러나 케테는 프레트와는 다르게 행동합니다. 그미는 처음에는 모든 것을 체념하면서 자신의 삶을 숙명적으로 받아들이는 여자였습니다. 그는 결혼하기 전에는 영아들을 돌보며 살았습니다. 결혼을 위해서 돌보던 아이들과 이별해야 했을 때 그미는 죄의식을 느꼈습니다. 가령 그미는 농부처럼 생긴 신부님 앞에서 고해했는데, 이때 그미는 그 신부님이 다른 권위주의적인 신부들과는 다르다는 사실을 접하게 됩니다. 어쨌든 케테는 고통스러운 결혼의 삶에서 아이들로 인해 지치게 되었지만, 나중에는 당당하게 고난과 싸워나가기로 결심합니다. 두 사람의 이러한 다른 태도는 다음의 장면에서 극명하게 드러납니다. 가령 프레트가 술집의 자동 기계 앞에서 복권을 구매하면서, 당첨이라는 헛된 망상을 저버리지 못하지만, 케테는 일상의 모든 더러움을 제거하기 위하여 팔을 걷어붙이는 장면을 생각해 보십시오. 이를테면 케테는 결정적인 순간에 호텔에서 남편을 만나서 심도 있는 대화를 나눕니다. 지금까지 그미는 자식 때문에 지금까지 사랑하던 남자를 포기해야 할까 하고 번민해 왔습니다. 그미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당신은 한 번도 생각하지 못하고 있어요. 당신을 힘든 삶을 견디지 못하고 항상 어디론가 도망을 치고 있지요? 당신의 이러한 태도가 우리 모두를 서서히 죽여가고 있어요. 왜냐하면 당신은 우리 곁에 없기 때문이지요. 생각해 보세요. 우리를 도울 수 있는 것은 기도밖에 없어요.” 결국 자식을 사랑한다는 점 그리고 반복되는 일상으로부터 벗어나, 정말로 한 여인을 사랑한다는 점을 확인한 주인공은 마침내 집으로 돌아가기로 결심합니다.

 

 

 


작품의 제목은 제 4장에서 나타나듯이 남자 주인공의 태도와 관계됩니다. “그리고 그는 한 마디로 말하지 않았다.” 이처럼 프레트는 모든 것에 대해서 수동적으로 반응하는 생명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그를 새롭게 살아가게 만드는 사람은 다름이 아나라 케테입니다. 그미는 자신의 쌍둥이 아들을 죽게 만든 자들을 결코 용서할 수 없습니다. 그미는 성당 속에 안주해서 살아가는 신부들을 증오합니다. 또한 종교인들이 신도에게 강요하는 이른바 무조건적인 겸허함에 대해 강하게 반발합니다. 케테의 이러한 자세는 종교의 탄압에 침묵을 지키면서 죽음으로써 저항하던 순교자들의 순수한 자세를 본받으려고 하고 있습니다. 자고로 “신에 대한 무조건적인 귀의 islam”는 최소한 고통당하며 살아가는 피조물들에게 어떠한 의미를 전해주지 않는 허사에 불과하다고 느낍니다. 케테는 이러한 허사 대신에 기독교적인 순결한 마음에서 비롯하는 올곧은 저항을 선택합니다. 기독교의 사랑은 거대한 교회를 지어서 편안하게 살아가는 사제들을 위한 것은 결코 아닙니다. 오히려 그리스도의 내밀한 말씀은 이 세상에서 가장 힘없고, 불쌍하고, 소외된 인간의 안녕을 도모하기 위한 수단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하여 그미는 거대하고 웅장한 가톨릭 성당 대신에 비록 허름하지만 그럼에도 양심적인 모습으로 아기 예수를 안고 있는 마리아의 성당을 선택하고 있습니다.


작품은 1953년 말까지 불과 몇 개월 동안에 만 칠천 부가 팔려나갔습니다. 소설적 수준도 수준이지만, 뵐의 소설이 전후 시대에 힘들게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용기와 희망을 불러 넣어주었다는 점, 어떠한 이데올로기에 의해서 착색되지 않은 채 모든 것을 진솔하게 드러내었다는 점 등이 독자를 매료시킨 게 아닌가 하고 생각됩니다. 친애하는 S,  작품의 주제를 내 생각으로는 “하인리히 뵐의 작품에 나타난 가톨릭교회 체제에 대한 비판”으로 설정하는 게 어떨까요? 부지런히 쓰면, 정해진 시간 내에 논문을 완성할 수 있을 것입니다. 열심히 노력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