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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박: (요약문) 옐리네크의 '피아노 치는 여자'

필자 (匹子) 2020. 9. 14. 09:38

 

친애하는 E, 오늘은 오스트리아 출신의 작가, 노벨상 수상작가인 엘프리데 옐리네크 (Elfriede Jelinek, 1946 - )의 소설 『피아노 치는 여자 Die Klavierspielerin』에 관해서 자세히 다루어보기로 합니다. 이 작품은 자전적 내용을 담은 소설인데, 1983년에 발표되었습니다. 70년대 중엽에 작가는 『연인들 Die Liebhaberinnen』 (1975)이라는 작품을 발표한 바 있는데, 여기서는 소시민들의 사랑의 삶 속에 도사리고 있는 수많은 성적인 고통과 테러 행위가 신랄하게 묘사되어 있습니다.

 

시민사회에서 살아가는 대부분의 여성들은 사랑의 삶에서 성적 행복을 만끽하면서 살아가지 못합니다. 오히려 그들은 결혼 이전의 시기에 꿈꾸어왔던 달콤한 삶을 누리기는커녕, 때로는 가족들로부터 심각한 스트레스를 받기도 합니다. 때로는 나이든 미혼여성의 경우에는 부모 사이의 관계에서 말할 수 없을 정도로 깊은 심리적 상처를 받기도 합니다. 작품 『피아노 치는 여자』역시 사랑의 삶에서 치유될 수 없는 커다란 고통의 이야기를 전개해 나가고 있습니다.

 

 

 

 

에리카 코후트는 피아노를 가르치면서 어머니와 함께 살아가는 30대의 미혼 여성입니다. 그미의 아버지는 경제적 능력이 없었으며, 혼란스러운 감정을 지닌 병든 남자였습니다. 결국 그미의 아버지는 집을 나간 뒤에 객사하고, 에리카는 어머니와 함께 생활하고 있습니다. 모녀의 관계는 생각보다 밀접합니다. 심지어 그들은 한 침대에서 잠을 잡니다. 이는 유럽에 사는 대부분 젊은이들의 일반적 삶과 비교하면 현격한 차이를 보여줍니다. 유럽 젊은이들은 20세가 넘으면, 부모의 집을 떠나 홀로 살아가지 않습니까?

 

에리카와 어머니와의 관계는 지극히 비정상적입니다. 그것은 어쩌면 사도 마조히즘의 공생관계로 설명될 수 있을지 모릅니다. 어머니는 나이든 딸에게서 아버지를 대리하는 애정을 은근히 바라고 있으며, 딸은 어머니가 시키는 대로 모든 일을 마치 노예처럼 행합니다. 이로 인하여 에리카는 자신의 감정을 스스로 조절하지 못하고 살아가며, 다른 여성들이 경험하는 남자 친구와의 자연스러운 애무라든가 키스조차 경험하지 못한 채 살아갑니다.

 

어머니는 자신의 딸이 피아니스트가 되기를 바랐으며, 어린 시절부터 피아노 공부를 시켰습니다. 그러나 에리카는 탁월한 피아니스트가 되지는 못했습니다. 시간만 나면 피아노 앞에서 열심히 연습했습니다만, 이는 자신의 자발적인 의지에 의해서가 아니라, 어머니의 요구에 부응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렇기에 그미가 피아노의 대가가 된다는 것은 처음부터 불가능했습니다. 그렇지만 한 가지 위안이 있다는 그것은 자신이 최소한 피아노를 가르치면서 자신의 밥벌이를 할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미에게는 남자 친구를 사귈 시간이 조금도 없습니다. 게다가 아버지가 가출한 뒤부터, 어머니가 가사를 돌보고, 에리카는 마치 집안의 가장처럼 돈을 벌게 되었습니다. 어머니는 에리카가 벌어온 돈을 모아서 자신 소유의 집을 장만하려고 합니다. 그렇기에 어머니로서는 딸이 오로지 피아노 연습과 피아노 레슨 외에는 어떠한 다른 사람을 만나지 못하도록 조처를 취합니다. 그미는 일상생활에 필요한 모든 사항에 대해 에리카에게 시시콜콜 간섭합니다.

 

가장 중요한 문제는 어머니가 딸을 여전히 자신소유물로 취급한다는 사실에 있습니다. 어머니의 견해에 의하면 딸이란 멀리 떠나지 않는 언제나 같은 공간에 머물러 있어야 하는 존재라고 합니다. 에리카는 새장 속의 새로 살아갑니다. 만약 에리카가 늦게 귀가하면, 어머니는 마치 근엄한 재판관처럼 노발대발 고함을 지르면서, 그미에게 온갖 욕설을 퍼붓곤 합니다. 심지어는 어머니가 몽둥이를 들고 에리카에게 달려든 적도 있었고, 에리카의 머리채를 쥐어 잡고 마구 흔든 적도 있었습니다. 에리카는 어머니로부터 끊임없이 심리적으로 상처 입습니다. 이러한 지속적인 상처는 심리적 상흔으로 그미의 무의식을 경직시키게 만들고, 급기야 그미를 철저히 무감각 인간으로, 때로는 우울한 인간으로 만들어 놓습니다.

 

주인공 에리카의 삶은 너무나 지루하고, 끔찍하기까지 합니다. 그래서 그미는 처음에 바늘로 자신의 살을 찔러봅니다. 자신의 살결에서 피가 돋으면, 그미는 고통을 느끼지 않고, 오히려 갑갑한 심리적 감옥에서 탈출하는 듯한 착각에 빠집니다. (무릇 자해는 외부로 받은 스트레스를 자신에게 공격적으로 해소하는 방식입니다. 자해는 반드시 중독으로 이어진다는 점에서 몹시 위험합니다. 학교 성적 문제로 고민하는 남한의 여학생들이 자해 소동을 벌이는 경우를 우리는 신문에서 접할 수 있지요.) 주인공 에리카의 자해 행위는 서서히 도를 넘습니다. 그미는 목욕탕에서 면도날을 거머쥐고 자신의 생식기의 살을 그어댑니다. 핏방울이 떨어지면, 약간의 해방감을 느끼곤 합니다.

 

 

 

 

 

자고로 자식에 대한 부모의 과도한 욕망은 자식의 심리를 망치는 법입니다. 자식은 부모의 인정을 받기 위해서 노력하지만, 실제로는 자신이 정작 무엇을 원하며 살아가는지 모르고 있습니다. 제 아무리 노력해도 부모의 과도한 욕망은 성취되지 않습니다. 이 경우 부모는 자식에 대한 실망을 토로하고, 자식은 자식대로 자신의 무능력 아닌 무능력으로 속 태우지요. 문제는 자식이 느끼는 자신의 능력의 한계가 사랑의 삶에서도 이어진다는 사실입니다. 다시 작품으로 돌아가겠습니다. 에리카의 어머니는 오랜 시간이 흘렀음에도 자신의 간절한 꿈을 포기하지 않습니다. 바로 에리카가 훌륭한 피아니스트로 명성을 떨치는 게 바로 어머니의 꿈이었습니다.

 

훌륭한 피아니스트가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음악성을 키워나가야 하고, 열손가락으로 피눈물 나게 건반을 두드려야 합니다. 이를 위해서는 육체적 욕망이라든가 감각적 기쁨 모든 것을 포기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마치 중세의 시대에 어린 테너 가수 지망생이 변성기를 겪지 않으려고, 스스로 거세를 감행하듯이, 피아니스트가 되려는 여자는 육체적 욕망이라든가 이성에 대한 사랑의 감정을 지녀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에리카는 훌륭한 예술가가 되지는 못했지만, 그런대로 훌륭한 음악 교사가 되었습니다. 음악의 악보는 그미의 삶에서 마치 자신의 몸을 옥죄이는 코르셋처럼 작용하였습니다.

 

문제는 에리카가 음악 뿐 아니라 삶에서 스스로 체득한 바를 자신의 제자에게 그대로 전해준다는 사실입니다. 그미는 작은 피아노 연주회를 개최하는데, 자신에게서 피아노 배우는 학생들의 학부형이 연주회에 참가하지 않을 경우 에리카는 그들에게 나쁜 점수를 매깁니다. 이를테면 그미는 흥청망청 즐기는 대중들의 유유자적한 태도를 몹시 경멸합니다. 처음에 에리카는 어머니가 시키는 대로 언제나 피아노 곁에서 생활합니다. 그러나 에리카는 서서히 자신의 외모를 바라보고, 아름다운 옷이라든가, 멋진 신발 그리고 명품 백에 관심을 기울입니다. 상점에서 몰래 옷을 훔치지만, 두려움 때문에 그미는 훔친 옷을 길가의 쓰레기통에 버립니다.

 

에리카는 어머니 몰래 소풍을 떠나기도 하고, 포르노 영화관에서 창녀들이 남자들과 즐기는 성행위를 아무런 흥분도 느끼지 않은 채 그냥 멀거니 감상하기도 합니다. 아니, 젊은 여자가 포르노를 관람하면서 아무런 흥분을 느끼지 못한다는 것 자체가 문제가 아닐까요? 에리카는 늦은 저녁 자동차 안에서 성교하는 남녀를 무심결에 골똘히 쳐다보다가, 졸지에 “새잡는 여자로 몰려 곤욕을 치르기도 합니다. 에리카가 밤늦게 귀가하는 일이 많아집니다.

 

이로 인하여 어머니와의 마찰은 더욱 커지게 됩니다. 에리카는 그럼에도 어머니의 집에서 가출하여 홀로 살아가려고 하지 않습니다. 지금까지 한 번도 혼자 살아본 적이 없는 그미로서는 독신녀의 삶을 무척 두려워합니다. 그게 아니라면 에리카는 어쩌면 무의식적으로 스톡홀름 신드롬에 갇혀 있는지도 모를 일입니다. 마치 인질로 잡혀 있는 사람이 인질범보다도 경찰을 더 두려워하듯이, 그미는 어처구니없게도 자신에게 고통을 가하고 부자유를 강요하는 어머니를 외부의 어떠한 존재보다도 더 가엾게 여기고 있습니다.

 

 

 

 

 

어느 날 에리카에게서 피아노를 배우려는 남학생이 찾아옵니다. 그는 발터 클레머라는 스포츠를 좋아하는, 평범한 대학생이었습니다. 발터는 피아노를 배우는 일보다 에리카에게 더 많은 관심을 두고 있었습니다. 에리카는 처음에는 발터의 구애를 무시하다가, 나중에는 그를 경멸하기까지 합니다. 문제는 그가 구애를 포기하지 않는다는 사실이었습니다. 클레머는 나이든 여선생에게 더욱더 적극적으로 다가가려고 합니다. 어느 날 그는 탈의실로 따라온 뒤에, 에리카에게 키스를 퍼붓더니, 그미의 치마를 거머쥡니다.

 

에리카의 몸은 순식간에 넘어지고, 발터의 손가락은 그미의 하복부로 향합니다. 에리카는 그의 육중한 몸을 밀칩니다. 에리카의 뇌리에는 언젠가 관람하던 포르노 영화가 스쳐 지나갑니다. 그미는 발터의 바지를 열고, 그의 발기한 페니스를 끄집어냅니다. 에리카는 손으로 발터의 욕정을 아무런 생각 없이 주물럭거립니다. 발터가 가까이 다가가려고 했을 때 에리카는 가만히 있으라고 소리를 지릅니다. 발터가 오르가슴에 도달하기 일보 직전에, 에리카는 페니스를 만지던 손을 놓아버립니다. 발터가 그미에게 다가갔을 때, 에리카는 싫다고 말하면서 그 자리를 벗어납니다.

 

다음 날 피아노 레슨 시간에 에리카는 아무런 일이 없었던 것처럼 행동합니다. 그미는 발터의 서툰 피아노 솜씨를 꾸짖습니다. 발터는 주말에 함께 시간을 보내자고 제안했으나, 에리카는 이를 거절합니다. 발터로서는 에리카의 행동이 도저히 이해되지 않았습니다. 여선생은 자신을 원하는 것 같기도 하면서 거부하는 것 같기도 했습니다. 수수께끼 같은 에리카의 행동은 발터의 욕정을 더욱 자극합니다. 그는 마치 스토커처럼 귀가하는 에리카의 뒤를 밟습니다.

 

어머니는 낯선 남자의 방문에 순간적으로 불쾌함을 드러냅니다. 에리카는 자신의 제자와 이야기할 게 있다고 말하면서 발터를 자신의 방으로 데리고 갑니다. 그 다음에는 자신이 쓴 편지를 꺼내어 읽어보라고 발터에게 명령합니다. 편지 속에는 에리카의 내밀한 욕망이 마치 악보처럼 명령의 형태로 기술되어 있었습니다. 그것은 놀랍게도 자신을 때리고 괴롭히며, 성적으로 학대하라는 내용이었습니다. 발터는 편지의 내용에 소스라치게 놀랍니다. 그는 다만 에리카와 사랑을 나누고 싶었을 뿐, 결코 변태 행위를 의식한 적이 없었던 것입니다. 발터는 참담한 마음으로 밖으로 뛰쳐나갑니다.

 

 

 

 

 

그 후로 발터는 더 이상 피아노 레슨을 받지 않습니다. 에리카는 시간을 내어 발터가 자주 연습하는 아이스하키 경기장으로 향합니다. 두 사람은 경기장 내의 청소부 창고로 향합니다. 에리카는 무릎을 꿇은 채 말 없이 발터의 바지를 벗깁니다. 포르노 영화 속의 한 장면처럼 에리카의 은 발터의 성기로 향합니다. 에리카가 그의 성기를 빨려고 했지만, 그것은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말하자면 그는 “지금까지 한 번도 밖으로 분출되지 않은 피아노 여교사의 내면세계”에 대해 일순간 두려움을 느낍니다. 이러한 두려움은 에리카와 살을 섞으려는 그의 성적 열망을 완전히 사라지게 만듭니다. 발터는 자신이 일순 성적으로 불능 상태에 처해 있다는 사실에 몹시 실망합니다. 그래서 그는 그곳을 황급히 떠납니다.

 

발터는 밤늦도록 공원을 배회합니다. 플라밍고 한 마리라도 때려 죽여야 속이 풀릴 것 같았습니다. 공원에는 젊은 남녀가 애무하고 있었습니다. 발터는 몽둥이를 들고, 그들에게 위협을 가합니다. 그는 어느 처녀가 남긴 털옷 상의를 발로 짓밟아버립니다. 사디즘의 욕망이 행동으로 드러나면서, 에리카가 편지에 기술했던 끔찍한 욕망이 행동으로 표출되었던 것입니다. 뒤이어 발터는 에리카와 어머니가 거주하는 동네로 와서 어둠 속에서 수음합니다. 밤이 깊어졌습니다. 발터는 에리카의 집 문을 두들깁니다. 문이 열리자마자 그는 방안으로 돌진하여 에리카의 뺨을 사정없이 갈깁니다. 에리카의 어머니가 경찰을 부르려고 했을 때, 발터는 그미를 침실로 몰아넣고 방안에 가두어버립니다. 부엌에서 물을 벌컥 마신 다음에 그는 에리카를 주먹으로 때린 다음에 그미의 성을 마구잡이로 유린해버립니다.

 

다음 날 에리카는 몸속에 칼 한 자루 감춘 채 발터가 다니는 기술 대학으로 향합니다. 그를 죽일지, 아니면 그를 연인으로 되찾아야 할지 판단이 서지 않습니다. 학생들 사이에서 발터가 눈에 뜨입니다. 그는 친구들과 대화를 나누고 있었습니다. 에리카는 그가 어느 여대생에게 추파를 던지는 모습을 멀거니 지켜봅니다. 에리카의 마음속에서는 자신을 학대하고 싶은 욕구가 끓어오릅니다. 그미는 칼을 꺼내어 자신의 어깨를 찔러버립니다. 어깨에서는 피가 솟아납니다. 피 흘리면서 집으로 향하는 그미의 모습은 마치 짝 잃은 미친 비둘기 암컷처럼 보입니다.

 

 

영화 "피아노 치는 여자"에서는 원래의 소설이 약간 다르게 각색되어 해피엔딩으로 종결되고 있다. 에리카는 소설 속에서 한 번도 미소 짓지 않는다.

 

소설의 내용이 어떠했는지요? 옐리네크는 에리카라는 인물을 통해서 가족 구성원들에 대한 한 인간의 복종과 심리적 굴복이 얼마나 깊은 상흔을 남기는가 하는 문제를 깊이 파고들었습니다. 소설의 내용은 일견 포르노라는 느낌을 강하게 불러일으키지만, 근본을 고찰할 때 우리는 주인공의 비정상적인 심리 그리고 그것이 태동하게 된 배경 등을 접할 수 있습니다. 에리카는 주어진 환경 속에서 자신의 심리대로 활동지 못하는 영혼입니다. 그미는 자신이 얼마나 불행하게 살아가는지 충분히 감지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당신도 짐작하다시피 에리카는 노이로제 환자입니다. 이는 무엇보다도 어머니의 영향 때문입니다. 그미는 자신의 질병을 전혀 의식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피아니스트로서 성공을 부추기는 어머니의 욕심은 한 인간의 프시케를 서서히 망가뜨려 왔습니다. 에리카는 오로지 미래의 성공만 바라보며 달리는 자동차입니다. 주위에 얼마나 아름다운 꽃이 피어 있고, 얼마나 많은 연인들이 사랑을 나누는지 알 턱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에리카의 노이로제를 치유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그미의 얼어붙어 있고 경직되어 있는 몸과 마음을 다른 상태로 바꾸게 하는 일일 것입니다.

 

친애하는 E, 주제와 관련하여 여기서 또 한 가지 다른 문제를 지적하려고 합니다. 한 인간이 성공을 거두려면, 뒤에서 밀어주고 앞에서 끌어주는 조력자를 필요로 합니다. 에리카는 경제력도, 권력도 없는 가난한 집에서 오로지 피아니스트를 꿈꾸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주인공에게는 자기 논리에 빠져서 마구 호령하는 어머니밖에 없습니다. 게다가 어머니는 생활비를 필요로 합니다. 에리카는 어머니의 모든 요구들을 충족시켜야 할 형편에 처해 있습니다.

 

돈과 남성적 권력이 활개 치는 세상에서 에리카처럼 아무 것도 가진 게 없는 여성이 훌륭한 예술가로 성공을 거둔다는 것 자체가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 아닐까요? 신분 상승을 위해서 소시민, 그것도 여성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오로지 피나는 노력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피나는 노력은 역설적으로 개인 한사람의 영혼을 서서히 병들게 하고, 그의 삶을 불행의 소용돌이 속으로 빠지게 만듭니다. 이게 바로 작품이 제시하는 놀라운 역설입니다. 옐리네크는 바로 이러한 역설적 문제점을 분명하게 보여주었습니다. 그렇기에 『피아노 치는 여자』는 심리 치료에 필요한 소설이며, 그 속에는 사회학적 차원에서 어떤 완강하고 집요한 페미니즘의 전언은폐되어 있습니다.

 

피아노 치는 여자는 이병애 교수의 번역으로 한국에 소개 되었습니다.